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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80화 (80/121)
  • 80화. 검은 밤의 만찬회 (2)

    곧장 마차를 달려 도착한 이브리안 호텔 앞에는 왕립수사국 문양이 새겨진 마차 여러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한 대도 아니고 여러 대. 이번에도 무언가 큰 게 한 건 터졌구나 싶은 풍경이었다.

    다행히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인지 호텔 안에 들어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간 호텔 로비에서 우리는 반……갑다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낯익은 인물들과 만날 수 있었다.

    “엇, 선배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해리엇 블레어를 향해 무언가를 열심히 지시하고 있던 멜리사 위브가, 밀리엄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멜리사 위브의 지시를 수첩에 받아 적고 있던 해리엇 블레어의 시선도 덩달아 이쪽으로 향했다.

    나는 멜리사와 해리엇의 인사를 연달아 받으며 두 남자와 함께 그들에게 다가섰다.

    “우연히 소식을 듣고 왔다. 스위트룸에서 시신들이 발견됐다고?”

    “사건 소식을 들으셨다고 곧장 현장에 오시다니. 이제 정말 탐정이 되기로 하신 겁니까?”

    “따로 조사 중인 건과 연관된 듯해서 왔을 뿐이야.”

    “따로 조사 중인 건이 있으신 점부터 몹시 탐정답다고 생각합니다만…….”

    “내 전직여부가 그렇게 궁금한가?”

    “앗, 그보다는 여기 오신 게 성 조나단 병원 사건에 연루되셨던 것과 같은 맥락인지가 조금 더 궁금한데요.”

    결코 좋은 경험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래도 한차례 큰 고생을 하고 난 덕인지, 멜리사는 전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나름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할 수 있게 된 것부터가 특히 그랬다.

    멜리사의 질문에 조금 당황한 듯 멈칫했다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실소를 터뜨린 밀리엄은 이내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멜리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마주 주억였다.

    그러고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럼 이번에는 제 선에서 정식으로 수사 협조 요청을 드리겠습니다.”

    “……뭐?”

    곧장 되물은 것을 보면 밀리엄에게도 뜻밖이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말이야 수사 협조 요청이라지만, 실질적으론 우리와 수사정보를 공유하고 우리가 따로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것을 용인해주겠다는 뜻 아닌가.

    당혹감이 가득 담긴 밀리엄의 되물음에 멜리사가 빙긋 웃으며 조금 목소리를 낮춘 채 다시금 말을 꺼냈다.

    “잘은 모르겠지만, 세 분이서 무언가 중요한 사건을 조사 중이신 거지요?”

    “그건…….”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선배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분명 꼭 필요하고 올바른 일일 거라는 믿음도 있고요.”

    “멜리사.”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실 필요는 없으니까, 최대한 협조라도 해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진짜 마구 부려먹으셔도 괜찮아요.”

    멜리사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밀리엄은 그런 멜리사를 향해 더 말을 잇는 대신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입장에서야 거부할 이유가 없고, 딱히 이해하지 못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존경하는 선배라는 이유로 가뜩이나 밀리엄에게 호의적이었던 멜리사다.

    본래도 그랬는데, 심지어 이제 그녀는 왕립수사국 사건으로 밀리엄과 베로니카에게 구명까지 받은 입장이 아닌가.

    본인의 능력이 닿는 선에서 전폭적으로 조력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대도 이상할 건 없지.

    밀리엄은 자길 돕겠다며 수사관의 직권을 남용하려 하는 후배에게 일종의 뼈아픈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모양새지만.

    어쨌든 안 그래도 수사국 내부의 조력자 포지션이었던 멜리사 위브가 더 적극적으로 협력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마구 부려먹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 고맙다.”

    나는 결국 갸륵한 후배의 마음씀씀이에 항복을 선언하는 밀리엄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거기에 더해 멜리사는 ‘담당수사관이 저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엔 다른 수사관들도 선배님께 충분히 협조적일 것’이라며, 지난 사건의 후일담을 전해주었다.

    사실 그 부분은 나도 조금 궁금했던 터라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되었는데, 사건 이후로 다행히 수사국에 한바탕 혁신의 칼바람이 불기는 한 모양이었다.

    랄프 드레이크가 떨어져나가면서 그쪽 파벌에 붙었던 수사관들은 전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고, 일라나 데이가 수사국장 자리에 올랐으며, 그 덕에 이제 좀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나.

    수사관 시절 밀리엄이 일라나 데이의 파벌에 속했으리라는 것은 지난번 그녀가 구세주처럼 등장해 사건종결을 막아주었을 때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다.

    밀리엄이 호의적으로 따랐던 상사라면 분명 직업의식을 제대로 갖춘 양심적인 인물일 터.

