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요람에서 무덤까지 (6)
나는 행여라도 찢어질까 조심스럽게 쪽지를 통에서 빼냈다.
[ ‘레나 엘모어의 쪽지’를 획득했다. ]
레나 엘모어가 베로니카 캠벨에게 이토록 비밀리에 남긴 쪽지라니.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두방망이질을 쳤다. 쪽지를 펼치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해야 했다.
그러한 잠깐의 고난을 거쳐 마침내 쪽지를 완전히 펼치는 데 성공한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종이 위의 글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원통은 작았고, 종이는 그보다도 작았다. 당연히 적혀 있는 글귀는 길지 않았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고 아무도 믿지 말고 최대한 빨리, 아주 멀리, 누구도 너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렴. 아가, 미안하다.’
그것은 길지 않은 만큼 의미심장했다.
쪽지가 땅속에 갇혀 있어야 했던 세월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쓴 사람의 다급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받아들이기에 난해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죽음을 직감하고서 미래의 딸에게 전하려 했던 말이 하루빨리 먼 곳으로 도망치라는 것이었다니.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물론 쪽지에는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으나, 진짜 베로니카라면 몰라도 나에게 그것은 어떻게든 알아내라는 시스템의 메시지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이토록 간절한 경고를 적어가며 레나 엘모어가 예상한, 딸의 미래에 찾아올 위협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생명의 위협 정도겠고, 실제로 나는 벌써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글쎄.
이건 20여 년 전에 쓰인 쪽지인데.
여기서 레나 엘모어가 경고하고 있는 위협이 내가 베로니카의 몸에 들어온 이후 겪고 있는 죽을 고비들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그 정도면 진짜 예언이나 다를 바가 없잖아.
게다가, 이걸 굳이 어느 정도 성장했을 시점의 딸에게 전달되도록 한 것도 뭔가 이상하다.
본인과 남편의 죽음은 목전에 있다고 생각했으면서, 어떻게 베로니카에게 찾아들 위협은 미래의 일이라고 확신했을까?
선량하고 윤리적인 지성체로서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청소년이나 성인보다는 영유아를 죽이는 일이 훨씬 수월할 텐데.
그 옛날부터 베로니카를 죽이려는 이가 존재했다면 그는 어째서 굳이 베로니카가 장성하길 기다렸으며, 또 레나 엘모어는 그런 유예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대관절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아니면…… 혹시 레나 엘모어는 베로니카가 메이슨 교단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길 바랐던 걸까?
본인이 메이슨 교단 소유의 보육원에서 자라본바 이놈의 교단이 영 몹쓸 곳이고 오래 엮여봐야 좋을 게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거지.
모름지기 다단계와 사이비는 몸담은 기간이 길수록 빠져나오기도 어려워지는 법.
게다가 아까 원장실에서 발견했던 입양 증명서들을 떠올리자 그런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수잔 로이드와 앤서니 롭과 에드워드 녹스는 레나 엘모어와 달리 보육원에 남지 않고 입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마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범행은, 다소 묘하게 불완전한 부분이 있었다곤 하나 기본적으로 메이슨 교단의 예언서를 바탕으로 자행되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곳의 아이들은 메이슨 교단과 관련이 있는 집안으로만 입양되어, 보육원을 떠난 뒤로도 평생을 교단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아주 영민했던 레나 엘모어는 그러한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소중한 외동딸이 어떻게든 교단과 무관한 삶을 살았으면 해서 이런 쪽지를…….
으음…….
나름 그럴듯한 것 같긴 한데 어딘가 석연치가 않은 건 기분 탓일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쪽지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이나 이 상황 자체의 내밀함에 비해 내 가설들이 너무 일차원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즉석에서 여태까지의 정황만 가지고 단순하게 해석해버려도 좋은 단서라기엔 솔직히 지나치게 의미심장하지 않나?
그렇게 잠시간 쪽지를 노려보며 고민하던 나는 이내 이쯤에서 생각을 멈추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곧장 해석이 가능한 단서는 아닌 것 같은 데다가, 밀리엄과 제임스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쪽지를 다시 조심스럽게 돌돌 말아 통 안에 슥슥 밀어 넣은 뒤 통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레나 엘모어의 천 주머니를 다시 뒤집어서, 다시 용도 불명의 금속물체가 되어버린 원통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입구를 조인 주머니의 손잡이를 손목에 걸고 몸을 일으키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욱신거림이 무릎을 강타했다.
