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70화 (70/121)

70화. 요람에서 무덤까지 (4)

나는 손을 뻗어 종이들을 집어 들었다.

[ ‘4장의 입양증명서’를 획득했다. ]

친절하게도 몇 장인지를 알려주는 시스템창 덕에 종이를 셀 필요는 없었다.

네 장이란 말이지?

나는 네 장의 종이를 왼손에 들고 수잔 로이드의 이름이 적혀 있던 첫 장을 오른손으로 빼들었다.

두 번째 장의 입양 후 성명란에 적힌 것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기도 했다.

종이 위에 적힌 앤서니 롭의 이름을 노려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앤서니 롭도 엘모어 보육원 출신이었단 말인가?

우연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여긴 게임 속이고, 시스템창이 이미 이 발견의 유의미함을 증명했고, 무엇보다 앤서니 롭의 입양 전 성명란에도 이름 대신 숫자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이건 노다지다.

좀처럼 발동하는 일 없는 나의 촉마저 확신의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두 번째 종이도 오른손으로 옮겨 들었다.

성 조나단 병원 사건의 범인이 첫 장을, 왕립수사국 사건의 범인이 두 번째 장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세 번째 장에 적힌 것은 다음 사건 범인의 이름이 아닐까 하는 지나치게 희망적인 기대와 함께였다.

그러나 세 번째 장에 적힌 이름은, 마찬가지로 낯설지 않아 놀랍지만 기대했던 바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녹스.

세 번째 입양증명서의 주인은 에드워드 녹스였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레나 엘모어에 수잔 로이드로도 모자라 앤서니 롭이며 에드워드 녹스까지 모두 모두 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메이슨 교단 소유인, 엘모어 보육원 출신이었다는 뜻이렷다?

아직 뭐가 뭔지 분간이 가지는 않는데 아주 중요하리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 앞에 나는 이제 거의 손을 떨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장을 가리고 있는 세 번째 장을 치우려던 순간이었다.

“저…, 남작님.”

갑작스럽게 들려온 제임스의 부름에 나는 괜히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올라간 시야에 어쩐지 말을 망설이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제임스의 얼굴이 잡혔다.

“아, 네. 로웰 씨. 무슨 일이신가요?”

“이런 걸 여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남작님께선 저와 켄트우드 씨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나는 잠시 당황해서 반쯤 입을 벌린 채 ‘어…….’ 하는 소리를 냈다가, 이내 입을 닫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질문의 의도야 자명했다. 밀리엄이 자신을 향한 분노와 불신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거겠지.

물론 나는 제임스가 말하는, 그와 밀리엄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작의 플레이어인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일 뿐, 베로니카가 알고 있어도 좋은 사실은 아니다.

밀리엄은 베로니카에게 자신도 진실을 묻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지만 그렇게 된 경위나, 그 일이 제임스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으니까.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셈이었다.

“……죄송해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네요.”

“남작님께서 죄송해하시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제 질문이 부적절했지요. 제가 직접 기억해낸 뒤에 드리는 사죄가 아니면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사정을 알아내서 사죄부터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설 때가 있어서…….”

<레드 헤링>에서의 일을 직접 기억해낸다 한들 제임스 로웰이 밀리엄에게 사죄란 걸 하려 들기는 할까?

순간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다.

<레드 헤링>의 피날레는 밀리엄의 시점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밀리엄에 대한 제임스의 심리나 관점 같은 것은 조명된 바가 없었다.

애당초 밀리엄을 이용하기로 결정했을 당시의 제임스 로웰은, 자신의 행동이 밀리엄의 신념을 짓밟고 그의 인생궤도를 송두리째 꺾어버리리라는 계산까지 전부 마친 상태였을까?

모르긴 몰라도 나로서는, 모든 것을 기억해낸 제임스 로웰이 밀리엄에게 ‘내가 당신을 그 지경까지 좌절시킬 줄은 몰랐다’고 사죄하는 장면이 좀처럼 연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내 생각에 기억을 되찾은 당신은 그 대가로 밀리엄에게 사죄하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답답하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저라도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을 거고요.”

“이해해주신다니 감사합…….”

그때였다.

돌연 흐려진 제임스의 말끄트머리 뒤로 복도를 울리며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는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부러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밀리엄의 음성이 전해진 것도 금방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급하게 종이들을 도로 한 손에 모아 있던 곳에 돌려놓았다.

마지막 입양증명서에 적힌 이름이라도 확인할 걸 그랬다는 낭패감은 서랍을 닫고 소파를 향해 반쯤 뛰어들던 순간에서야 뼈아프게 찾아왔다.