    물론 나는 수사국 내부의 알력다툼이나 파벌에 전혀 무지했고 당연히 멜리사가 줄줄 늘어놓는 다른 이름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멜리사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밀리엄이 잘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므로, 최소한 나를 기함케 했던 그 막장조직 신세에선 벗어났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확신과 함께,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앤서니 롭이 떠올랐다.

    진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것을 난도질하고 생매장해온 거짓의 사도들에게 합당한 심판을 내릴 수 있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던 남자.

    결과적으로 그의 범행이 왕립수사국 내의 적폐세력을 몰아내는 계기가 되기는 한 셈이라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잠시간 착잡해졌다.

    그러나 그 착잡함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혹자는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결국 앤서니 롭이 옳았던 게 아니냐고, 그야말로 진정 정의로웠고 이 모든 게 그의 공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쎄.

    인간은 수십 번의 계기와 수백 번의 기회와 수천 개의 선택지가 주어져도 끊임없이 엇나가고 부패하고 타락하기만을 반복할 수 있는 존재다.

    앤서니 롭의 범행이 계기가 되었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계속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더한 부패의 길로 빠질 수 있었음에도, 그 계기를 붙잡고 현재를 쇄신해나가기로 한 것은 결국 왕립수사국에 남은 사람들이 아닌가?

    물론 세상에는 널리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한 계기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만, 사람을 죽게 해놓고 심판이니 어쩌니 개똥철학이나 늘어놓는 인간이 그 반열에 오를 만하다고 말하는 건 미친 소리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 앤서니 롭을 떠올리며 찜찜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신 차리자!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딘지 전제가 어긋난 듯한 기분이었다.

    왕립수사국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엘모어 보육원 출신의 입양아이며 ‘두 번째 기사’인 앤서니 롭에게 메이슨 교단에서 부여한 사명이 아니었나?

    그런 범행이 어떻게 앤서니 롭 개인의 동기와 공존할 수 있지?

    지금 생각해보면, 수잔 로이드가 동기에 대해 입을 다문 것도 그렇다.

    어제까지는 그냥 애초부터 교단의 사주를 받은 범행이었기 때문에 동기가 본인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거라면 저보다 윌 그렉슨 씨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랍니다.’

    그저 위에서 시킨 일을 행했을 뿐이라면 그 말은 뭐였던 거지?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 순간의 그녀에게선 분명 윌 그렉슨을 향한 서늘한 분노 같은 것이 느껴졌더랬다.

    뭔가 이상하다.

    가설을 세우는 데 필요한 조각이 부족한 게 아니라, 중요한 조각 하나가 제법 오래전부터 내 손에 들려 있었는데도 그걸 깜빡하고 끼워넣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가만 있자. 생각해보니 이것 봐라?

    애당초 기사들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어제 우리가 세운 가설대로라면, 그것은 예언서에 적힌 네 개의 사건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고 가정했을 때, 수잔 로이드와 앤서니 롭은 정말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기사였나?

    ……아니었잖아!

    성 조나단 병원 사건은 예언서에 적힌 피해자 수를 맞추지 못했고, 왕립수사국 사건은 애초에 다른 곳에서 일어나도록 계획된 사건이었다.

    심지어 오늘도 그렇다.

    예언의 내용을 연상케 하는 사건은 예언서에 언급된 셀덤 호텔이 아니라 이곳, 이브리안 호텔에서 발생했다.

    더군다나 첫 번째 사건에서는 교단의 신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윌 그렉슨이, 두 번째 사건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교단의 신자였던 테오도어 와이엇이 죽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지금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건 교리를 저버리고 사욕을 좇는 배교자들이 아닙니다.’

    종말의 징조로서 안배된 네 개의 사건이, 실상은 교주의 통제를 벗어난 채 교단의 계획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실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인가?

    “잠깐, 다시 말해봐. 누가 죽었다고?”

    갑작스레 떠오른 가설에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던 상념을 끊은 것은 밀리엄의 목소리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멜리사를 바라보고 있는 밀리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저쪽에서는 시신들의 신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이다.

    중요한 진행을 놓칠 뻔했네. 그런데 누구의 이름을 들었기에 저러지?

    내 가설만큼이나 밀리엄의 질문 또한 갑작스럽기는 매한가지였는지, 놀란 얼굴을 한 멜리사가 자기 손에 들린 수첩과 밀리엄을 번갈아 보며 ‘어어…….’ 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그 상태로 잠시간 눈을 깜빡이다가, 아마도 죽은 이들의 이름을 적어둔 듯한 수첩 위로 다시 시선을 내리고서 입을 열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어……. 스티브 에버렛, 루신다 헤일, 베네딕트 홀터스, 그리고 한스 엘모어와 넬리 엘모어 부부요.”

    이번에는 내가 다시 묻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니,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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