쪽지에 집중하느라 너무 오래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다리를 두드리다가 천천히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슬슬 돌아가 볼 심산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순간 너무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무방비하게 돌아간 시야에 아까까지는 없던 새하얀 동상 같은 것이 잡힌 탓이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나는 그게 동상 따위가 아님을 깨닫는 데에 한참을 써야 했다.
돌아간 눈길 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동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단 한 번, 시간을 돌렸던 것까지 감안해봤자 고작 두 번 보았을 뿐이지만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되었던 새하얀 가면.
그 아래로 길게 늘어진 베일.
새하얀 드레스 위에 새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겉옷을 걸치고 연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자.
아리아 오큘러스.
메이슨 교단의 성녀가 마치 유령처럼 어떤 기척도 없이, 보육원 건물 뒤편의 숲으로 통하는 길목 앞에서 나를 향해 서 있었다.
비석을 원상복구시킨 직후까지만 해도 주변에 사람이라곤 없었는데.
대체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 걸까. 내가 쪽지를 읽는 것을 보았을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발각당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인데도 마치 아주 중요한 비밀을 들킨 듯한 낭패감이 들었다.
설상가상 내가 자신을 발견한 뒤에도 그저 오도카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인 아리아 오큘러스는 정말이지 흐릿한 환영 같아서, 시시각각 정신을 혼몽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이대로는 안 된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켕기는 짓을 하지 않았다는 자기최면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충분히 진정하고 난 뒤에 나는 아리아 오큘러스가 미동 없이 서 있는 지점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다가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가면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을 통해 나를 직시하기만 할 뿐, 다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 태도 탓에 순간순간 오싹해지는 등골을 애써 외면하며 걸어간 나는 마침내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한 자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신비한 금빛이 도는 갈색 눈에 시선을 맞추자, 영영 고요할 것만 같던 베일 너머에서 나긋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캠벨 남작님. 평화로운 저녁이지요.”
“안…녕하세요, 성녀님. 오늘은 이곳으로 봉사를 나오신 건가요?”
내 물음에 아리아 오큘러스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하게도 표정을 확인할 수 없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그녀가 도로 질문을 건네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어, 그…… 이따금 봉사를 다니곤 하신다고 들은 기억이 나서요. 마침 여기가 메이슨 교단 소유의 보육원이기도 하고…….”
나는 왠지 굳이 달 필요가 없었을 것 같은 사족까지 달아가며 횡설수설 대답했다.
흘러 나가는 음절 음절이 끔찍할 정도로 한심하게 들려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아리아 오큘러스는 대관절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일단 딱히 인간 같지도 않다는 점은 둘째치고라도 그랬다.
일단 대하기가 불편했고, 얼굴을 죄 가리고 있는 탓에 도무지 의중이며 반응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수상해 보이든 말든 그냥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두문불출하기로 유명하시다는 그 성녀님과 무려 독대를 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 기회를 걷어차는 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갈등하던 나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밀리엄과 제임스는…… 미안하지만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해야지, 뭐.
이 대화를 통해 어떻게든 괜찮은 단서를 건져서 돌아가는 편이 늦어진 데 대한 핑계를 대기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번 아리아 오큘러스와 눈을 맞췄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눈을 휘며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은 그녀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봉사처로는 교단과 관련이 없는 곳을 주로 고른답니다. 오늘 여기에 온 건 그냥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예요.”
“아, 그러셨군요. 어… 하지만 원장님께선 오늘…….”
“외출하셨다는 건 알아요. 그래서 온 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리아 오큘러스의 음성에서는 묘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저런 목소리로 ‘그래서 왔다’고 말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넬리 엘모어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그녀가 부재중일 때를 골라 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내 착각인가……?
잠시 그런 의문에 잠겨 있자니 이번엔 베일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유쾌한 웃음 같기도, 비웃음 같기도 한 소리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좀 솔직해지기로 하고 왜 웃으시냐고 물으려는데, 별안간 그녀가 다시 말을 건네왔다.
“잠시 숲속을 거닐 생각인데, 남작님도 함께하시겠어요?”
오늘은 혼자 걷기 좀 외롭다는 생각이 드네요.
덧붙인 말에서는 딱히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와 조금 더 대화를 이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