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종말론자들 (1)
굳게 닫혀 꿈쩍도 하지 않는 철문 앞에 망연히 선 채로 한참.
이대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생각이 뇌리를 관통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단 당장의 상황을 침착하게 파악하기로 했다.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나는 갇혔다.
아리아 오큘러스가 ‘짜잔! 사실은 장난이었답니다!’ 하고 저 철문을 열어줄 만한 캐릭터도 아니거니와.
애당초 그럴 작정이었다면 내가 이 문 앞에서 멍을 때리고 있던 한참 사이에 진작 문을 열어줬겠지.
그러므로 나는 갇혔다.
게다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낡은 천 주머니와 그 안에 든 쪽지, 그리고 조금 전 이곳 바닥에서 발견한 메이슨 교단의 브로치뿐.
굳게 닫힌 문을 여는 데 사용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은 없다.
허접한 나무문 정도였다면 리볼버를 써먹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저건 하필 철문이고 이 건물은 두터운 돌을 쌓아 만든 석탑.
이건 총으로 해결을 볼 수 있는 종류의 시련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갇혔다.
자……. 내가 꼼짝없이 갇혀버렸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니 이쯤에서 상기를 멈추도록 하고.
그렇다면 이곳에 갇혀버린 나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대로 여기 멈춰서, 혹은 다시 저 위로 기어 올라가서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려야 할까?
물론 밀리엄과 제임스는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분명 나를 찾아 나설 사람들이다.
그렇게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어쩌면 숲속까지 들어와서, 정말 재수가 좋을 경우 이 탑까지 도달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가 과연 그런 낙관적인 희망과 함께 멈춰 서도 좋은 대목일까?
문을 닫기 전, 아리아 오큘러스는 나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맥락상으로 확신컨대 메이슨 교단에 대해 조사할 기회를.
물론 그녀는 나를 여기 가두어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지만, 그 말이 거짓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리아 오큘러스를 향한 신뢰라기보다 그간 내가 무수히 접해온 온갖 스토리들을 향한 신뢰였다.
여기가 내게 있어 단지 빠져나가야 할 트랩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녀가 굳이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퇴장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런 지점을 고려했을 때, 여기서는 얌전히 멈춰서 구조를 기다리기보다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을 터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무언가 새롭게 시도해볼 만한 행동이 있다면 그건…….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정확하게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서였다.
처음부터 이 탑 안에 진로라곤 셋뿐이었다.
문을 통해 나가거나, 계단을 올라 꼭대기로 향하거나, 지하로 내려가거나.
문으로 나갈 방법은 없고 탑 위로는 이미 다녀와본 참. 줄도 없이 번지점프를 할 요량이 아니라면 저 위로 올라가는 것은 힘듭고 춥고 무의미한 선택지다.
그러니 남은 길은 하나. 저 계단을 통해 미지의 지하공간으로 내려가는 것.
나는 일단 손에 쥐고 있던 메이슨 교단의 브로치를 레나 엘모어의 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난 다음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여섯 계단 아래의 풍경은 아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희미하게 일렁이는 불빛도 여전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계단을 내려가 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직시했다.
울퉁불퉁한 돌벽은 동굴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벽에는 넓고 일정한 간격으로 횃불이 걸려 있었다.
횃불의 불길이 멀쩡하게 일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최근까지도 사람이 오간 모양인데…….
문제는 그런 생각과 함께 동굴 안쪽으로 조금 걸어간 뒤에 발생했다.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난 것이다.
낭패감에 휩싸인 순간, 제발 나타나라고 그토록 사정을 할 때는 묵묵부답이었던 시스템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 과제 011. ]
지하미궁에 들어서다 달성! (보상 : 모노클 1개)
와, 미궁이란다.
지도도 없는 미로찾기 미니게임 같은 걸 시킬 요량이라면 통 크게 회중시계 다섯 개 정도는 보상으로 주고 시작해야 도리에 맞지 않나?
쪼잔하게 모노클 1개가 보상이라니.
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쨌든 과제 달성창이 떴다는 건 어차피 들어서야 할 미궁이었다는 뜻.
나는 얌전히 운명에 순응하기로 결심한 뒤, 회중시계를 소환해 이 지점을 세이브했다.
중간에 완전히 길을 잃었다 싶으면 한 번 정도는 이 시작점으로 되돌아올 심산이었다.
자……, 이쯤이면 준비는 대충 끝난 것 같고.
이제 어느 쪽으로 가볼까?
***
제대로 가고 있는지 헤매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동굴을 오로지 육감에 의지해 걸으며, 나는 아리아 오큘러스가 했던 말들을 계속해서 상기했다.
그녀는 내가 교단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다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예비신도를 대하는 교단 간부의 것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였지.
