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87화 (87/121)

87화. 검은 밤의 만찬회 (9)

수사국에서 실시된 부검 결과 다섯 명의 피해자는 전부 독극물을 마시고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올려진 식기나 음식 중에서는, 달걀용 작은 스푼에서 검출된 소량의 수면제를 제외하곤 그 어떤 독극물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요컨대 범인은 피해자들을 며칠간 그 괴이쩍은 상태로 방치한 뒤, 넬리 엘모어를 데리고 다시 스위트룸으로 돌아와 피해자들에게 독을 먹인 셈이었다.

그러나 스위트룸의 열쇠는 스티브 에버렛의 겉옷 주머니 안에서 발견되었다.

현장이 발견된 것은, 아무리 사전 지시가 있었다고는 해도 며칠씩이나 음식과 식기를 내려보낸다든지 새 음식을 올려보내라는 말이 없는 스위트룸의 상황에 의구심을 품은 지배인이 마스터키를 사용해 문을 열고 들어갔기 때문.

지배인을 제외하면 모든 방의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가진 사람은 죽은 스티브 에버렛과 그 자제들인 에버렛 삼남매뿐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잠긴 문을 언제든 열 수 있었다는 점 또한 에버렛 삼남매의 혐의가 더 짙어지는 사유로 작용했다는 모양이었다.

여기에 제임스 로웰의 새로운 가설이 하나 더해졌는데…….

‘한스 에버렛 씨의 다잉메시지가 O를 제외한 LE라면 말입니다. 그건 범인의 이니셜이 아닐까요?’

문제는 그 가설대로라면 에버렛 삼남매 모두가 한스 에버렛이 남긴 다잉메시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리디아 에버렛도 레너드 에버렛도 라이오넬 에버렛도 모두 이름의 머릿글자가 LE였으므로.

물론 레너드 에버렛은 범인이 O를 덧새겨 메시지의 주인공을 자신으로 특정하려 했으니 반대급부로 자신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그것조차 고도의 계산이 아니었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하겠느냐’는 밀리엄의 가설에 밀려 힘을 잃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선 잭슨 하디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젊은 남자’인 레너드 에버렛과 라이오넬 에버렛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판단, 그들이 쓰고 있는 방을 조사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짜고짜 방을 뒤지는 것에 대해서는 레너드와 라이오넬 모두 언짢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본인이 용의선상에서 다소 벗어나면서 어느 정도 협조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장녀의 호령에 두 동생은 이내 꼬리를 내려야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레너드 에버렛의 방이었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잔뜩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풍경이었다.

방 안은 이미 누군가 양껏 뒤져놓고 간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방주인이 원체 정리에 취약한 모양인가 싶어 레너드 쪽을 슬쩍 보았다가, 마치 아주 낯선 공간을 보듯 자기 방을 마주하고 있는 레너드 에버렛의 당혹감 가득한 시선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혹시 이 아수라장이 저 작자가 아닌 제삼자의 작품인 건가?

그러나 방이 잔뜩 어질러져 있다는 사실보다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어질러져 있음에도 막상 세간살이 자체는 영 부족한 축에 속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레너드의 방을 보며, 리디아 에버렛이 우리에게 내어준 방들이 지나치게 호화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너드가 십여 년 전부터 쓰고 있다는 방은 우리가 묵은 방과 똑같이 넓었지만 무언가가 많이 허전해 보였다.

가구라곤 침대와 옷장, 책상이 하나씩 놓인 게 전부였고 생활에 필요한 옷이며 물건들은 턱없이 부족했다.

십년 넘게 사람이 살고 있는 방인데, 심지어 옷장 문은 열려 있고 책상 서랍들은 다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상태인데도 발에 채이는 잡동사니 하나가 없었다.

요약하자면 생활감이란 게 전무했다.

오죽하면 밀리엄조차 조심스럽게 레너드를 향해 이렇게 말을 꺼낼 정도였다.

“저… 에버렛 씨. 혹시 없어진 물건들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보시는 게.”

그러나 레너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방 안을 쓱 훑더니 금방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질 물건은 없습니다.”

나는 그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없어질 물건이 없다’니. 그것은 ‘없어진 물건이 없다’는 말보다도 훨씬 단정적으로 들렸다.

처음부터 없어질 만한 물건이 놓여 있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무슨 방이 그렇담?

나는 영 미심쩍은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불을 지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빈 서랍만큼이나 허전했다.

굴러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모서리에서 멈춰 있는 만년필 한 자루와 정체불명의 작은 상자를 제외하면 종이 한 장, 책 한 권 놓여 있지 않았다.

