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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67화 (67/121)
  • 67화. 요람에서 무덤까지 (1)

    멜리사가 보여준 수잔 로이드의 입양증명서에는 정말로 엘모어 보육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윌 그렉슨이 오랫동안 엘모어 보육원을 후원해왔다는 로즈 그렉슨의 증언을 토대로, 수잔의 범행동기가 보육원에서 보낸 그녀의 유년시절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내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베로니카의 모친에 대한 생각이었다.

    “모친께서 엘모어 보육원에요?”

    “네. 거기서 자라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수첩에는 레나 엘모어라는 키워드가 형성되었었지. 그게 이렇게 연결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저택에 돌아온 이후, 보육원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오는 밀리엄에게 나는 베네딕트 홀터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내 말을 들은 밀리엄의 낯이 미묘하게 복잡해졌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그에게 공유해주어야 할 정보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왠지 이름이 낯익어서 아까 뭘 좀 찾아봤는데요…….”

    나는 말끝을 흐리며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밀리엄에게 건넸다.

    기실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내가 한 일은 베로니카의 집에서 허둥지둥 챙겨왔던 짐가방 구석의 서류뭉치를 꺼내는 것이었다.

    튜토리얼 당시 홉스 변호사에게서 받은, 캠벨 남작의 재산과 사업 리스트가 나열된 바로 그 서류.

    그때는 어마무시한 부동산 리스트에 지레 겁을 집어먹어서 사업 관련된 부분을 다소 대충 보고 넘겼었는데, 그 와중에도 희미하게나마 머릿속에 자리잡은 정보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꺼내본 사업 리스트의 중간 어드메 즈음에서 나는 엘모어 보육원의 이름을 발견했다.

    조지 캠벨은 자선사업의 일환으로 엘모어 보육원에 제법 큰 돈을 후원하고 있었다.

    윌 그렉슨이 조지 캠벨과 함께했다던 ‘작은 자선사업’이 바로 이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에 도달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백부님께서도 엘모어 보육원의 후원자셨더라고요. 밀리엄, 이게 우연일 리는…….”

    “……없겠죠.”

    밀리엄이 종이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그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은 나는 말없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엘모어 보육원.

    베로니카의 모친과 수잔 로이드가 자랐고, 조지 캠벨과 윌 그렉슨이 오랫동안 후원했다는 곳.

    이렇게까지 대놓고 떠먹여주는데 이를 수상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주 글러먹은 행동일 터다.

    “그러고 보니 나도 생각나는 게 하나 있군요.”

    종이를 노려보던 밀리엄이 일순 미간을 확 찌푸리더니, 소파에 앉아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가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향한 곳은 서재 안쪽의 책상 뒤편이었다.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소파로 돌아온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지난번 패트릭 헤이즈의 사무소를 정리하면서 챙겨왔던, 메이슨 교단에 대한 조사자료였다.

    서류를 펼친 밀리엄은 빠른 손놀림으로 앞의 몇 장을 휘리릭 넘겼다. 보여주고자 하는 정보가 어디쯤에 쓰여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났을까. 마침내 원하는 대목을 찾았는지, 그가 나에게 자료를 건네주었다.

    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어 시선을 내렸다.

    종이에 적힌 것은 패트릭 헤이즈가 조사한, 메이슨 교단이 소유 또는 운영하고 있거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재산의 목록이었다.

    마치 내가 직접 확인하길 바라는 것처럼 밀리엄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죽 내리며 목록을 하나하나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캠벨 남작의 재산 목록만큼은 아니었지만 리스트는 제법 긴 축에 속했고, 그때그때 알아낸 것을 덧대어 적은 것인지 나열된 순서가 다소 뒤죽박죽이었다.

    피아벨 대수도원, 아스톤 홀, 성 조나단 병원…….

    중간중간 보이는 낯익은 이름들을 지나치며 내려간 시선은, 리스트의 거의 끝자락에서 엘모어 보육원을 발견한 순간 우뚝 멈춰 섰다.

    나는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밀리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말없이, 그러나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와 밀리엄은 퇴원한 제임스와 함께 엘모어 보육원을 찾았다.

    시내를 빠져나간 마차가 한참을 더 달려 도착한 엘모어 보육원은 주변에 건물이라곤 보이지 않는 한적한 숲 어귀에 위치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제법 규모가 있는 보육원 건물 뒤에 펼쳐진 울창한 숲의 우거진 나무들 위로 비죽 튀어나와 있는 정체불명의 석탑을 발견했다.

    그러다 다음 순간에는, 석탑 뒤쪽으로 보이는 거대한 첨탑에 시선을 빼앗겼다. 유럽의 대성당을 연상케 하는, 아주 고풍스럽고 웅장한 느낌의 첨탑이었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밀리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저 첨탑은 피아벨 대수도원의 일부일 겁니다.”

