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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64화 (64/121)
  • 64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15)

    기사를 확인한 나와 밀리엄은 식사라도 마치고 가시라는 집사님의 외침을 뒤로한 채 곧장 수사국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수사국은 어제와 다른 의미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대부분은 분노한 상태였다.

    “그런 더러운 짓을 잘도 뻔뻔하게 저질러놓고 마지막까지 이게 무슨 민폐냔 말이야?”

    피해자들이 쌓아 올린 실적과 그들의 빠른 출세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리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고 분노한 이가 있는가 하면.

    “그래서 이 정도 문제를 독단으로 언론에 제보한 얼간이가 대체 누구냐고!”

    조직의 치명적 약점을 멋대로 언론에 폭로해버린 내부고발자의 존재에 분노한 이도 있었다.

    어느 쪽의 분노도 그리 정당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분노가 훨씬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분노하는 이들 또한 결국에는 이번 사건을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위기감에 불쌍한 동료의 인생을 제물 삼으려 했던 치들이었으므로.

    어쨌든 오늘 터진 특종 덕에 왕립수사국의 체면과 위상과 신뢰도는 완벽하게 곤두박질친 상황.

    이건 이제 이번 사건의 조속한 해결 따위로 수습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든, 혹은 아예 해결되지 못하든 간에 왕립수사국과 수사관들은 쏟아지는 사회적 질타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르게 생각하면, 수사국 입장에서 굳이 졸속으로 이번 사건을 종결시켜야 할 당위성이 사라진 것이기도 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수사를 이행하지 않으면 정체불명의 내부고발자에 의해 그러한 사실까지 추가로 폭로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비리증거의 유출 자체는 몹시 당혹스러운 일이었으나 그 결말이 이런 형태라면 그럭저럭 긍정적이라 할 법 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땅에 떨어지다 못해 맨틀까지 처박혀버린 옛 직장의 위상 앞에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밀리엄의 속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습니까?”

    그래도 저렇게 묻는 것을 보면 이 상황에 긍정적인 면모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착잡한 한숨과 함께 질문을 건네는 밀리엄을 한번.

    “두 분께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밀리엄보다 훨씬 착잡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해리엇 블레어를 한번 보았다.

    그렇게 번갈아 움직인 시선은 이윽고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돈된 상태로 언제 사라졌었냐는 듯 돌아와 있는 피해자들의 비리 증거자료에 가닿았다.

    방 바깥의 수사관들은 내부고발자가 누구인지를 두고 열띤 갑론을박을 펼쳐대고 있었으나, 기실 나나 밀리엄에게 있어 고발자의 정체란 고민해볼 필요도 없이 자명한 것이었다.

    우리는 프랭크 딜린저를 만나러 가기 전 해리엇에게 자료를 넘기며, 담당수사관 중 가장 믿을 만한 이에게 이를 보고해달라고 부탁했다.

    “두 분이 딜린저 씨를 만나러 가신 직후에 상황이 급변해서… 위브 수사관님이 범인으로 몰리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어요.”

    그러나 사건종결이 기정사실처럼 굳어버린 수사국 안에 해리엇 블레어가 믿을 만한 수사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문제의 자료를 들고 앤서니 롭을 찾아간 그녀의 선택을 어떻게 그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소 치기 어리고 섣불렀을 수는 있겠으나, 내가 그녀였더라도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내지는 못했을 터.

    그러니까 나는 해리엇 블레어를 이해했다.

    이번 사건이 터진 이후 왕립수사국 내부 사정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실망하고 분노한 구석이 이만저만 있었던 게 아닌 터라,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속이 시원한 건 시원한 거고, 해리엇 블레어의 과감한 선택이 앞으로의 수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두고 봐야 알 일.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제의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블레어 수사관님, 나중을 위해 노파심에 잔소리를 좀 하겠는데 이번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밀리엄은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기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공보과에 일임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밀리엄의 충고를 듣던 해리엇은 ‘그래도 다른 이야기는 전부 빼고 딱 피해 수사관들의 비리 정황과 근거만을 제보하고 왔다’는 나름의 자기변호를 했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지난 사건들에 대한 정보였으니까요. 그 밖에 다른 이야기는 정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믿으셔도 된다며 반짝이는 해리엇의 눈빛을 어색하게 외면한 밀리엄의 시선이 일순 내게로 향했다.

