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검은 밤의 만찬회 (8)
스티브 에버렛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는 점에서는, 어제 본 바와 아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선지 어쩔 수 없이 에버렛 삼남매가 떠올랐다.
멜리사는 에버렛 삼남매 이외의 용의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영 미심쩍긴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들 셋일 터.
하지만 젊은 남자라고 했으니 리디아 에버렛은 제하는 게 좋겠지…….
잭슨 하디가 자리를 뜬 뒤에도 밀리엄과 제임스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 속에 갇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속마음만 복잡다단할 침묵을 이어나갔다.
어디 보자. 현장에서 발견한 단서 중에 아직 되새겨보지 않은 건 뭐가 있지?
답은 금세 나왔고, 나는 곧장 수첩 아이콘을 눌렀다.
그리고 손 안에 생성된 수첩의 빈 페이지를 펼쳤다. 오른손에는 어느새 연필이 쥐여진 채였다.
나는 빈 종이 위에 커다랗게 ‘037’이라는 숫자를 적었다. 한스 엘모어의 배에 새겨져 있던 것과 최대한 같은 형태로, 꾹꾹 눌러 진하게.
그런 다음 한껏 가늘어진 시야로 숫자를 계속해서 노려보았지만 이렇다 할 답이 도출되지는 않았다.
장소가 호텔이니만큼 처음엔 객실 번호인가 싶었지만, 조식을 먹으러 가기 전 프론트 데스크에 물어본 결과 번호가 0으로 시작하는 객실은 이 호텔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객실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시간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다 죽어가는 마당에 37도 아닌 037을 새겼다는 건 0에도 무언가 의미가 있다는 뜻.
단순히 서른일곱을 의미하는 다잉메시지는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이야 들지만 솔직히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말끔한 원을 그리고 있는 0과 달리 3과 7은 마치 디지털 숫자처럼 잔뜩 각진 채 삐뚤빼뚤 새겨져 있다는 것 정도고…….
아, 진짜 모르겠네!
조금 신경질이 난 나는 들고 있던 수첩을 허벅지 위에 툭 떨어트렸다.
수첩은 펼쳐진 상태 그대로 작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와인색 원단 위에 떨어졌다.
오른손에는 여전히 연필이 들린 채였으므로, 나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한껏 기댄 채 방만하기 이를 데 없는 자세로 종이의 여백 위에 수많은 037을 끄적여가기 시작했다.
선득한 깨달음이 찾아온 것은 열 번째 037을 적어낸 직후의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방만한 자세가 힌트가 되었다.
멍하니 열 번째 숫자를 적어낸 순간 나는 지금의 내 자세가 죽은 한스 엘모어의 자세와 조금 흡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반쯤 눕다시피 한 상태로 자기 배에 다잉메시지를 새겼다.
그리고 나는 그 메시지를, 그와 마주 보고 있는 상태에서 발견했지.
말인즉 죽어가던 한스 엘모어가 처음부터 발견하는 사람이 자기 시신과 마주 보고 있을 것을 염두에 넣고서 메시지를 새기는 배려를 보인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애당초 이 메시지를 보아야 할 올바른 방향은 이게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점에서 나는 번쩍 상체를 들어 올렸다. 옆에 앉아 있던 밀리엄이 놀란 모양인지 내 쪽으로 휙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지만 당장은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허리를 세운 나는 내려놓았던 수첩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허공에 든 채 거꾸로 돌렸다.
중앙에 크고 진하게 써둔 ‘037’이, 정확히는 그것을 뜻한다고 여겼던 메시지가 수첩과 함께 거꾸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음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LEO’
한스 엘모어의 시점에서 보였을… 그러니까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의 의도에 부합할 또 다른 글귀였다.
***
이 세계의 언어는 엄밀히 말해 영어가 아니지만, 참으로 편의적이게도 숫자 표기에는 아라비아 숫자를, 이름 같은 고유명사에는 알파벳을 사용한다.
“LEO라…….”
나는 나의 새로운 발견을 곧장 밀리엄과 제임스에게 공유했다.
두 남자는 작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내 발견의 유의미함을 인정해주었다.
때마침 우리가 앉아있던 로비의 소파 쪽을 찾아온 멜리사 또한 내가 아예 돌린 채로 내려놓은 수첩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아!’ 하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등 뒤에 동료 수사관들과 더불어, 한껏 불쾌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에버렛 삼남매를 대동한 상태라는 데 있었다.
멜리사는 자기 뒤에 그들이 서 있다는 것을 잊기라도 한 사람처럼 거침없이, 모두가 높은 확률로 떠올렸을 테지만 차마 입밖에 내놓고 있지 않았던 말을 곧장 입에 올렸다.
“‘LEO’면 레너드의 첫 세 글자가 아닌가요?”
서슴없이 가설을 제시하는 멜리사 위브의 뒤에는 이미 짜증이 머리 끝까지 뻗쳐 있는 듯한 레너드 에버렛이 있었다.
