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검은 밤의 만찬회 (1)
자꾸만 게임의 장르를 바꿔버리려 드는 밀리엄의 태도는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나는 무사히 켄트우드 저택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지친 것 같으니 일단 쉬고 내일 이야기하자는 밀리엄과 그에게 동조하는 제임스를 붙들어 앉혀놓고서 내가 겪은 이야기를 열심히 공유했다.
물론 당초 계획했듯이, 모든 것을 전부 털어놓지는 않았다.
우연히 아리아 오큘러스를 만난 일. 무언가 캐낼 기회라 여겨 그녀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간 일.
그랬다가 탑에 갇혀버렸고, 지하의 동굴을 헤매다가 메이슨 교단의 대기도 현장과 예언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맞닥뜨린 일.
그리고 예언서에 적혀 있던,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내용…….
내가 밀리엄과 제임스에게 공유한 정보는 그 정도였다.
레나 엘모어가 딸에게 남긴 쪽지라든지, 베로니카에 대한 교주의 태도라든지 하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 부분을 숨기는 일이 확실히 옳다는 판단은 여전히 서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인 지금으로선 숨기지 않았다가 발생할지 모르는 이런저런 문제들과 직면하는 일이 몹시도 버겁게 느껴졌으므로.
어쨌든 간에.
내가 줄줄 늘어놓은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밀리엄이 그 다음으로 한 일은, 금고에 넣어둔 예언서를 꺼내오는 것이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예언서의 한 부분을 펼쳤다. 찢어져 나간 장의 바로 앞 페이지였다.
그곳에는 두 개의 예언이 적혀 있었다. 종이에 가득한 여백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 순간 나는 성 조나단 병원 사건과 왕립수사국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예언이 적혀 있던 그 앞 페이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 페이지에 적힌 예언도 두 개뿐이었더랬다.
그 앞까지의 다른 페이지들이 온갖 불길한 예언들로 가득 차 있던 것과 다르게 말이다.
곧이어 떠오른 것은 마지막 예언의 첫 문구였다.
‘네 명의 기사가 사명을 다한 1899년의 마지막 밤.’
어쩌면 찢어진 장 앞의 네 사건은 다른 사건들에 비해 조금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그 네 번의 사건이 바로 예언에 언급된 ‘네 명의 기사’가 다해야 할 사명일지 모른다는 추측이었다.
첫 번째 기사가 수잔 로이드였고, 두 번째 기사가 앤서니 롭이었던 거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두 개의 페이지와 그 앞페이지들을 번갈아 비교해보던 제임스는 아무래도 최후의 네 사건이 무언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밀리엄은 문제의 사건이 네 개인 것과, 마지막 예언 속의 기사가 네 명인 것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밀리엄과 제임스가 둘 다 의문을 표한 부분은 ‘기사’라는 표현이었다.
‘굳이 그런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밀리엄이 중얼거리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 또한 그 추측에 동의했다.
다만 나에게는 밀리엄이나 제임스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가설이 하나 존재했다.
때가 이른 것 같다거나 그들의 반응을 종잡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납득시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가설이었다.
어쩌면 ‘네 명의 기사’라는 표현은, 이 세계관 내에서가 아니라 게임 외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작진이 모티브를 얻은 어떤 소재의 흔적이거나, 혹은 거기서 모티브를 얻었노라고 플레이어에게 시사하기 위해 들어간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네 명의 기사가 사명을 마친 뒤 이어지는 것이 하필이면 세상의 종말이지 않나.
처음엔 나도 긴가민가했지만, 생각할수록 그럴 듯한 추측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블루 달리아>의 제작진이 종말론이라는 소재를 채택하며 요한묵시록에서 모티브를 얻어온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었다.
말하자면 예언에 언급된 ‘네 명의 기사’는 재앙을 일으키며 세상의 멸망을 이끈다는 묵시록의 4기사인 거지…….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지식에 기반해 제작진이 차용한 소재를 추측한 것.
게임 속의 캐릭터인 밀리엄과 제임스를 납득시킬 수는 없을 터였으므로,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대화의 주제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세 번째 사건으로 넘어간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그리하여 바로 다음날인 오늘. 12월 8일.
안 하던 무리를 해버린 팔다리에게 제대로 된 휴식을 선사할 새도 없이 나는 새로운 외출을 감행해야 했다.
다행히 운동이 필요한 외출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최근 누리고 있는 사치스러운 생활의 연장선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제처럼, 무슨 상황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곳으로의 외출이라는 사실 자체로 피로가 몰려와서 그렇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눈앞의 테이블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하얀 접시 위에 올라있는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와 고급스럽게 장식된 가니쉬. 오른손을 조금만 뻗으면 닿을 곳에 놓인 와인.