    나는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무어라 말하려는 것처럼 반쯤 입을 열었다가 이내 꾹 다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좀 궁금하긴 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요 며칠, 특히 피해자들의 공통분모가 발견된 어제부터 밀리엄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저런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이지.

    단순한 결론을 내린 나는 어쩌다 보니 착 가라앉아버린 분위기도 적당히 환기할 겸, 가볍게 짝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자, 이왕 일도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일단 어제 얘기했던 대로 플레밍턴 타임즈에 다녀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밀리엄 생각은 어때요?”

    확실히 그러는 게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온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

    플레밍턴 타임즈의 본사 건물은 외곽지대에 있는 왕립수사국에서 마차로 제법 떨어진 시내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여느 때처럼 밀리엄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나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층 건물들 틈에서 플레밍턴 타임즈의 이름이 붙은 창문을 어렵지 않게 발견해냈다.

    플레밍턴 타임즈는 과연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신문사답게 4층짜리 커다란 벽돌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무사히 내린 뒤에도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그대로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밀리엄을 따라가며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관찰했다.

    손을 잡은 힘은 내가 빼내고자 마음만 먹으면 딱히 힘을 줄 필요도 없이 빼낼 수 있을 것처럼 부드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기이하게도 이 순간 밀리엄이 행여 내가 손을 빼내진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근거라곤 없는 생각이었지만 크고 따스한 손에 반쯤 감싸진 느낌이 딱히 싫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굳이 손을 빼내는 대신 그대로 그의 손을 잡은 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들어선 신문사 안은 한창 혼란스러웠던 때의 수사국 건물 이상으로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러 대의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총소리 같았다.

    손에 든 종이를 공중에 던지거나 책상을 쾅쾅 치며 고함을 쳐대는 이도 있었고, 언성을 올리며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구겨진 종이가 가득한 책상 앞에 앉아 또 다른 종이를 구기며 머리를 쥐어뜯는 이도 보였다.

    어찌 보면 살벌하기까지 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 누군가 우리를 향해 걸어와 말을 걸었다.

    나흘 정도 밤을 새웠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젊은 남자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왕립수사국에서 나왔습니다.”

    “아하… 롭 씨를 만나러 오신 모양이군요…….”

    남자는 ‘기어이…….’라고 중얼거리며 넋 나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우리를 왕립수사국에서 앤서니 롭에게 항의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롭 씨도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카일리 돌턴 양을 먼저 만나야 할 것 같군요.”

    “어, 사건과 관련해서 말씀이십니까?”

    “예.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그냥 조금 의외여서요. 운이 좋으신 것 같기도 하고.”

    남자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야 이번 사건과 관련해 수사관이 만나러 온 기자가 있다면 당연히 앤서니 롭이라고 생각할 테니 의외일 수는 있겠지만, 운이 좋다는 건 무슨 뜻이지?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돌턴 양! 손님이 오셨습니다!”

    나는 여전히 반쯤 생각에 잠긴 채, 남자가 손을 흔드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큰 갈색 머리의 여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반응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녀가 바로 몇 발자국 앞까지 다가오고 난 뒤의 일이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러나 몇 번을 깜빡여보고 눈을 비볐다 다시 뜨기까지 해보아도 눈앞의 광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밀리엄의 눈은 무언가 심히 미심쩍은 것을 보듯 가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 이유가 내 당혹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올 사람이 없는데… 저를 찾으셨다고요?”

    “아, 네…….”

    나는 아마도요, 라고 덧붙이고 싶은 심정을 꾹 억누르며 말끝을 흐렸다.

    바로 앞에 와서 멈춰 선 카일리 돌턴은 종이를 든 오른손으로 자기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와 밀리엄을 번갈아 보았다.

    “수사국에서 나오셨답니다. 사건 관련해서 볼일이 있으시다는데요.”

    “……나한테?”

    카일리 돌턴은 불쾌하다기보단 정말 뜬금이 없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남자를 향해 물었다.

    나나 밀리엄이 무어라 설명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물론 밀리엄조차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시선을 막지 못란 채, 카일리 돌턴의 왼쪽 팔 끝을 한참 동안 멍하니 응시했다.

    당연하다는 듯 염두에 두고 있던 사실들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오른쪽으로 번져 있던 출입대장 속 ‘카일리 돌턴’의 글씨. 그래서 그녀가 당연히 왼손잡이라 추측했던 것…….

    나는 카일리 돌턴의 왼쪽 소매 끝에서 차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왼손이 나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녀가 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소매를 걷어 보였다.

    카일리 돌턴에겐 왼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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