그는 멜리사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사나운 얼굴로 그녀에게 튀어나가려 들었다.
그런 레너드 에버렛을 옆에 서 있던 라이오넬 에버렛과 다른 수사관들이 가까스로 막아 세웠다.
그 광경을 본 밀리엄이 정말 못 살겠다는 듯 미간을 주무르며 앓는 소리를 낸 것은 덤이었다.
멜리사는 밀리엄의 반응을 본 뒤에야 무언가 잘못된 것을 눈치챈 건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가, 이내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등 뒤의 소란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뭐, 당사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꺼내기에 너무 직접적인 추측이었을 뿐 멜리사의 가설은 분명 그럴듯했다. LEO가 LEONARD의 첫 세 글자인 것은 사실이고, 증인은 다섯 번째 손님이 젊은 남자였다고 말했으며, 스티브 에버렛 슬하의 삼남매가 유력 용의자인 와중에 마침 그 중 한 명의 이름이 레너드인 상황 아닌가.
“그래서 뭐야,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게 당신네들 결론이다 이겁니까? 근거는 한스 씨가 남긴 뜻 모를 메시지고?”
“아, 아니요. 에버렛 씨. 진정하시고 부디 너무 불쾌해 마십시오. 위브 수사관은 그저 가능성을 제시한 것뿐입니다.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요.”
“여태까지 당신들이 멋대로 해댄 추측이라고 불쾌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들 하고 있는 겁니다.”
레너드 에버렛은 자기 양팔을 붙잡고 있는 동생과 수사관의 손을 냅다 뿌리치며 서늘하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는 한풀 꺾였지만 왠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 태도가 몹시 의문스럽고 아주 조금 불쾌했던 까닭에 나는 마주친 시선을 재빨리 거두어 들여 다른 쪽으로 옮겼다.
우선은 한숨을 푹 내쉬며 형에게 뿌리쳐진 손을 달랑달랑 흔드는 라이오넬 에버렛을 한 번 보았다가.
다짜고짜 첫째 동생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몰린 와중에도 그저 이 모든 상황이 끔찍하게 짜증 난다는 얼굴을 유지하며 팔짱을 끼고 있는 리디아 에버렛을 한번 보았다.
어쨌거나 두 사람 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레너드가 말한 ‘여태까지 당신들이 멋대로 해댄 추측’ 속에서는 그들 또한 최소 한 번 이상씩 범인 취급을 받았을 터였다.
왕립수사국 이 사람들……, 아무리 쇄신해서 재탄생했다지만 너무 겁이 없어진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 정도 호텔을 소유한 집안쯤 되면 분명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일 텐데 이렇게 막 쑤셔대도 괜찮나? 괜찮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나는 부디 이 위태위태한 공기가 더 큰 소란이나 분쟁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라며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
내내 잠자코 수첩을 내려다 보고 있던 제임스 로웰이 돌연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저, 그런데 이 글자들이 시신에 새겨져 있던 모양새 말입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았나요?”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제임스의 질문에 웬일로 밀리엄이 맞장구를 쳤다.
나는 두 남자가 어느 지점에서 의견일치를 보았는지 가늠하기 위해 재빨리 머리를 굴려 어제 보았던 시신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던 부분이라면,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건 하나 정도였다.
“혹시 그…… O 부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가 질문을 던지자, 밀리엄과 제임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한번 수첩 위의 글자들로 시선을 내렸다.
내가 적은 것이기 때문인지 저것만 봐서는 좀체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시신에 새겨진 모양새는 조금 이상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까 수첩을 뒤집기 전에도 잠시 생각했듯, 삐뚤빼뚤하고 중간중간 끊긴 부분이 보였던 L이나 E 부분과 달리 O는 아주 말끔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라고 여겼을 때까지는 제일 처음 새겼기 때문에 0이 가장 제대로 그려진 것이겠거니 하고 말았지만, LEO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나 E보다 늦게 새겨졌을 것이 분명한 O가 지나치게 말끔하고 반듯한 원을 이루고 있는 데다가…….
“……새기면서 손이 떨린 흔적 같은 것도 없었고, 흉터의 깊이가 다른 두 글자에 비해 유난히 깊었지요.”
그래, 셔츠에 묻어난 피도 그 부분이 가장 많았더랬지.
지금 생각해보면 한스 엘모어가 쓴 나이프는 스테이크용으로 사용되는 종류의 바짝 날이 선 나이프도 아니었다.
어제는 그냥 혼신의 힘을 다해 새겨서 깊이 들어간 모양이지 했으나, 이런 와중이라면…….
“엘모어 씨가 아닌 누군가가, 다른 날붙이를 이용해 O자를 덧붙여 새긴 걸 수도 있겠네요.”
“그 누군가는 높은 확률로 범인일 테고요.”
내 짐작을 들은 밀리엄이 짤막하게 덧붙였고, 이내 또 한번의 적막이 우리가 앉은 소파 주위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