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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73화 (73/121)
  • 73화. 요람에서 무덤까지 (7)

    아리아 오큘러스는 돌멩이며 나뭇잎이며 잡초 따위가 마구 밟히는 숲길을 용케 발소리도 없이 걸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무슨 도술이라도 부리나? 축지법 같은 건가?

    나뭇잎을 지르밟았다가 나뭇가지를 밟아 부러뜨렸다가 돌멩이를 걷어차가며 요란뻑쩍하게 걷고 있는 내 쪽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민망해질 정도로 고요한 걸음.

    나는 저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어 계속 그녀의 발치를 힐끗거리는 한편으로, 그 고요함이 아리아 오큘러스와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기 좋게 낚였다는 생각을 했다.

    보육원 뒤편의 숲길은 보기와 달리 퍽 험한 구석이 있었다. 구둣발로 그 위를 걷는 일도 당연히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이런 길을 마치 산책이라도 가려는 양 ‘잠시 거닐 생각’이라고 말하는 건 솔직히 사기가 아닌가?

    물론 아리아 오큘러스와 독대한 플레이어의 바람직한 자세란 그녀가 에베레스트 등정을 하자고 해도 어휴 그러믄요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겠지만!

    그러니까 이 길이 이토록 험하리라는 경고가 미리 주어졌더라도 나는 그녀를 따라 걷는 것을 선택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에겐 마음의 준비란 걸 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건만…!

    나는 좀 익숙해졌나 싶었던 걸음이 다시 삐그덕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이쯤 되니 남이 옆에서 기우뚱대거나 말거나 신발에 날개라도 단 듯 사뿐거리는 아리아 오큘러스가 얄밉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이 고생을 하는 보람도 없이,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그녀와 나 사이엔 변변한 대화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솔직히 내 부족함 탓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다.

    아리아 오큘러스는 숲을 거닐겠다고 했지 나와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진 않았으니,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면 먼저 화제를 제시하는 것도 응당 내 쪽이라야 했으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아리아 오큘러스와 나눌 마땅한 대화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마땅한 대화거리는 고사하고, 그녀가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애당초 메이슨 교단에서 성녀란 대체 어떤 위치인가.

    교단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우두머리? 아니면 그냥 포교에 써먹기 위해 잘 꾸며놓은 마스코트?

    상대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대화를 어떻게 꺼낼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럴 때 선택지라도 떠주면 좋겠는데 야속한 시스템창은 감감무소식이고. 하여간 원수가 따로 없지.

    그렇다고 대책도 없이 호기롭게 그녀를 따라나선 것을 후회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대화를 이어가는 일도 걸음을 이어가는 일도 생각보다 까다로운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아까 그 상황에서는 따라나서는 게 맞았다.

    분명 여기서 건져갈 무언가가 있을 것이야…….

    그런 막연한 희망만을 안은 채, 이 말을 꺼내볼까 저 말을 꺼내볼까 주춤거리기만 하며 열심히 뒤따라 걷기만을 한참.

    아리아 오큘러스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는 아까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보았던 기억이 나는 정체불명의 석탑이 서 있었다.

    나는 그저 정처 없고 조금 고단한 산책인 줄 알았던 걸음에 목적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살짝 당황해 아리아 오큘러스를 보았다.

    그녀는 둥그런 회색 석탑을 잠시간 올려다보다가, 이내 나를 보며 탑쪽으로 고개를 살짝 까딱해 보였다.

    그것이 같이 탑 안으로 들어가보겠냐는 권유임을 눈치채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투명한 베일 너머에서 그녀가 웃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잠시 들었다.

    다시 부드럽게 몸을 돌린 아리아 오큘러스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려 있는 석탑의 철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석탑 안쪽에 들어서기까지는 금방이었다.

    그것이 또 다른 역경의 시작임을 깨닫기까지도, 마찬가지로 금방이었다.

    “이 위에서 보이는 경치가 아주 좋답니다, 남작님. 함께 올라가보시겠어요?”

    그녀는 마치 내가 어디까지 자길 따라갈 참인지 시험해보려는 사람처럼, 혹은 어느 곳을 이야기해도 당연히 따라가리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물었다.

    “하하, 그럼요. 여기까지 왔는데, 추천해주시는 경치 정도는 보고 가야죠.”

    나는 탑 안쪽의 바닥에서 꼭대기로 이어지는 원형 돌계단을 주욱 훑으며 반쯤 해탈한 채 말했다.

    불쌍한 내 다리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단은 지하와 지상 양쪽으로 이어져 있었고, 지하로 뻗어나간 몇 칸의 계단 끝에는 역시나 활짝 열려 있는 문이 있었다.

    나는 열린 문 너머로 희미하게 일렁이는, 아마도 횃불로 추정되는 빛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금세 시선을 뗐다.

    지금은 아리아 오큘러스를 따라 위로 올라가야 할 때였다.

