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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78화 (78/121)
  • 78화. 종말론자들 (5)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바닥에 떨어져있는 것은 검은 만년필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랬다.

    굳이 사족을 덧붙인 이유는 모양이 조금 특이한 탓이었다.

    냉큼 집어든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내가 아는 다른 만년필보다 길었으며, 펜촉 반대 부분이 묘하게 두꺼웠다.

    [ ‘교주의 만년필’을 획득했다. ]

    언젠가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이긴 하다는 일종의 장담 같은 시스템 문구가 떠올랐다.

    그걸 확인한 내가 만년필을 레나 엘모어의 천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주머니 입구를 꽉 조인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남의 긴밀한 대화를 엿듣는 악취미를 가진 인간이 나말고 또 있을 줄은 몰랐는데.”

    별안간 등 뒤에서 들려온 굵고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가까스로 돌려 뒤를 보았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 사람을 기절시킬 뻔한 남자는 키가 아주 컸다.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우락부락하진 않지만 호리호리하지도 않은, 어쨌든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엔 충분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여기 서 있던 리디아라는 여자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진한 금발머리는 야성적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눈은 흐릿한 회색인데도 왠지 모르게 맹수의 시선을 연상케 했다.

    하여간 상황으로 보나 외관으로 보나 위협적인 남자였다.

    나는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시야의 우측 하단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회중시계 아이콘을 슬쩍 보았다.

    마지막 세이브 지점이 언제였더라?

    갑자기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여차하면 바로 시계를 소환해서 태엽을 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 엿듣다뇨. 전 그냥 이 근처에 떨어트린 물건을 주우러 온 건데요…….”

    “아, 방금 주워서 주머니에 챙겨넣은 그거 말입니까? 그런 거라면 납득은 가지만 그거야 본인 사정이지. 어쨌든 엿들은 건 사실일 텐데요.”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니……”

    “그렇습니까? 난 또 내 동지이신가 했지.”

    “그게 무,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듣고 싶어서 들은 거거든.”

    그러니 본의야 어찌 되었건 지금은 그냥 공범인 셈 칩시다.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피식 웃었다.

    사이비 소굴 한복판에서 마주하기에도 지나치게 악당 같은 웃음이라 소름이 오소소 끼쳤다.

    그래도 공범인 셈 치자는 걸 보면 입막음이나 뭐 그런 것을 위해 날 어찌하려는 심산은 아닌 듯 보였다.

    “아무튼, 캠벨 남작님.”

    “제, 제가 누군지 알고 계셨나요?”

    “워낙에 유명인사셔서.”

    유명인사라는 건 바깥에서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교단 내부에서를 말하는 걸까.

    이 와중에도 눈치 없이 고개를 들이미는 궁금증과 도무지 안정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지금 상황에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뭔가 챙기긴 잔뜩 챙겼으니 이제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눈앞에는 어째 존재만으로 위협적인 낯선 남자가 공범 운운하며 서 있고, 이 남자를 제친다 해도 나는 당장 어느 길로 나가야 할지조차 모르…….

    “참,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저쪽입니다.”

    ……네?

    남자가 뜬금없이 갈래길 중 하나를 가리키며 꺼낸 말에 당황한 나는 할 말도,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도 잃은 채 눈만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보니 길을 못 찾아서 헤매고 있는 것 같던데. 아닙니까?”

    “마, 맞아요. 여기에 온 건 오늘이 처음이라서…….”

    너무 긴장한 탓인지, 저쪽에서 묻지도 않았고 나도 가급적이면 숨기려고 했던 말이 거의 자동으로 술술 흘러나갔다.

    내 말을 들은 남자가 다시 종전의 악당 같은 미소를 짓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받았다.

    “초행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은 구조긴 하지……. 아무튼 저 길을 쭉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어, 가, 감사합니다…….”

    “혹시 일어나는 데에도 내 도움이 필요합니까?”

    길을 알려줬는데도 여전히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날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번뜩 정신을 차린 나는 아니라고 외치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까지의 갑작스러운 운동 탓인지 긴장감 탓인지 관절이 비명을 지르기는 했지만.

    “그럼 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누구 덕분에 즐거운 취미활동에 지장이 생겨서.”

    괜히 돌멩이를 건드려 교주와 여자의 대화를 조기종료시킨 내게 눈치를 주려는 목적이 분명한 대사였다.

