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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88화 (88/121)
  • 88화. 검은 밤의 만찬회 (10)

    레너드가 가버린 뒤에도 그의 방을 조사하는 일은 계속되었지만, 교단의 브로치가 발견된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나는 밀리엄과 함께 옷장 쪽을 뒤졌는데, 가진 옷가지가 상당히 적긴 했으나 옷장 안에서도 옷주머니 속에서도 특별하거나 수상한 무언가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이불 안쪽이며 방의 구석진 곳들을 열심히 살펴보고 다닌 제임스 역시 소득이 없었다며 고개를 내젓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레너드 에버렛의 방을 조사하여 알게 된 사실이라곤 그가 어쨌든 메이슨 교단의 일원이며, 이상할 정도로 밋밋하고 생활감 없는 공간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정황 정도였다.

    레너드 에버렛의 방을 나선 우리는 곧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라이오넬 에버렛의 방으로 향했다.

    문앞에서 우리를 맞이한 라이오넬은 그의 형보다도 훨씬 찝찝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밀리엄과 제임스를 먼저 들여보낸 나는 잠시 방 입구에 서서 고민했다.

    이 사람과도 대화를 해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지하석실 앞에서의 일도 그렇고, 아까 전 내게 지어 보인 표정도 그렇고, 라이오넬 에버렛은 이래저래 대화해볼 이유가 충분한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단 한 번조차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상대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기회에 한 번’ 하는 마음으로,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라이오넬을 향해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직후 돌아온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라이오넬 에버렛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해버렸다.

    내가 자신을 향해 무어라 입을 열려는 것을 분명 보았을 텐데도 말이다.

    나는 조금 불안해 보이는 눈으로 자기 방 안쪽을 훑기 시작하는 장신의 사내를 멍하니 응시하며 그 눈길이 다시 내게 돌아오기를 기다려보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명백히 나와 대화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내게 한없이 살갑게 굴며 한 마디라도 더 나눠보려 친근하게 다가오던 리디아 에버렛이나,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내게 지대한 관심과 용건이 있음을 숨기려 들지 않았던 레너드 에버렛과는 전혀 상반된 태도였다.

    대놓고 이런 태도라면 말을 걸어도 무시당할 게 빤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백번 양보해 무시당하지 않는다 한들 쓸 만한 정보를 캐낼 수는 없을 것이다.

    대화할 생각이 없는 상대를 자연스레 내가 원하는 화제로 이끌거나, 교묘한 화술로 내게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는 일은 내 빈한하기 짝이 없는 말재주로 이뤄낼 수 있는 종류의 목표가 아니었다.

    결국 나는 라이오넬 에버렛과의 대화를 미래의 나에게 미루기로 하고서, 뒤늦게나마 그의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이오넬 에버렛의 방과 레너드 에버렛의 방은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우선 라이오넬의 방은 레너드의 방처럼 어질러져 있지 않았다. 아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수준도 아니었으나 확실히 사람 사는 방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바꿔 말하자면, 레너드의 방과 달리 생활감이 제대로 묻어나는 방이었다.

    창가나 작은 테이블 위에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시들지 않은 상태로 보기 좋게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필기구며 신문더미 같은 것이 정신없이 놓여 있고, 그 옆의 책장에는 책이 한가득 꽂힌 채다. 한 마디로 가구나 물건이 훨씬 많았다.

    물론 방이 비좁아 보일 만큼 꽉꽉 채워넣은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레너드 에버렛의 방과 비교했을 때 ‘10년 넘게 여기서 지냈다’는 설명에 훨씬 걸맞는 느낌을 주는 정도.

    잔뜩 어질러져 있음에도 기이한 위화감이 들 만큼 살풍경스럽던 레너드 에버렛의 방.

    그에 비하면 제대로 정돈된 상태인데 멀쩡하게 생활감이 느껴지는 라이오넬 에버렛의 방.

    나는 형제의 방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차이 나는 데에 어떤 이유가 있을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단지 취향이나 생활방식의 차이라고 대충 보아 넘기기엔 너무 극명한 대비가 아닌가.

    무언가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어찌어찌 우겨서 리디아 에버렛의 방까지 조사해본다면 뭔가 그럴듯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

    잠시간 그런 생각을 하며 멈춰 서 있던 내 앞을 제임스가 스윽 스쳐 지나갔다. 짐짓 날카로운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였다.

    그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맞아. 방을 조사하는 중이었지.

    방 분위기에 대한 상반된 감상을 비교하고 그 의미를 파헤치는 일은,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나중으로 미뤄도 좋을 것이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도리질을 치고, 다시 방 곳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들여다본 책상 위에는 책갈피가 꽂힌 책, 각기 다른 신문사에서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신문뭉치, 마구 휘날려 써서 도저히 내용을 알아보기 힘든 메모들이 이리저리 흐트러진 채 놓여 있었다.

    나는 그런 책상 위를 쭉 훑다가 레너드 에버렛의 방에서 발견했던 것과 같은 상자를 발견하고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저 안에도 메이슨 교단의 브로치가 들어 있겠지.

