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66화 (66/121)
  • 66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17)

    취조를 마친 뒤 나는 미친놈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다며 비소하는 수사관들을 뒤로한 채, 밀리엄과 만나기로 한 수사국 뒤뜰로 향했다.

    앤서니 롭과의 대화는 이렇다 할 의문의 여지 없이 마무리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위화감 같은 것을 남겼다.

    이를 테면 ‘거짓의 사도들’이라는 표현이 그러했다.

    앤서니 롭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도리 없이 메이슨 교단의 예언서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11월 30일 마거릿 극장에서 거짓 신의 사도 12인이 참극의 희생양이 된다고 쓰여 있어, 사망자 수를 제외하고는 실제 사건과 들어맞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대목.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거짓 신의 사도’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쪽은 그저 그 역할을 맡았을 뿐인 배우들이 아니라 이번 사건으로 사망한 열두 명이 아닌가?

    진실이 따로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심지어는 그것이 무엇인지까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한 채, 앤서니 롭의 말마따나 진실을 난도질하고 생매장해온 12인.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사건장소만이 바뀌었을 뿐 예언 자체는 외려 더욱 설득력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근거 삼아 앤서니 롭의 범행 또한 어떤 식으로든 메이슨 교단과 연관되어 있으리라고 추측한다면 그건 지나친 비약일까?

    물론 시나리오의 큰 줄기가 메이슨 교단과 연결되어 있는 상황이니 솔직히 비약이랄 것까진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메이슨 교단의 일원이었던 테오도어 와이엇 국장이 피해자 중 하나로 선택된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을 거듭하며 한참을 걸어 마침내 뒤뜰에 도착한 나는 밀리엄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대단히 넓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라곤 없는 뒤뜰에서 밀리엄을 찾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지만, 막상 다가서려고 보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밀리엄은 뒤뜰 한 구석의 철제 벤치에 앉아 무릎 사이에 손깍지를 낀 채, 예의 그 심란한 얼굴로 자기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히 깊은 생각에 잠긴 모양인지 내 기척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생각을 방해해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나는 잠시 동안 숨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그렇게 아주 잠깐 같기도, 제법 한참 같기도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밀리엄이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보았다. 일순 당황한 기색이 수려한 얼굴 위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 베로니카. 언제부터 거기에…….”

    “방금 왔어요. 방금.”

    기실 방금이라기엔 조금 긴 시간이었지만, 이 정도 립서비스는 매너의 영역이지.

    나는 좀 전까지 밀리엄이 짓고 있던 심란한 표정을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벤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찬바람에 쌩하니 흔들리는 뒤뜰의 낮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슬쩍 말을 꺼냈다.

    “어째 유혹이 좀 더디네요?”

    성심성의껏 해보겠다더니.

    나는 그렇게 첨언하며 밀리엄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남이 기껏 내키지 않는 화제를 농담 삼아 건넨 보람도 없이, 밀리엄은 조금 전보다도 훨씬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게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요.”

    “글쎄 그놈의 자격 같은 건 대체 누가 정해주는 거냐니까요…….”

    이 양반 저번에도 그러더니 자격 따지는 거 되게 좋아하네.

    황당한 심정으로 고개를 설설 내저으며 눈을 굴리고 있는데, 별안간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분명 담담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한 목소리였다.

    “나도 진실을 묻은 적이 있어요. 베로니카.”

    느닷없는 고해성사에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옆으로 고개를 돌려 밀리엄을 보았다.

    여전히 두 손을 모아 무릎 사이로 깍지를 끼고 있는 밀리엄의 시선은 싸늘한 허공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공백을 뚫고 과거로 향하는 시선과, 간간이 낙엽이 하나 두 개씩 흩날릴 뿐인 텅 빈 공간.