상자를 집어든 나는 옷장 쪽으로 간 밀리엄과 바닥을 살피고 있는 제임스를 한번 보았다.

그들을 부를까 하다가, 방 입구에 기대어 선 채 아까 전과 비슷한 시선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레너드를 발견하고 이내 휙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니, 저 남자는 아까부터 사람을 왜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지? 누가 보면 관찰일지라도 쓰는 줄 알겠네…….

나는 내심 구시렁거리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은 마치 반지함처럼 달각 소리를 내며 위로 열렸다.

상자 안에는, 어느새 익숙해진 물건 하나가 들어 있었다.

메이슨 교단의 신도를 상징하는, 동그란 고리 모양의 금빛 브로치.

익숙해진 와중에도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던 터라 나는 반사적으로 황급히 뚜껑을 닫았다.

그러다 여전히 날 보고 있는 레너드 에버렛과 눈이 마주쳤다.

저 정도면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계속 피할 게 아니라 슬쩍 대화를 시도해보는 편이 좋을까?

아무튼 방에서 메이슨 교단의 브로치가 발견되었다는 건 저 작자도 누나나 동생과 마찬가지로 교단의 신도라는 뜻이니까, 잘하면 뭔가 얻어낼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결심한 나는 상자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레너드 에버렛이 서 있는 입구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였다.

방 안쪽의 밀리엄이나 제임스에게는 들리지 않을 듯한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우리는…… 정말 낙원에 갈 수 있는 겁니까?”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파르르 떨리고 있는 남자의 손이 보였다. 생각해보면 목소리에도 작은 떨림이 있었던 것 같다.

나름 오랜 고민 끝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꺼낸 듯한 느낌의 질문이었으나, 정작 질문을 받은 입장인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다짜고짜 한다는 질문이 ‘우리는 정말 낙원에 갈 수 있는 거냐’니.

이래서야 내가 언젠가 저 작자한테 우리는 낙원에 갈 수 있다고 말했던 사람 같잖아.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이 남자도 안다. 이 남자는 어제 분명 나에게 ‘처음 뵙겠습니다’하고 인사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뭐냔 말이다.

내가 기대한 건 메이슨 교단에 대한 지극히 실질적인 정보 마이닝이었는데, 저쪽에서 바라는 건 자기네 수상쩍은 종교의 교리에 대한 심층토크인 모양이고…….

나는 정말이지 무어라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질문을 받은 이상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은 좀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고민에 잠겼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낙원이니 천국이니 하는 사후세계 같은 건 믿지 않는다. 애당초 게임 속 세상에서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하물며 이 남자가 말하는 낙원이란 메이슨 교단에서 신도들에게 그들이 종말 이후 도달할 수 있는 곳인 양 약을 팔고 있는 그곳일 것이 아닌가.

정의롭고 다정한 사람이라면 여기선 ‘낙원이고 종말이고 다 헛소리니 미쳐 돌아가는 사이비 교단과는 얼른 연 끊고 광명 찾으쇼’라고 말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단 그렇게까지 솔선수범해 선량함을 베풀 수 있는 인간이 못 되는 데다 이 남자부터가 딱히 그런 배려를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결국 고민하던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대답을 건네기로 결심하고서 레너드 에버렛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최대한 무해해 보일 것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글쎄, 저야 모를 일이죠. 질문할 상대를 착각하신 것 같네요.”

……그게 제일 무난한 답이라고 생각했던 건 어쩌면 내 착각이었을까?

내 대답을 들은 레너드 에버렛은 이제까지 그가 지었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사납고, 조금은 비명을 지르고 싶어 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또 가만히 응시했다.

그 눈빛에 담긴 원망이 너무도 선명해서 조금은 겁이 날 정도였다.

아니, 누가 봐도 자기가 맥락 없이 괴상한 질문을 한 참인데 왜 나를 원망하지?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하지만 이상한 만큼 무섭다는 생각도 함께 들어서 문제였다.

그것은 이제라도 ‘아휴,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그럼요. 낙원! 당연히 갈 수 있고말고요!’ 하고 태세전환을 하는 편이 나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너드 에버렛은 별안간 휙 몸을 돌려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영 꺼림칙하게 바라보다가, 일순 몇 걸음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대여섯 걸음 정도 떨어진 복도 안쪽에서, 라이오넬 에버렛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이한 존재를 관찰하듯 하던 제 형과는 전혀 다른 눈빛.

독심술 같은 건 할 줄 모르지만,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듯한…… 그런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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