“베로니카. 불안한 마음은 알겠지만 먹어야 힘이 나죠.”
“맞습니다, 남작님. 앞선 코스도 드시는 둥 마는 둥 하시지 않았습니까?”
한 테이블에 함께 둘러앉은 두 남자의 잔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머, 먹을 거예요. 방금은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아이고, 맛있겠다. 하하.”
밀리엄과 제임스의 염려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는 상황은 정말이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으므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식기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포크와 나이프를 스테이크 위에 가져다 대고 보니 조금 억울해지기도 했다.
아니, 내가 그렇게 깨작거렸나? 내 딴엔 열심히 먹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입맛이 좀 없긴 하지만.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식사에 충실할 수 있는 쪽이 비정상 아닌가?
나는 밀리엄과 제임스의 태도보다는 내 태도가 훨씬 일반인의 그것에 가까우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추측대로라면 필시 세 번째 사건으로 이어질 예언에 언급된 날짜와 장소는 12월 8일 셀덤 호텔이었다.
12월 8일 저녁 셀덤 호텔에서 다섯 명의 탐욕스러운 불신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가지게 되리라는… 반쯤 구체적이고 반쯤 추상적인 예언이었지.
어쨌든 그리하여 나는 현재, 당장 다음 순간에라도 사람들이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레스토랑에서 호화로운 저녁식사를 이어가고 있는 참이다.
물론 여태까지의 사건들이 예언서의 내용과 조금씩 어긋나는 형태로 이어져 왔다는 점이나, 예언 자체의 추상적인 표현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질 가능성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 정도 오차는 감수해야겠지…….
스테이크 위로 영혼 없는 칼질을 하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최고급 호텔의 레스토랑답게 식기도 어지간히 좋은 것을 쓰는 모양인지, 깔끔하게 잘린 절단면에서 핏기가 적당히 비쳤다.
나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고깃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가로 가져갔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점점 가까워졌지만, 놀라울 정도로 입맛이 없었다.
옆테이블에서, 혹은 저 앞테이블에서 누군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광경이 자꾸만 머릿속을 장악했다.
정말이지 시시각각 비위가 상하는데. 내가 이걸 진짜 먹어야 하나……? 사람이 한 끼쯤 굶거나 대충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밀리엄과 제임스는 누가 K-게임의 등장인물들 아니랄까봐 아까부터 집요하게 내 식사 성실도에 집착했다.
특히 밀리엄은 조금만 더 깨작거렸다간 아예 직접 썰어 먹여줄 태세로 나를 보고 있었다.
탁 트인 공공장소에서 그런 장면만은 죽어도 연출하고 싶지 않아, 결국 눈물을 머금고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다 생기는지…….”
막 레스토랑으로 들어선 중년의 귀부인 하나가 겉옷을 직원에게 맡기며 일행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끔찍한 일’이라는 말에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나는 여전히 스테이크 조각이 꽂혀 있는 포크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귀부인과 그 일행으로 보이는 신사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심지어 발견된 시신이 다섯 구나 된다질 않습니까.”
“요새 유독 흉흉한 일이 많이 터지는 기분이에요. 왕립수사국도 모자라 이젠 이브리안 호텔까지… 정말이지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없네요.”
다섯 구의 시신, 그리고 호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표현에 입구를 등지고 앉아있던 제임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맞은편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맞은편을 보니 발 빠르게도 자리에서 일어나 귀부인과 신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밀리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서 레스토랑 입구까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밀리엄은 단번에 그들이 선 곳까지 도착했다.
이윽고 이어진 대화는 조금 전에도 그러했듯 고스란히 이쪽까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숙녀분, 그리고 신사분. 갑작스러우실 줄 알지만 결례를 무릅쓰고 여쭙고 싶은데, 혹시 이블리안 호텔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밀리엄의 정중한, 그러나 확실히 갑작스럽기는 한 질문에 두 사람은 잠시간 눈을 깜빡이며 ‘어…….’ 하고 말을 끌었다.
그러다가, 귀부인 쪽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왜 남의 대화에 끼어들고 난리냐고 무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고맙게도 그녀는 밀리엄의 진지한 표정에서 무언가 느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조금 전에 우연히 들은 이야기인데, 이블리안 호텔 스위트룸에서 시신이 여러 구 발견되었다고 해요. 듣기로는 현장이 꼭 만찬장처럼 꾸며져 있었다고……."
만찬장.
그 단어를 들은 순간, 나와 제임스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