    아무것도 없는 그 허공을 통해 밀리엄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그가 묻었다는 진실이 무엇인지만큼이나 자명해서 가슴 한구석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밀리엄은 지금 <레드 헤링>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임스 로웰이 아홉 명의 악질범죄자를 살해하고, 그 혐의가 에드워드 녹스를 향하도록 만든 뒤, 밀리엄에게 잔인한 선택을 종용했던 사건.

    이곳에서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레이스톤 섬 사건’이라고 불러야 할 바로 그때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제야 나는 밀리엄이 죽은 수사관들의 비리자료가 발견된 이후부터 줄곧 저기압이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죽은 수사관들의 공통분모에서 2년 전 자신이 했던 선택을 떠올리고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가 진실을 묻었기 때문이라면, 기실 나도 이렇게 숨 쉬고 있을 자격은 없는 셈이죠.”

    “그런 말이 어딨어. 그 사람들이랑 밀리엄이 어떻게 같아요?”

    나는 일순 치밀어오른 불만을 참지 못하고 대뜸 언성을 높였다.

    기껏해야 게임캐릭터일 뿐인 상대가 땅을 파든 우물을 파든 내가 열 낼 일이 아니라는 이성적 판단 따위는 어처구니와 함께 저만치 도망가버린 채였다.

    아니, 가져다 대려면 좀 그럴듯한 걸 가져다 대든가 해야지 이건 무슨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람……?

    “사실이 그런 걸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과거에 아주 옳지 못한 선택을 했습니다. 당신이 편을 들어줄 만한 인간이 못 돼요.”

    [ 과제 008. 밀리엄 켄트우드의 잠자는 개 달성! (보상 : 회중시계 1개) ]

    “밀리엄.”

    잠자는 개고 나발이고…….

    회중시계씩이나 주는 걸 보아하니 밀리엄의 과거 고백을 듣는 것이 퍽 중요한 이벤트이긴 했던 모양이지만 지금 내게는 반짝 떠올랐다 사라진 시스템창보다 눈앞의 자기혐오자가 중요했다.

    아니, 감히 누구 맘대로 내 애정캐의 삶과 선택을 폄하한단 말인가?

    나는 당장이라도 밀리엄의 어깨나 멱살을 부여잡고 짤짤 흔들며 정신 차리라고 외치고픈 마음을 꾹 참아누른 채,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거창한 신념 같은 거 없고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만 아니까, 이유가 뭐였든 당신 편을 들 수밖에 없어요.”

    거창한 신념을 가진 쪽은 당신이지.

    그리고 나는 그 신념이 당신에게 안겨준 삶과 고뇌의 서사를 좋아했다.

    그 애정은 어쩌면 선망과 조금 닮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몇 번 꺾이더라도 뿌리가 뽑히는 일 따위는 없이, 한사코 정의와 진실의 가치를 긍정하는 신념.

    그런 건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2년 전의 기억이 당신에게 어떤 상흔으로 남았는지, 그때의 일로 당신이 얼마나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었든 간에.

    당신의 노력과 좌절과 선택을 알고 그것에 매료되었던 나에게 당신의 아군이 되지 않는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그에게 전할 길은 없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중 그럴듯하게 들리는 설득으로 할 말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늘 옳은 선택만 하면서 산다고 그래요? 엄한 사람한테 민폐 안 끼쳤으면 된 거예요.”

    “내가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확신합니까?”

    “그야 당…….”

    그야 당연히 알죠, 하는 말이 멋대로 튀어 나가려는 것을 막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어쩌면 그보다 더 깊숙이 묻어놓았던 ‘밀리엄 켄트우드’에 대한 내 확신을 입에 담았다.

    “……당신은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선택 따위, 죽어도 하지 못할 것 같거든요.”

    우습게도 나는 그 말을 건넨 뒤에야 다시 밀리엄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간 시선이 마주한 것은, 진작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한 밀리엄의 금빛 눈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허공이 아닌 나를 향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시선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노을을 머금고 더욱 진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갑작스레 마주친 시선으로부터 이어진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에 당황한 나는 무어라 더 말을 이어가지 못한 채 그저 밀리엄의 표정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화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아까 전까지의 심란한 기색은 다행히 많이 사라진 것 같은데도, 으레 그래왔듯 곧장 능청스러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어딘지 모르게 진중한 얼굴을 한 채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베로니카.”

