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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75화 (75/121)
  • 75화. 종말론자들 (2)

    우스운 일이지만 그제야 나는 내가 칼에 찔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힘을 잃고 허물어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아예 몸을 돌려 문 안쪽으로 사라져버리는 이바나 엘모어의 뒷모습을 보며 불규칙한 숨을 내쉬었다.

    아프다. 정말이지 더럽게 아프다.

    온몸의 감각이 잠시만 끊어졌으면 싶을 만큼 아파서 머릿속까지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다.

    어떻게 하지?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진짜 죽도록 아픈데…….

    그런 의미 없는 생각만 반복하다가 정신을 잃기 전에 회중시계의 존재를 떠올린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상처를 붙잡지 않은 손을 가까스로 들어 올려 회중시계 아이콘을 눌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 피로 흥건히 젖은 손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봤다간 아이템을 사용하기도 전에 까무러칠지 모른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윽고 아이콘을 눌렀던 손에 묵직한 시계의 감촉이 느껴졌다.

    자, 이제 태엽을 돌려야 하니까…… 젠장, 어차피 이쪽 손도 필요했군.

    나는 상처를 꾹 누르고 있던 손을 덜덜 떨며 태엽 쪽으로 가져갔다.

    흥건히 젖은 손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손의 압력이 사라지자 복부의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절로 이가 악물렸다.

    시시각각 정신이 혼미해지고, 당장이라도 의식이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몇 번의 헛손질이 이어졌지만, 나는 마침내 피 묻은 손가락으로 태엽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심호흡을 하거나 정신을 가다듬을 새 따위는 이번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꾹 움켜쥔 태엽을 안간힘을 다해 한 바퀴 돌렸다.

    이윽고 조금 전의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하듯, 먹먹한 감각의 단절이 캄캄한 어둠과 함께 찾아왔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라고 하니까 몇 시간은 족히 흐른 기분이지만 사실은 정확히 얼마간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거슬러 돌아와 눈을 떴을 때.

    나는 당연하게도 첫 번째로 마주했던 갈림길 앞에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손이 칼에 찔렸던 복부를 매만졌다.

    손도 옷도, 젖거나 찢어진 구석 없이 말끔했다.

    당장이라도 날 요단강 너머로 던져버릴 것 같았던 복부의 통증은 온데간데없었다.

    남은 것은 그저 ‘칼에 찔렸었다’는 기억에서 오는 오싹함뿐이었다.

    그 와중에 날 찌른 이가 이제 겨우 열너댓 살쯤 되었을까 싶은 어린애였다는 사실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함을 배가시켰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온몸을 감싸오는 오싹함 속에서 나는 뒤늦은, 혹은 조금 이른 의문을 제기했다.

    이바나 엘모어는 대관절 무엇 때문에 나를 찔렀는가?

    낯선 사람이라 겁을 먹어서였을 리는 없다. 그 애는 내게 달려들기 전에 분명히 나를 향해 ‘남작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니까.

    처음부터 날 찌를 요량이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나를 발견하고 찌르기까지의 시간이 애매하게 길었으므로.

    찬찬히 생각해보자. 이바나가 지키고 있는 듯 보였던 그 문은 아마도 이 미궁에서 빠져나가는 출구거나 최소한 그 관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바나 엘모어의 공격은 말하자면 그곳을 지나가기 위해 거쳐야 할 트랩인 거지.

    그렇다고 한다면, 이바나에게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아직도 약간 가쁜 듯한 숨을 진정시키며 조금 전의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되새겨보기 위해 노력했다.

    나를 발견하고, ‘남작님’이라고 부르고 난 뒤, 내가 그 애를 이곳에서 만났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동안 이바나가 무언가 특징적인 행동을 한 것이 있었던가?

    ……가만 있자. 그러고 보니.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왼쪽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당장 떠오르는 이바나의 행동 중 그나마 특징적이었던 건 내 왼쪽 가슴께를 한참 들여다본 것 정도다.

    하지만 아이의 행동을 떠올리고 내려다본 가슴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무늬라곤 없는 진한 장밋빛 원단이 몸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괜히 왼쪽 가슴 부근을 더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바나는 왜 하필이면 여길 봤을까. 꼭 뭔가를 찾는 듯한 시선이었는데…….

    아. 그래, 그 시선.

    어쩌면…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이바나 엘모어의 상식상 여기에 자리하고 있어야 할 물건이 있었던 거야.

