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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65화 (65/121)
  • 65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16)

    절대 왼손잡이일 수 없는 카일리 돌턴이 퍽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왼손이 없는 손목을 흔들었다.

    “해외취재를 나갔다가 얻은 영광의 상처랍니다.”

    “아, 그, 죄송해요. 궁금하거나 신기해서 쳐다본 건 아니었는데…….”

    “저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왜 보셨는지는 좀 궁금하네요. 혹시 절 찾아오신 이유와 관련이 있을까요?”

    카일리 돌턴의 제법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여전히 이해는 안 가지만 아무튼 알았다는 듯 호의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가, 일순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이 좀 있어서요.”

    “기다릴 테니 천천히 다녀오시죠.”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로저. 여기 두 분 좀 안쪽으로 안내해드려. 나는 앤서니 이 자식한테 가서 한마디 좀 하고 와야…… 엇.”

    남자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던 카일리 돌턴이 들고 있던 종이를 놓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종이가 떨어진 곳이 마침 내 발치였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종이를 집어 들었다.

    [ ‘글씨가 가득 적힌 종이’를 획득했다. ]

    종이 위로 빼곡하게 적혀 있는 손글씨에 절로 눈이 향하는 와중, 로저라 불린 남자와 카일리 돌턴이 나누는 이야기가 배경처럼 귓가로 흘러들었다.

    “롭 씨한테 한마디 하러 가신다고요?”

    “어. 아니, 갑자기 공동취재를 하고 싶다느니 하면서 남의 출국 일정까지 취소시켜 놓고는 초안이랍시고 가져온 게 저따위면 나더러 뭘 어쩌라는….”

    종이 위의 글자들을 보며 혼란에 사로잡혔던 나는 귓속으로 들려온 ‘저따위’라는 말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나는 그대로 종이를 들고 일어나 카일리 돌턴을 향해 달려들 듯 걸어갔다.

    그러고는 방금 주운 종이를 들어 보이며 황급히 그녀를 불렀다.

    “저, 돌턴 양!”

    “네, 네?”

    “이걸 쓴 사람이 혹시 앤서니 롭 씨인가요?”

    카일리 돌턴은 당황한 얼굴로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기 무섭게 뒤쪽에 서 있던 밀리엄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종이를 카일리에게 돌려주는 대신, 글씨가 적힌 면을 내 쪽으로 향하게 들고 다시 한번 글자들을 꼼꼼히 살폈다.

    “이건…….”

    당혹감에 젖은 밀리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종이 위를 채우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출입 대장에서, 그리고 프랭크 딜린저에게 배달된 신문지에서 확인한 바 있는 바로 그 필체였다.

    한참을 나와 함께 종이를 들여다보던 밀리엄이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멀뚱히 우리를 보고 있는 카일리 돌턴에게 별안간 질문을 던졌다.

    “돌턴 양. 혹시 왕립수사국 사건이 발생하기 전날 수사국에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질문을 받은 카일리 돌턴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아니요. 최근에는 수사국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데요.”

    “방금 출국 일정을 취소하셨다고 했는데, 예정대로라면 출발이 언제였을지 알 수 있을까요?”

    “오늘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었다가 어제 취소했습니다만 그건 왜…….”

    “죄송합니다만 돌턴 양. 앤서니 롭 씨에게 한마디 하시는 일은 조금 뒤로 미뤄주시지 않겠습니까?”

    “……예?”

    “아무래도 저희가 만나야 할 상대를 착각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밀리엄의 서늘한 시선이 다시 한번 종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

    카일리 돌턴의 안내를 받아 앤서니 롭이 있는 방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아침에 보았던 기사의 내용을 뒤늦게나마 되새겼다.

    기사에는 분명 피해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였다고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밀리엄이 도달했고, 어쩌면 다른 수사관들이 알고도 침묵했을 정황일 뿐 아직 대외적으로 밝혀진 사실이 아니다.

    물론 어제 앤서니 롭을 찾아간 해리엇 블레어가 거기까지 언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 밖에 다른 이야기는 정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말을 믿는다고 한다면, 앤서니 롭은 과연 왕립수사국에서 일어난 참극이 어느 개인의 학살이 아닌 피해자들 간의 살육전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사건 전날 수사국을 방문해놓고 정작 출입 대장에는 남의 이름을 도용해 쓴 사람.

    플레밍턴 타임즈의 신문을 신문 배달부보다 먼저 입수해 프랭크 딜린저의 집 앞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던 사람…….

    나는 오늘 아침 기사를 읽은 순간부터 느꼈어야 할 위화감의 뒤늦은 방문 앞에 자괴감을 맛보며 이를 악물고 눈앞의 닫힌 문을 쏘아보았다.

    밀리엄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야기들 나누시라며 슬쩍 뒤로 빠지는 카일리 돌턴을 뒤로한 채 밀리엄이 문을 벌컥 열었고, 그렇게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쿵.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창밖을 보며 왼손에 든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앤서니 롭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성 조나단 병원 사건에서 이미 만난 바 있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돌연 들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캠벨 남작님과 켄트우드 씨이시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게 무슨 용건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찾아와달라는 듯이 부러 온갖 곳에 빵조각들을 뿌려두고는 지금에 와서 모르겠다는 말로 시간을 끌 이유가 있습니까?”