    라이오넬 에버렛이 교단의 신자라는 사실이야 이미 알고 있던 바, 솔직히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상자를 발견한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을 보자 어쩔 도리 없이 그저께 있었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라이오넬 에버렛은 누나와 교주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으며, 나도 그랬으리라고 반쯤 확신하는 듯 보였고, 그런 나를 추궁하는 대신 나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가 메이슨 교단의 신자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신실한 신자’이기도 할까?

    어쩌면 그도 리디아 에버렛이 말한 배교자들 가운데 하나는 아닐…….

    “에버렛 씨. 잠시 이리 와주시겠습니까?”

    내 시선이 상자에 멈춰 있던 잠깐 사이, 침대 아래를 조사하던 밀리엄이 무언가를 꺼내들더니 갑자기 라이오넬 에버렛을 불렀다.

    문간에 서 있던 라이오넬 에버렛이 뚜벅뚜벅 걸어 밀리엄 앞에 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밀리엄은 라이오넬이 자기 앞에 서기 무섭게 손에 든 물체를 그들의 목전까지 들어올렸다.

    두 남자의 시선 사이를 가로막고 선 것은 웬 나무손잡이처럼 생긴 물체였다.

    밀리엄은 라이오넬을 부른 주제에 그것이 뭐냐고 묻지 않았고, 라이오넬 또한 제 눈앞에 들이밀어진 물건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게 뭐지? 하는 의문이 든 순간, 밀리엄이 비어 있는 왼손을 물건의 한쪽 면으로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철컥,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마치 부채가 펼쳐지듯 날카로운 칼날이 두터운 손잡이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밀리엄이 침대 밑에서 발견한 물건은 다름 아닌 잭나이프였다.

    나는 난데없는 날붙이의 등장에 한 번, 왠지 모르게 상당히 중요한 단서로 추정되는 그것을 발견한 게 플레이어인 내가 아니라 밀리엄이라는 사실에 두 번 놀라 그들이 서 있는 쪽으로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날이 제대로 서 있군요. 침대 밑에 떨어져 있던데.”

    “그랬습니까? 어디로 갔나 했더니.”

    “찾으시던 물건인가 봅니다.”

    “예. 누님 형님과 함께 맞춘 소중한 물건이라서요. 누님은 얼마 전에 잃어버리신 모양이지만.”

    “능숙하게 다루시는 편입니까?”

    “이제 실수로 제 손을 베지 않을 만큼은 다룹니다.”

    “소중히 여기시는 물건이라니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습니다만, 수사 절차상 잠시 이쪽에서 맡아두어야 할 것 같은데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야 찾아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니.”

    두 남자의 대화는 그들이 사이에 둔 칼날처럼 서슬 퍼렇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전혀 죄송스럽지도 감사하지도 않은 게 틀림없는 말들이 빠르게 오간 끝에 밀리엄이 칼날을 도로 접었다.

    그가 굳이 ‘날이 제대로 서 있다’는 말을 한 이유야 뻔했다.

    한스 엘모어의 배에 다른 두 글자보다 깊이 새겨져 있던 O 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지.

    나는 밀리엄이 잭나이프를 집어넣은 뒤에도 두 사람 사이에서 떠나려 들지 않는 싸늘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슬금슬금 그들을 지나쳤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조금의 의문이 남은 상태였다.

    저 잭나이프가 중요한 단서라면 나에게 발견되었거나, 최소한 밀리엄이 발견한 뒤 내게도 만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잭나이프 자체보단 저것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방금 두 사람이 나눈 그 서늘한 대화가 더 중요한 것이었나?

    나는 방금 들은 대화에서 도출된 사용처 불명의 정보값들을 되새기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렇게 도달한 곳은 객실에 딸린 욕실 앞이었다.

    나는 닫혀 있는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나직한 한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밀리엄이 낸 소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벽은 하얗게 칠한 벽돌로 이루어진 욕실 안은 일견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다.

    변기가 하나. 세면대가 하나. 꽤 커다란 욕조가 하나.

    그러나 나는 내가 조금 전 들은, 아마도 라이오넬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숨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을 뻗어 모노클 아이콘을 눌러 곧장 눈가로 가져갔다.

    욕조 옆 벽의 아래쪽 한 부분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부분의 벽돌들을 고정시키고 있어야 할 회반죽이 다른 부분에 비해 묘하게 닳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벽돌 하나를 힘주어 밀어보았다. 그러자 힘을 준 부분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며 반대쪽이 바깥으로 툭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벽돌을 잡고 빼내자 벽 안쪽의 빈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빈 공간 안쪽으로 천천히 손을 밀어넣었다. 이윽고 더듬더듬 움직인 손끝에서 유리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는 손끝에 닿은 두 개의 매끄러운 물체를 동시에 붙잡아, 벽돌 모양으로 난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빼냈다.

    내 손에 들린 것은 수상쩍은 내용물이 반 정도 남은 채 찰랑이고 있는 두 개의 유리병이었다.

    [ ‘수면제가 든 병’을 획득했다. ]

    [ ‘독약이 든 병’을 획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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