    그런데 내게는 그게 없었고, 정확히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물건의 부재 때문에 이바나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나를 찌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왼쪽 가슴께에 위치하고 있었어야 할 문제의 물건으로 가장 적당한 것은…….

    나는 곧장 레나 엘모어의 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원하는 물건이 손에 닿기까지는 아주 잠깐이었다.

    이윽고 주머니에서 꺼내진 손 안에는 아까 탑 중앙의 바닥에서 주웠던 메이슨 교단의 브로치가 놓여 있었다.

    나는 손을 한번 쥐었다 편 뒤 브로치를 잠시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우리가 탑 위에 올라가던 중 아리아 오큘러스가 바닥 쪽으로 떨어트려 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

    이바나 엘모어가 지키고 있는 문을 넘기 위해 필요한 물건.

    아리아 오큘러스가 내게 말한 ‘기회’란 어쩌면 이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런 거라면 그 문 너머에 있는 것은 바깥세상이 아니라, 메이슨 교단의 비밀이 감춰진 더 깊숙한 심연일 것이다.

    나는 괜히 어깨를 타고 오르는 긴장감을 애써 외면하며 손 안의 브로치를 왼쪽 가슴에 달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미궁을 답파하여 이바나 엘모어가 지키고 있을 문에 도달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나는 시간을 되돌리기 전 내가 골랐던 길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한참을 헤매기는 했지만, 어쨌든 다행히 문제의 나무 문이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데는 성공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이바나를 발견하자 절로 몸이 굳었다.

    오후에 보육원 문을 열어줄 때까지만 해도 한없이 선량하고 무해해 보이기만 했던 아이가 이제는 미지의 위험요소로 인식된다는 점이 기가 막혔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바나와 눈이 마주치기까지는 금세였다.

    “캠벨 남작님?”

    이바나가 아까와 같은 말을 꺼내며, 아까 그랬듯 내 왼쪽 가슴께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그 시선을 받아냈다. 금방이라도 다시 이바나가 내게 달려들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내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확인한 이바나는 내게 달려드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문 안쪽으로 손짓을 했다.

    역시 브로치가 없는 게 문제였군.

    등 뒤에 감춰진 반대쪽 손에 칼이 들려 있다는 걸 아는 입장에서 완전히 안심이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 속에서 나는 천천히 이바나를 지나쳐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남작님.”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이바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뭐지? 또 뭔가 잘못됐나? 하지만 이것 말고는 달리 단서랄 게…….

    “대기도에 참석하시는 건 처음이신가요?”

    이어진 이바나의 음성은 한없이 호의적이고 친절했다.

    나는 순간 대기도가 뭐냐고 되물으려던 멍청한 혓바닥을 꾹 짓씹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으, 응…….”

    “그럼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아이가 빙긋 웃으며 문 안쪽으로 조르르 달려 들어와 내 앞에 섰다.

    그 모습이 내게 달려들던 모습과 겹쳐지는 바람에 나는 잠시 움찔해야 했다.

    하지만 이바나는 아까와 다르게 정말이지 순수한 호의만으로 가득해 보였고, 나는 그런 이바나를 보며 혼란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이바나가 두어 발자국 앞서서 걸으며 나를 어딘가로 안내하는 동안, 나는 열심히 고개와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문 안쪽은 횃불들이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바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어쩐지 폭이 더 넓고 천장이 더 높아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가장 큰 차이는 인기척이 느껴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데 있었다.

    옅은 기척에 나지막한 목소리들이었지만 분명히 전해졌다.

    이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남작님, 서두르시지 않으면 대기도가 시작될지도 몰라요.”

    이바나의 재촉에 걸음을 빠르게 하며 얼마간 더 움직이니 어느 순간부터는 기척이나 목소리가 아니라 진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들도 있었고, 당당히 얼굴을 드러낸 사람들도 있었다.

    복장도 각양각색이었다. 누군가는 아주 말끔한 차림인 반면 누군가는 다소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기도 했다.

    다만 그들 모두가 왼쪽 가슴에 금빛 브로치를 달고 있었고, 다들 아주 서둘러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다른 분들을 따라가시면 될 거예요, 남작님. 저는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되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적당히 많아졌을 즈음 이바나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며 나는 우습게도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장 다시 걸음을 옮겨 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 틈엔가 긴 행렬을 이루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렇게 그들을 따라 얼마간을 더 걸었을까.

    마침내 나는 이제껏 지나온 어떤 지점보다도 폭이 넓고 천장이 높으며 수많은 불빛들이 빛나고 있는 거대한 석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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