    밀리엄이 날카롭게 말하자, 앤서니 롭이 들고 있던 찻잔을 책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나는 기묘하게도 그 순간 앤서니 롭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빵조각이라는 말을 들으니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수사국 안에서 살육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밝혀봐야 제삼자가 범인일 가능성을 시사해 본인을 용의선상에 올리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수사국에 출입할 때 카일리 돌턴을 사칭해 알리바이를 확보했다곤 하지만 그런 것치곤 필체에서부터 자신을 숨길 의사가 없었고, 무엇보다.

    “알리바이 확보를 위해 오늘이면 국외로 떠날 카일리 돌턴 양의 이름을 빌려 써놓고 어제 급하게 그녀의 출국을 막은 이유는 뭐죠?”

    내 질문을 들은 앤서니 롭이 마침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기를.

    “저는 또다시 거짓이 승리하는 꼴을 보자고 그들을 심판한 게 아니라서요.”

    ***

    카일리 돌턴은 애석하게도 앤서니 롭에게 ‘한소리를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밀리엄의 연통을 받고 온 수사관들이 곧장 그를 체포해 간 탓이었다.

    물증이라곤 없이 오직 심증뿐인 상황이었지만, 앤서니 롭은 자신의 범행을 부정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나와 밀리엄 앞에서 그러했듯이, 앤서니 롭은 출동한 수사관들 앞에서도, 그렇게 체포되어 도착한 수사국에서도 정말로 담담하게 범행을 인정했다.

    너무 담담한 나머지 일견 당당하게까지 보이는 태도였다.

    ……아니, 어쩌면 진심으로 당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취조실에 들어선 나는 정말이지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의 앤서니 롭과 마주 앉은 채, 그가 범행을 인정하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은 또다시 거짓이 승리하는 꼴을 보자고 그들을 심판한 게 아니라는 말.

    그것은 해석하자면 멜리사 위브가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뜻으로 들렸다.

    앤서니 롭은 그를 취조하러 들어온 다른 수사관들 앞에서 그저 범행사실을 인정만 했을 뿐, 다른 어떤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듣기로는 한참을 그렇게 침묵하다가, 자기에게 질문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캠벨 남작님과 밀리엄 켄트우드 씨뿐이라고 했다나.

    수사에 협조했을 뿐 절대로 수사관은 아닌 내가 취조실에 와 이렇게 그와 독대하게 된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솔직히 이런 자리엔 나보다 밀리엄이 오는 게 적합했겠으나, 그는 어쩐 이유에선지 ‘당신이 가줬으면 좋겠다’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밀리엄에게서 그가 앤서니 롭과의 독대를 꺼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피해자들의 비리증거를 발견한 이후부터 유난히 심각하고 심란해 보였더랬지…….

    나는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히 이거다 싶은 답은 나오지 않는 고민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다가, 일단은 눈앞의 앤서니 롭에게 집중하는 쪽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윽고 시작된 취조는 그리 어렵지 않게 흘러갔다.

    당연한 소리지만, 나에게 범죄자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 따위가 존재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취조가 매끄럽게 이어진 것은 굳이 말하자면 앤서니 롭이 아주 협조적인 피의자인 덕택이었다.

    기실 내가 한 일이라곤 수사관들이 정리해 건네준 질문들을 앵무새처럼 따라 읽는 것뿐이었는데, 앤서니 롭은 언제 침묵을 고수했냐는 듯 질문 하나하나에 성실하게 답변했다.

    진술에 따르면 그가 카일리 돌턴의 출국을 막고 기사를 통해 살육전을 언급한 것은, 예상대로 멜리사가 누명을 쓴 채 사건이 종결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부분은 제 실수였으니 제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추가로 야근을 하는 수사관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저도 참 신중하지 못했죠.”

    그 말을 하며 앤서니 롭은 ‘무책임하고 부패한 수사관들’이라는 표현을 덧붙이며 내 등 뒤의 문을 노려보았다.

    마치 내가 아니라, 문 뒤에서 취조 내용을 듣고 있을 수사관들에게 직접 전하고 싶은 것처럼.

    그런 앤서니 롭의 태도 앞에서 나는 잠시 수사관들에게 받은 질문지를 접고 그를 똑바로 직시한 채,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만약 우리가 끝까지 당신이 범인이라는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자수를 할 생각이었나요?”

    “아니요. 그때는 아마 이번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들이 하나씩 죽어 나갔을 겁니다.”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섬뜩한 말을 내뱉는 남자를 보며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꺼냈다.

    “롭 씨의 표현법을 빌리자면, ‘뻔히 보이는 거짓’을 택하려 한 죄로요?”

    “바로 그렇지요.”

    “그러지 못해서 아쉬우신가요?”

    “조금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후회는 없습니다. 남작님과 켄트우드 씨 덕에 어쨌든 저는 이곳에 있고…….”

    앤서니 롭이 돌연 눈꼬리를 휘며 조금 전보다 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소름이 끼쳐 서늘해진 팔뚝을 매만지는 한편으로, 천천히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진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것을 난도질하고 생매장해온 거짓의 사도들에게 합당한 심판을 내릴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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