    정신을 차리니 벌써 저만치 앞서 올라가고 있는 새하얀 인영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아리아 오큘러스를 따라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탑 꼭대기로 향하는 돌계단은 적당히 넓어서 그렇지 손잡이조차 없어서,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그대로 골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다지도 위험해 보이는 계단을, 치렁치렁하게 질질 끌리는 드레스 차림으로 오르면서도 아리아 오큘러스는 꼿꼿하고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했다.

    나는 그 의연한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두 배로 정신줄을 챙겨야 했다.

    얼마나 걸어 올라갔을까.

    손을 의지하고 있던 탑의 벽이 끝나고, 다시 바깥 공기가 폐부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메이슨 교단의 성녀와 함께 탑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오직 아리아 오큘러스와 대화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자처했던 기나긴 고행의 끝이었다.

    나는 가슴께 정도까지 올라오는 돌벽을 붙잡고 탑 아래의 세상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리아 오큘러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경치 하나 만큼은 정말이지 끝내주게 좋았다.

    나는 길게 이어진 숲길 끝에서 수많은 첨탑을 달고 웅장하게 서 있는 근사하고 거대한 건물에 시선을 빼앗긴 채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까 저게… 메이슨 교단의 총본산인 피아벨 대수도원이란 말이지……?

    일순 그걸 상기하고 나자, 방금 전까지의 감탄은 씻은 듯 사라졌다.

    대신 섬뜩함과 아득함만이 남아 어깻죽지 근처를 감싸오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저곳에, 저렇게나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곳에 가서 무언가의 해결을 보게 되는 건가. 조금 무서운데.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득, 아리아 오큘러스와 대화를 이어갈 그럴듯한 화두가 하나 떠올랐다.

    나는 나와 달리 익숙한 시선으로 탑 아래를 스윽 훑어보고 있는 아리아 오큘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성녀님께선 그럼 저곳에 사시는 건가요?”

    내 딴엔 가벼운 발화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아리아 오큘러스에게서는 한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시선으로 대수도원 건물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조금 맥 빠지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네, 그렇죠. 저곳에 살고 있지요.”

    고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음성이었지만 ‘저곳’이라는 대목에서는 묘한 서늘함이 전해졌다.

    일순 영문 모를 오한이 들어 손으로 어깨를 감싸 매만지고 있자니, 수수께끼 같은 아리아 오큘러스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저곳에서 남작님을 뵙게 될 날이 기대되네요.”

    마치 내가 언젠가 저곳에 가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한 말.

    나는 당황해서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건 그러니까… 포교인가? 하지만 포교라기엔 여전히 말투가 좀 싸늘한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지난번 자선파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의 아리아 오큘러스와 오늘의 아리아 오큘러스는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묘하게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그녀가 보여주었던 기묘한 호의와 알 수 없는 언행을 떠올리며 은근슬쩍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저기… 성녀님. 저번 파티에서 제게 해주신 말씀 말인데요. 제가 중요한 존재라고 하셨던…….”

    “아, 그거.”

    짧은 대꾸에선 약간의 웃음기가 느껴졌다. 썩 호의적이진 않은 웃음.

    “네, 그거요. 괜찮으시다면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알…….”

    “별거 아니랍니다. 남작님께서 들어주시길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니, 남작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도 없어요.”

    “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신 말씀이란 뜻인가요?”

    “정확히는 그분들이 바라셨을 말이지요.”

    이해력이 남다르시군요.

    짧게 덧붙인 말에서는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났다.

    ***

    탑 위에서의 대화는 짧았고, 내려오는 길은 조금 더 무서운 대신 그만큼 더 수월했다.

    두 발이 땅에 닿은 순간에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나는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두드렸다.

    그때였다. 탑 바닥 중앙에서 무언가 자그마한 금색 물체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는 뭔가 떨어져 있거나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마치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걸음을 움직여 물체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보니 그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일찍이 아스톤 홀의 자선파티에서 본 바 있는 금색 브로치. 아마도 메이슨 교단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남작님.”

    멍하니 브로치를 내려다보던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몸을 휙 돌렸다.

    어느 틈에 바깥으로 나갔는지, 철문 밖에서 나를 향해 서 있는 아리아 오큘러스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나가기 위해 걸음을 움직이려는데, 그녀가 돌연 한층 더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희 교단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으신 것, 알고 있어요.”

    “그, 그야…….”

    “그러니까 기회를 드릴게요.”

    기회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새는 없었다.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채고 달려 나갈 새는 더더욱 없었다.

    힘내보세요, 하는 말이 얼핏 들리는가 싶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혔다.

    나는 그제서야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문에 손을 가져다 대기 무섭게 바깥쪽에서 걸쇠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아리아 오큘러스의 음성처럼 서늘하기 그지없는 소리. 나는 문을 흔들던 손을 허벅지 옆으로 떨어트렸다.

    그러니까 기회를 드릴게요.

    성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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