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71화 (71/121)
  • 71화. 요람에서 무덤까지 (5)

    자, 생각해보자.

    아무 예고도 없이 별안간 죽은 어머니의 유품을 받은 딸이 갤러리들 앞에서 취해야 할 적절한 태도는 무엇인가?

    물건을 소중하게 손에 쥔 채 아련히 내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나에게 그만한 연기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그것을 가만히,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엘모어 모자와 헤어져 마차로 걸어가는 내내 그런 태도를 유지했다.

    밀리엄과 제임스는 내 느릿한 걸음에 보폭을 맞추어 걸으면서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흔적을 마주한 베로니카 캠벨에게 감상에 젖을 시간을 주려는 따스한 배려였겠으나, 문제는 내가 전혀 감상에 젖어 있지 않다는 데 있었다.

    그들이 머릿속으로 무슨 애틋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든 간에, 나는 어릴 적 부모를 잃은 베로니카 캠벨이 아니라 <블루 달리아>의 플레이어일 뿐이었다.

    그러니 레나 엘모어의 유품이란 나에게 그저 새로운 단서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껏 발견해온 다른 단서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그러나 어쩐지 제법 중요하게 기능할 것처럼은 느껴지는.

    요컨대 나는 당장 이 정체불명의 천 주머니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뒤집어보고, 필요하다면 뜯어보아서라도 시나리오 진행에 가장 쓸모 있는 형태로 활용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러나 방금 막 손에 넣은 모친의 유품을 탈탈 털어가며 조사하기 시작하는 딸이라니, 그 모습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워 보이겠는가…….

    그래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밀리엄과 제임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는 것 같은 순간을 틈타 주머니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용도가 영 불분명하지만 굳이 사용하자면 손가방 정도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천 주머니.

    마감이 영 시원찮고 조악한 것으로 보아 돈 주고 산 물건은 아닐 테고…… 아마 레나 엘모어가 직접 만든 게 아닐까 싶은데.

    이상한 점은 안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모름지기 가방이나 지갑 선물을 줄 땐 안을 채워서 주는 법이라는 불문율이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글쎄.

    ‘언젠가 딸에게 전해달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친구에게 맡길 정도라면 분명 무언가 의미가 있는 물건일 텐데.

    정작 전해진 것은 만든 이의 조잡한 솜씨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을 뿐 먼지 한 톨 들어 있지 않은 천 주머니 하나…….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 앞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주머니를 내려다보며, 나는 잠시 발상을 전환해보기로 했다.

    ‘남작님께 전해졌으면 하는 물건을 왜 굳이 제게 맡겼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아까 들은 말마따나 애당초 레나 엘모어는 어째서 이것을 타인에게, 그것도 하필이면 넬리 엘모어에게 맡겼을까?

    ‘언젠가 전해달라’는 부탁은 으레 본인이 직접 전해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전제로 하기 마련이다.

    레나 엘모어가 이 주머니를 가지고 보육원을 찾은 것은 마차사고가 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고 했지.

    혹시 그녀는 사고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본인과 남편의 신변에 어떤 위험이 가해지리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모종의 이유로 머지않은 죽음을 직감하고….

    ‘레나와 헨리 씨가 죽었을 때, 사실 저는 남작님의 백부님께서 남작님을 데려가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넬리 엘모어가 예상했듯 그녀 또한 조지 캠벨에게 외면당한 베로니카가 엘모어 보육원에 맡겨지리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베로니카를 키우게 될 넬리 엘모어에게 이 주머니를 맡긴 거라면?

    그녀가 이것을 받게 되리라 예상한 사람이, 캠벨 저택이 아닌 엘모어 보육원에서 자란 베로니카라면……?

    만약 그렇다면, 이 주머니의 효용 또한 엘모어 보육원에서 찾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저물어가던 노을빛 한 줄기가 주머니 안쪽을 스치듯 비추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기묘한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주머니 입구를 벌려 안쪽으로 시선을 기울였다.

    그냥 낡은 천을 덧대어놓은 줄로만 알았던 주머니 안쪽에 구불구불한 그림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림의 정체가 드러났다.

    주머니 안쪽에 그려진 것은 지도였다.

    중간 즈음의 붉은 가위표시까지 확인한 나는, 번뜩 고개를 들고 주머니를 가슴께에서 꾹 움켜쥔 채 조금 전의 발상으로 빠르게 되돌아갔다.

    단서로서의 이 주머니를 사용할 장소는 다른 어디도 아닌 이곳 엘모어 보육원이라야 자연스럽지 않겠느냐는 바로 그 발상으로.

    “베로니카?”

    그리하여 이대로 여길 떠나면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선 순간에, 밀리엄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내가 멈춘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좀 더 걸어갔던 모양인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일순 새로운 고민이 찾아들었다. 이 생각을 저들과 공유해도 좋은가 하는 고민이었다.