    그의 입에서 베로니카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어조였는데,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그가 입에 담은 것이 내 진짜 이름이었으면 좋았겠다는 미친 생각을 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베로니카의 이름을 부른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점점 내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 손을 피하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그저 반쯤 깨어서 꿈을 꾸는 기분으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온 손이 기어이 내 뺨에 닿는가 싶었던 바로 그 순간.

    “선배님! 남작님!”

    등 뒤에서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밀리엄은 급히 손을 거두고 입가로 가져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괜히 그의 손이 닿을 뻔했던 뺨을 긁적이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벤치를 향해 빠르게 달려온 이는 예상대로 멜리사 위브였다.

    며칠간 퍽 고생을 했을 텐데도, 그녀는 안색이 조금 좋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평소처럼 활달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웃으며 감사인사를 건넸다.

    “두 분이 제 결백을 밝혀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시작된 멜리사의 감사인사는, 무슨 이유에선지 조금 탐탁잖은 얼굴로 그녀를 보던 밀리엄이 이내 그쯤 해두라며 손을 내저을 때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멜리사가 인사를 멈춘 뒤에야 그녀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고생 많으셨죠, 수사관님.”

    “에이, 고생은요. 그냥 복장 좀 터지고 몸이 근질거린 정도인데요, 뭘.”

    말은 저렇게 해도, 동료라 믿었던 이들의 필요에 의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 인생을 종칠 뻔한 일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나는 멜리사 위브의 수사관 생활과 왕립수사국 자체가 앞으로 어떤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를 잠시 생각했다.

    어떤 변화가 이뤄지든, 엉망진창이었던 지금까지보다는 나은 쪽으로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내 딴에는 제법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멜리사와 덕담을 주고받고 있는데, 별안간 나와 멜리사 사이로 은근슬쩍 끼어든 밀리엄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수잔 로이드와 관련해 우리와 상의하고 싶다는 수상한 정황은 뭐지?”

    아니, 방금까지 갇혀 있다 풀려난 사람에게 너무 단도직입적인 것 아닌가.

    그러나 멜리사는 야속해하는 기색 따위 없이 외려 익숙하다는 듯 ‘아 참!’하고 손뼉을 쳤다.

    “그게 실은 서류를 보면서 말씀드리려던 건데, 그냥 지금 미리 전해드리는 게 좋겠네요. 서류는 올라가서 보시는 걸로 하고요.”

    “저희가 봐야 할 서류가 있나요?”

    “네. 자살한 수잔 로이드의 입양증명서에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요.”

    “……수잔 로이드가 입양아였나?”

    “그랬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입양되기 전 지내던 보육원이 윌 그렉슨 씨가 오랫동안 후원하던 곳이더라고요.”

    보육원?

    확실히, 로즈 그렉슨이 남편의 결백을 주장하며 보육원 후원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이 하필 수잔 로이드가 있던 곳이라면, 그녀가 끝까지 침묵한 범행동기는 보육원 시절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또 다른 누군가가 보육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남작님의 어머님께서는 엘모어 보육원에서 가장 영특한 아이였지요.’

    이윽고 떠오른 것은 아스톤 홀에서의 자선파티에서 홀터스 병원장이 했던 말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급히 멜리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저, 위브 수사관님. 그 보육원이 혹시 엘모어 보육원 아닌가요?”

    “어, 어떻게 아셨…….”

    당황해 말을 끝맺지 못하는 멜리사의 목소리가 페이드아웃되는 배경음악처럼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놀란 마음에 벤치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다시 주저앉은 나는 이마를 짚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평소보다 진하고 커다랗게 떠오른 시스템 문구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 과제 009. ]

    1막 종료 달성! (보상 : 새로운 총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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