    떳떳치 못한 짓을 하고 있었던 건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 잘도 저런 소리를 하네 싶었으나 차마 이의를 제기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스운 점은 ‘나가는 길이 저쪽’이라는 남자의 말을 믿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다는 데 있었다.

    나는 미련없이 등을 돌려 다른 길을 통해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남자가 가리켰던 길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

    쭉 따라가면 될 거라던 말마따나, 남자가 알려준 길은 갈림길 따위 없이 하나로 쭉 이어진 오르막길이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걷는 오르막길이라 정말이지 욕이 나올 정도로 힘들긴 했지만…….

    내 몸뚱아리의 비명이야 어쨌든 간에, 결과적으로 남자의 말은 진실이었다.

    한참을 헉헉거리며 걸어 올라간 끝에 나는 기어코 바깥공기를 들이마시는 데 성공했다.

    동굴을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버린 뒤였고, 나는 어두컴컴한 숲속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처음엔 난감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오밤중의 숲속에 혼자 서 있는 꼴이라니.

    지하미궁 다음엔 산중조난이냐 싶어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러나 그런 낭패감은 주변을 열심히 살펴본 결과 빠르게 종식되었다.

    먼발치에서 불빛을 발견한 덕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건물에 고정된 불빛인 것 같았다.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나 지금껏 걸어온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애석하게도 달릴 힘은 없었으므로, 나는 힘을 바짝 내어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하여 완전히 가까워진 불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엘모어 보육원 건물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빛이었다.

    그렇게 해질 무렵부터 지금까지 팔자에도 없는 개고생을 한 구둣발이 마침내 평평한 땅을 밟았을 때,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건물 앞에서 이쪽을 향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누군가의 인영과 뜀박질 소리 때문이었다.

    인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리는 일은, 나 자신조차 깜짝 놀랄 만큼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익히 아는 인물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안도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대로 조금 더 기다리자, 예상대로 희미한 불빛 아래 밀리엄의 얼굴이 드러났다.

    예상치 못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밀리엄은 나를 발견하고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내 얼굴을 충분히 확인했을 법한 거리에 들어선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그러고는, 저 멀리서 달려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그러기로 작정했던 사람처럼 곧장 나를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부지불식간에 내 뒷통수를 감싸쥐고 너른 가슴팍 안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반대쪽 팔이 내 어깨를 꽉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를 당황케 한 것은 느닷없이 목 옆에서 느껴지는 가쁘고 뜨거운 숨결이었다.

    “베로니카…….”

    날 자기 품에 완전히 가둬버린 밀리엄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떨리는, 아니 어쩌면 이미 물기에 젖은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조금의 버둥거림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품 속에서 바르작거리며 그를 불렀다.

    “미, 밀리엄.”

    “걱정했잖아요. 대체,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겁니까.”

    밀리엄을 만나면 안심이 될 줄 알았는데, 분위기로 보아 어째 내가 이쪽을 안심시켜야 할 상황인 것 같았다.

    나는 밀리엄이 제 가슴팍에 박아둔 얼굴을 가까스로 들어 올려 그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뒤늦게 달려와서는 차마 다가오지 못하겠다고 판단했는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나와 밀리엄을 바라보고 있는 제임스와 루크 엘모어가 보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해 보인 뒤 밀리엄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은데…… 일단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이것만큼은 정말로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지만, 걱정 끼친 것도요.”

    “……다친 곳은 없어요?”

    “없어요. 좀 힘들긴 한데 이건 그냥 내가 운동부족이라서 그래요.”

    “그럼 됐습니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내 어깨 위로 이마를 툭 떨어트린 밀리엄이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아, 무사히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그 순간에야 들었다.

    돌아오다니, 이보다 우스운 표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곳은 현실의 내 방이 절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게임 속에 갇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내가 어딘가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건 마땅히 현실의 그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내 방도 아니고, 백번 양보해 베로니카의 집도 아니고, 하물며 켄트우드 저택도 아닌 곳에서, 심지어 밀리엄의 품에 안겨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한편으로…….

    우습게도 정말로, 부정할 도리 없이 안심이 됐다.

    이래선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갖기엔 너무 지쳐버린 모양이라는 비겁한 자기변명은 덤이었다.

    뜨거운 온기가 두터운 옷 너머로도 느껴지는 너른 품 속에서 나는 아주 잠시간 조금 분별력 없는 인간이 되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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