    물론 나는 밀리엄을 신뢰한다. 제임스는 둘째치더라도 밀리엄만은 확실히.

    하지만 이것은 레나 엘모어가 베로니카 캠벨에게만 전해지기를 바란 무언가로 이어지는 지도다.

    이것을 섣불리 제삼자와 공유해도 되는 걸까? 이 뒤에 무슨 정보가 어떻게 튀어나올 줄 알고?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회중시계 하나로 간신히 버텨온 얼마 전까지와 달리, 마침 나에게는 밀리엄 켄트우드의 검은 개 어쩌구 과제를 달성해 얻은 또 하나의 회중시계가 있지 않나.

    그러니 여기서는 큰맘 먹고 모험을 한번 해봐도 좋으리라.

    결심을 굳힌 나는 회중시계를 꺼내 이 시점을 세이브했다.

    그리고 기다리다 못해 내 쪽으로 돌아오려는 두 사람을 향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오는 길에 뭘 좀 흘린 것 같아요! 얼른 다녀올 테니까 먼저 마차에 가 계세요.”

    “그런 거라면 같이 가서 찾는 게…….”

    “에이, 번거롭게 뭘요!”

    나는 나를 따라나서려는 밀리엄을 향해 손을 내젓고서,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르게 달음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 넘어지겠다는 밀리엄의 걱정 어린 외침이 등 뒤로 멀어졌다.

    ***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 달린 나는 우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주머니를 뒤집었다.

    네모난 천 위로 지도의 형태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며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 ‘천 주머니 속의 숨겨진 지도’를 발견했다. ]

    붉은 가위표시는 보육원 건물로 보이는 직사각형의 오른쪽 뒤편, 좌우로 늘어선 다섯 개의 작은 사각형 중 가운데 것에 그어져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일단 보육원 건물의 뒤편으로 다시 달렸다.

    건물이 제법 커다란 탓에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중도에 발목을 잡는 트랩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은, 조금 오싹하게도 작은 묘비들이 주르륵 세워져 있는 공동묘지였다.

    묘비에 적힌 이름의 성은 모두 엘모어.

    보아하니 아무래도 보육원에서 지내다 죽은 아이들이 묻히는 묘지인 듯했다.

    왠지 모르게 서늘하면서도 씁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묘비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가던 나는, 제일 안쪽의 묘비 다섯 개에 어떤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즈음에서 다시 한번 지도를 꺼내 들었다.

    안이 비어 있는 다섯 개의 작은 사각형. 그중 세 번째 것 위에 그어진 빛바랜 X자.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설마 나더러 저 무덤을 파보라는…… 그런 뜻은 아니겠지?

    새겨진 이름이 없는 것을 보면 빈 무덤인 듯하지만, 그래도 영락없이 무덤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설마.

    삽도 없는데 설마.

    나는 순간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맛보면서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 중앙의 묘비 앞에 자리를 잡고 쭈그려 앉았다.

    아치 모양의 자그마한 묘비는 시야를 낮춰 마주 보자 좀 전보다 훨씬 더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듯했다.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일단 주위를 확인했다. 사람의 기척은 없다. 그러나 삽 같은 물건도 없다.

    손으로 땅을 파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삽 정도는 준비해 뒀을 터.

    나는 땅을 파보는 것 외의 다른 해결책이 있으리라는 판단하에 우선 묘비를 손으로 짚었다.

    장갑을 끼고 있는 차가운 돌의 냉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서,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묘비가 조금 뒤로 밀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건 그때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잠시 손을 떼고 다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사람은 없고… 대신 내가 짚었던 묘비 양옆으로 두 개씩 서 있는 묘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묘비들을 한번, 그리고 내 눈앞의 묘비를 한번 보았다.

    확실해졌다. 눈앞의 묘비는 아주 약간이지만 분명 다른 네 개보다 뒤로 밀려 있었다.

    해 저무는 무덤가에서 두더지처럼 맨손으로 땅을 파는 미친 인간 같은 짓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서, 다시금 묘비에 손을 얹고 힘을 주어 뒤로 밀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밀려난 비석 아래로 이내 작은 구덩이가 나타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구덩이 안쪽을 들여다보니 뭔가 들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무엇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구덩이 안으로 손을 뻗었다. 달그락하는 금속음과 함께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손을 들어 올린 나는 우선 오른손을 움직여 비석을 다시 원상복구시킨 뒤, 꾹 말아 쥐고 있던 왼손을 펼쳐 손안에 들린 물체를 보았다.

    흙이 조금 묻은 장갑 위에 올라 있는 것은, 손바닥을 조금 넘는 길이의 얇고 기다란 금속 원통이었다.

    천 주머니 이상으로 용도가 불분명해 보이는 그것을 양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는 원통의 중앙부가 미세한 홈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그 홈을 기준 삼아 뚜껑을 열듯 윗부분을 돌리자 웬걸, 원통이 열리며 둘둘 말려 있는 종이쪽지가 반신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