어쨌든 나와 제임스가 무사히 소파에 착석한 뒤, 남아 있던 식은 찻물을 원샷하고 찻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서는 인영은 나갈 때와 달리 세 개였다.

제일 앞에 선 이는 밀리엄이었고 넬리 엘모어가 뒤이어 들어섰는데,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또 한 명이 있었다.

밀리엄보다 반 뼘 정도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 무슨 사연인지 옷이 온통 흙투성이지만 아주 선한 인상을 가진 젊은 남자.

처음 만나는 게 분명한 얼굴에서 묘한 기시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기울어지는 고개를 따라 움직인 시선이 넬리 엘모어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자연히 방금 느낀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남자의 얼굴이 넬리 엘모어와 아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혈연 관계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만큼…….

“아, 남작님. 여긴 제 아들 루크랍니다.”

그럼 그렇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남자가 자기 아들임을 알려준 넬리 엘모어는 이내 아들의 등을 내 쪽으로 슬쩍 떠밀며 ‘루크, 캠벨 남작님께 인사드리렴.’ 하고 다정히 말했다.

그러자 루크 엘모어가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캠벨 남작님. 루크 엘모어입니다. 그… 우선은 차림새가 이 모양이라 면목이 없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군요…….”

그는 민망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누런 흙이나 작고 얇은 풀 같은 것이 여기저기 묻은 자기 옷을 내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엘모어 씨. 저, 혹시 넘어지거나 하신 거라면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다치신 곳이 없는지 보러 가시는 게…….”

“아, 아닙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지만 넘어진 건 아니고요…… 아이들과 놀아주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하하.”

루크 엘모어가 제 어깨에 붙은 풀떼기 하나를 슬쩍 털어내며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이들이란 보육원생들을 말하는 거겠지. 입성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신나게 놀아준 모양이라는 감상이 절로 들었다.

그런 아들을 보고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차면서도 내심 뿌듯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넬리 엘모어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들을 지켜보던 밀리엄이 작게 헛기침을 한 직후였다.

나는 아쉬워서 어쩌냐는 얼굴로 나를 보는 넬리 엘모어를 향해 눈을 깜빡이며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죄송합니다, 남작님. 제가 하필 오늘 남편과 선약이 있어서요. 이제 그만 나가봐야 할 듯해요.”

아, 어쩐지. 아까 시계를 봤던 건 그것 때문이었구나.

나는 루크 엘모어가 원장실 문 옆의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겉옷과 모자를 넬리 엘모어에게 가져다주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며 생각했다.

그는 말끔한 천이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자기 옷과 닿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며 모친의 어깨에 케이프를 걸쳐주었다.

모자가 서로를 향해 마주 웃었다. 다복하고 따스한 광경이었다.

그 그림 같은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데까지 겨우 생각이 미친 나는 급하게 입을 열어 마음에도 없는 아쉬움을 표했다.

“약속이 있으셨다니 아쉽네요. 원장님과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다음에 꼭 다시 찾아주세요. 저도 남작님께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답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루크 엘모어에게 건네받은 모자를 쓰고 모양새를 고치던 넬리 엘모어가 별안간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급히 몸을 돌렸다.

다급한 걸음이 향한 곳은 조금 전까지 내가 열심히 뒤지고 있던 책상 뒤편이었다.

내 딴에는 말끔하게 원상복구해둔 상태였으나 어쩔 수 없이 덜컥 겁이 난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넬리 엘모어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가 우측의 서랍으로 허리를 숙였다. 등골이 순식간에 오싹해지고, 서랍 열리는 소리가 곧장 뒤따라 들려왔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넬리 엘모어의 손에는 낡은 천주머니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나는 우선 그녀가 연 서랍이 내가 열었던 제일 위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그러고는 내가 미처 살펴보지 못한 다른 칸에서 꺼내진 수수께끼의 천주머니 쪽으로 곧장 시선을 못을 박았다.

넬리 엘모어는 문제의 주머니를 들고 곧장 나에게로 걸어와, 그것을 내 손에 꼭 쥐여주며 말을 꺼냈다.

“사고가 있기 얼마 전에 레나에게서 맡아둔 물건이에요. 언젠가 딸에게 꼭 전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남작님께 전해졌으면 하는 물건을 왜 굳이 제게 맡겼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오신다는 언질을 주셨을 때 생각이 나서 꺼내두었지요.”

“어, 감사합니다…….”

[ ‘레나 엘모어가 딸에게 남긴 천주머니’를 획득했다. ]

넬리 엘모어의 설명과 함께 시스템 문구가 떠올랐다.

졸지에 어머니의 유품을 전달받은 딸이 되어버린 나는, 감사하다는 얼떨떨한 대꾸를 끝으로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손 안의 천주머니를 멍하니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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