해볼 테면 해보라는 비웃음이 명백하게 섞여 있던 음성.
아무래도 아리아 오큘러스가 말한 ‘관심’이란 내가 그간 나름대로 가장해온 신도 꿈나무로서의 그것이 아닌 것 같았다.
어조나 다른 정황들을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그보다는 오히려 밀리엄과 함께 교단의 뒤를 캐고 있는 행태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둘째치더라도…….
그 사실을 아리아 오큘러스만 알고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되지?
의식의 흐름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떠오른 것은, 피아벨 대수도원을 바라보며 말하던 아리아 오큘러스의 눈빛과 목소리였다.
생각해보면 시종일관 잔잔하던 그녀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호수처럼 서늘해진 것은 그때부터였는데.
‘정확히는 그분들이 바라셨을 말이지요.’
돌이켜보면 그 말에서도 뭔가 선을 긋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은데…….
혹시 아리아 오큘러스는 사실 메이슨 교단 자체나, 하다 못해 교단의 일부에라도 어떤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느낌을 받았던 탓인지 어쩌면 아리아 오큘러스가 우리의 조사 건을 다른 신도에게 알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나한테 호의적이냐 하면, 난데없이 지하미궁을 헤매고 있는 이 상황만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만 내가 그녀에게 아예 거슬리기만 하는 상대였다면, 굳이 교단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날 밀어넣을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여간에 얼굴뿐 아니라 속내까지 베일로 가려둔 것처럼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녀가 바라는 건 내가 이 미궁 속을 헤매다 돌아가지 못하고 동굴 안의 백골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이 난관을 이겨내고 그녀가 말한 ‘기회’라는 것에 다다라 메이슨 교단의 비밀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내내 나는 몇 개의 갈림길과 더 마주했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퍼즐이나 미니게임은 추리어드벤처게임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나 역시 그런 다양한 종류의 퍼즐을 즐기는 플레이어에 속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퍼즐은…… 애석하게도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축에 속했다.
변변한 단서도 뭣도 없이 오직 육감과 기억력에 기대어 선택과 철회를 반복해야 하는 퍼즐.
도대체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었다가 세 번째로 막다른 길을 만난 시점.
나는 머릿속을 장악하기 시작하는 짜증과 분노를 밀어내고 어떻게든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의 갈림길로 돌아가,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꺾어 보았다.
여기도 막혀 있으면 그땐 이전의 갈림길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정말로 짜증을 주체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미친 척하고 회중시계를 이용해 시작지점으로 돌아가는 방향도 고려해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벽에 늘어선 횃불들이 밝히고 있는 길 끝에 양쪽으로 열리도록 만들어진 고풍스런 나무문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걸음을 재촉하다가, 열린 문 앞에 서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다시 속도를 늦췄다.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치마의 실루엣. 작고 마른 몸집.
어째 어른은 아닌 것 같다는 감상과 거의 동시에 나는 희미한 불빛 속에 서 있는 인물이 아까 만난 이바나 엘모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저를 알아보고 걸음을 멈춰 서자, 이바나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캠벨 남작님?”
얼굴을 알아본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베로니카보다도 작은 키의 소녀가 크고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어디서 끝날지도 감이 잡히지 않던 낯선 미궁 속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사실에 찾아왔던 안도감과 반가움도 잠시.
빠르게 돌아온 이성은 이바나가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얘가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걸까. 혹시 길을 잃었나?
하지만 그런 거라면 어째서 문앞에 가만히 서 있었지?
마치…… 문앞을 지키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는데.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며 이바나 엘모어를 바라보았다.
양손을 등 뒤로 감춘 그녀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내 왼쪽 가슴께를 응시하다가, 이내 미간을 찡그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먼저 나를 불러놓고도 무언가 대화를 이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기울어진 앳된 얼굴 위로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 한참을 머물렀다.
그렇게 이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내가 ‘네가 왜 여기에 있니?’ 하는 질문을 건네려던 순간이었다.
두어 발자국 앞에 서 있던 이바나가 별안간 내 쪽으로 몸을 부딪쳐왔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단지 몸을 부딪친 정도로는 결코 찾아들 리 없는 날카롭고 강렬한 격통이었다.
입에서는 갑자기 왜 그러냐는 질문 대신 말이 되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갔다.
돌연 몸을 파고들었던 이물질이 쑥 빠져나가는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 이바나가 뒷걸음질을 쳤다.
순간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가운데 나는 반사적으로 통증이 이는 복부를 부여잡았다.
손이 금방 흥건하게 젖어드는 느낌에 차마 복부를 내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뒷걸음질 치는 이바나를 보았다.
무감해 보이기도,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소녀의 얼굴 아래.
작은 손에 들린 날붙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