    그제야 나는 며칠 전 엘모어 보육원으로 오는 길을 찾아보던 밀리엄이 ‘피아벨 대수도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모양’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뎅뎅, 하는 종소리가 바로 곁에서 울린 것은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자 보육원 정문의 종과 연결된 줄을 흔들고 있는 제임스가 보였다.

    제임스는 두어 번 줄을 흔든 뒤 이쪽으로 몸을 돌려 빙긋 웃었다.

    나는 그를 향해 나도 모르게 마주 웃어주었다가, 순간 반사적으로 밀리엄을 다시 돌아보았다.

    밀리엄 또한 웃고 있기는 했다. 다만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는 않는 채였다.

    나는 어제 저녁 제임스를 향해 ‘아직 몸이 성치 않으실 테니 엘모어 보육원엔 우리끼리 다녀오겠다’고 말하던 밀리엄을 기억해냈다.

    제임스가 한사코 동행하겠다 주장한 덕분에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바람이었지만.

    여하간 밀리엄은 우리가 이미 제임스에게 우리의 목적에 대해 털어놓고 조력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긴 대화를 나누거나 오늘처럼 동행하는 일을 영 내켜 하지 않았으며 그런 기색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밀리엄을 잃어버린 기억의 열쇠로 여기고 있는 제임스 입장에서는 그런 밀리엄의 태도가 다소 서운하거나 야속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게 다 자기 업보인 것을 어쩌겠는가.

    오늘도 제임스의 일방통행 짝사랑에 가까운 듯한 두 남자의 분위기를 살피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데, 보육원의 철제문 안쪽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묵직한 것과는 거리가 좀 있는 듯한 소리라고 생각하며 안쪽을 들여다보니, 웬 여자아이 하나가 문 안쪽의 걸쇠를 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여자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캠벨 남작님과 일행분들 되시지요?”

    방문의사를 미리 밝혀놓은 덕인지 아이는 나와 밀리엄, 그리고 제임스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며 공손하게 물었고, 나는 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붙잡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이바나 엘모어입니다. 원장 선생님께서 손님분들을 원장실로 안내해달라고 하셨어요.”

    수수하지만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돈된 차림에 연한 갈색머리를 양갈래로 예쁘게 땋아내린, 열셋에서 열네 살쯤 되었을까 싶은 소녀 이바나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이 엘모어인 것을 보면 저 애도 이곳의 원생인 모양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두 남자와 함께 열린 문을 지나친 나는 이바나를 따라 엘모어 보육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세상에, 캠벨 남작님! 어서 오세요.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무척이나 기뻤답니다!”

    이바나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원장실에서 만난 엘모어 보육원의 원장, 넬리 엘모어는 푸근하고 인자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내 옆의 밀리엄이나 제임스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오직 나만을 향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상상 그 이상의 환대에 당황한 나는 얼떨떨하고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 채 그녀가 이끄는 대로 원장실 중앙의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어서 편히 앉으세요. 이바나. 남작님과 일행분들께 다과를 내어드리자꾸나.”

    “네, 원장 선생님.”

    씩씩하게 대답한 이바나가 바깥에서 원장실 문을 닫았다. 복도를 도도도 울리는 발소리가 멀어지기까지는 금방이었다.

    예의상 밀리엄과 제임스에게 인사를 건넨 뒤부터 넬리 엘모어는 마치 자기 자식을 보듯 뿌듯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무례해 보이지 않을 법한 선에서 이리저리 눈을 굴려가며 조금씩 그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세상 애틋한 얼굴의 넬리 엘모어는 자신이 레나 엘모어와 친자매나 다름없는 사이였음을 강조하며 그간 지내는 것은 괜찮았는지, 자라는 데 불편함은 없었는지를 집요하게 물어왔다.

    물론 베로니카의 성장과정에 대해 내가 아는 사실이라곤 캠벨 가문에서 학대에 가까운 방치를 당하며 자랐다는 것뿐.

    이토록 베로니카를 반가워하는 상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대강 잘 지냈다는 식으로 말을 얼버무리며 어떻게든 대화의 주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기회는 다행히 빠르게 찾아왔다. 넬리 엘모어가 차와 쿠키를 내온 이바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이바나가 다시금 방을 나서기까지 짦게나마 대화가 멈춘 덕택이었다.

    나는 재빨리 찻잔을 들고 뜨거운 찻물을 불어 마시는 척 시간을 끌며, 이 지나치게 호의적인 보육원장에게서 어떤 정보부터 캐내는 것이 좋을지를 빠르게 고민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주제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레나 엘모어에 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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