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63화 (63/121)

63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14)

“수사를 종결하다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남작님. 담당수사관의 과반수 이상이 수사를 종결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어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어서도 아니고 그냥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란 소린가요? 사건 수사란 게 단지 여럿이 끝내길 바란다는 이유로 끝날 수도 있는 것이었다니 제 상식으로는 도통 이해가 가질 않네요.”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걸 이해해주셨으면….”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게 설마 플레밍턴 타임즈에 실린 앤서니 롭의 비판 기사인가?”

날 선 목소리의 밀리엄이 직구를 던지자 딜런 와이즈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백 마디 말보다 효과적인 긍정이었다.

요컨대 이곳의 양아치들은 정말이지 나약하게도 앤서니 롭의 비판 기사로 수사국의 체면이 시시각각 반 토막 나는 수치를 더 감내하지 못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도달한 결론이 아무래도 진실이나 정의 따위와는 이역만리 정도 떨어져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가 가장 피하고자 했던 형태일 것 같다는 데 있었다.

“멜리사 위브 수사관님을 기어이 범인으로 만들 심산이세요?”

“‘만들 심산’이라니 말씀이 다소 과하십니다, 남작님. 위브 수사관은 정황상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용의자인 걸요.”

“그게 증거도 없이 범인으로 몰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죠.”

“그렇다면 남작님께선 위브 수사관이 결백하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으십니까?”

맙소사, 이 동네엔 무죄 추정의 원칙이고 나발이고 없단 말인가?

딜런 와이즈는 저희라고 멜리사 위브가 범인이라는 증거 따윈 없는 주제에 대뜸 우리에게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있었다.

이건 뭐 배 째라는 것도 아니고…….

너무 황당한 나머지 입만 반쯤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나 대신 밀리엄이 다시금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해리엇 블레어 수습수사관은 어디 있지? 그녀가 우리 쪽의 수사 진행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던가?”

“글쎄,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군. 외부인이 범인일 수 있다는 그 근거 없는 가설에 대해서라면 전해 들었지만.”

“출입구가 밤새 모조리 봉쇄되어 있었는데도 멜리사 위브가 범인이라는 헛소리에 비하면야 훨씬 타당한 가설일 텐데?”

“밀리엄 켄트우드. 돌아가는 사정을 빤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홀로 고고하게 구는 그 치졸한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지?”

급기야는 인신공격이 이어졌다.

말하자면 이 상황에 왕립수사국이 우선해야 할 것은 진실보다 체면이라는 원칙을 너라고 모르지 않을 텐데 왜 홀로 올곧은 척 나대느냐는 소리.

딜런 와이즈는 애초에 논리적으로 합의점을 찾을 생각 따윈 손톱만큼도 없었다는 듯, 혹은 이런 순간을 몹시 기다려왔던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는 밀리엄의 이의제기가 물정을 외면한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양 고개를 설설 내젓기까지 했다.

아니, 억지는 자기가 부리고 있으면서 왜 엄한 밀리엄을 한심한 종자로 몰아가지? 돌았나?

그러나 과반수가 수사 종결에 동의했다는 말마따나, 작금 우리 주변에는 딜런 와이즈에게 반기를 들고 밀리엄을 두둔할 위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난리가 난 마당에 해리엇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기실 그녀가 있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도 없기야 하겠지만, 상대에게서 대화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라 아군 하나하나가 간절했다.

그래, 아군.

나는 중앙계단 위쪽에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드레이크 부국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수사 종결을 최종으로 승인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딜런 와이즈와 밀리엄의 실랑이를 관망하듯 지켜보는 시선은 누가 보아도 아군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타계할 방법이 정녕 없단 말인가?

이런 류의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죽었을 때뿐 아니라 주어진 퀘스트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또한 배드엔딩이 날 수 있을 텐데.

또다시 나도 모르는 시점에 배드엔딩 루트를 타버리고 만 것일까?

그러나 정말이지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오늘 우리가 잠시 수사국 돌아가는 사정을 등한시한 채 바깥으로 나돈 것은 맞지만, 그 덕에 시스템창이 반응하는 단서를 얻어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중도에 선택을 그르쳤을 만한 지점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딜런 와이즈나 랄프 드레이크의 멱살이라도 휘어잡아 흔들어대고 싶은 심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의 뚜벅이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상식적으로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혹시 해리엇인가 싶어 몸을 돌린 방향에는, 수사국 제복을 입었으나 낯선 얼굴을 한 중년의 여자가 서 있었다.

난데없는 새 인물의 등장에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다음 순간 고맙게도 밀리엄이 그녀를 향해 당황한 목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데이 부국장님?”

“오랜만이라는 인사부터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닌 모양이군. 켄트우드.”

[ 인물정보 ‘일라나 데이’ 획득 ]

일라나 데이라면 테오도어 와이엇과 대판 싸우고 부국장 자리에서 떨려나 정직까지 먹었다는 그 사람 아닌가?

나는 밀리엄을 보며 인자하게 눈꼬리를 휘는 와중에도 예리한 눈빛을 잃지 않는 일라나 데이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가 밀리엄에게 보내고 있는 것은 날카롭지만 분명 호의적인 시선이었다.

좀 전까지 사방팔방으로 날을 세우고 있던 밀리엄 또한 그녀를 발견하고는 눈에 띄게 누그러진 기세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분위기를 가늠하던 어느 순간에, 나는 이 대목이 배드엔딩 루트가 아닐 것이란 확신을 얻었다.

아군. 일라나 데이에게서는 명백한 아군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데이. 여긴 웬일입니까?”

계단 위의 랄프 드레이크가 당혹에 찬 질문을 던지자, 일라나 데이가 외려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이런, 부국장님. 미리 연락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연락이라니…….”

“폐하께서 이번 사건에 대해 염려가 크셨는지 제게 따로 연통을 주셨습니다. 인력 하나하나가 아쉬울 상황일 테니 칙령으로 징계 효력을 잠시 중지해 주시겠다고요.”

일라나 데이가 손에 들린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단에 큼지막하고 화려한 붉은 인장만으로도 적혀 있을 내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녀의 등장 탓인지, 조금 전까지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던 몇몇 수사관들이 점차 이쪽을 향해 걸어 나왔다.

그들의 걸음에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딜런 와이즈의 표정을 본 나는 상황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딴에 조직이라고 여기도 파벌 다툼이니 줄타기 따위가 있고, 지금 앞으로 나서고 있는 이들은 아마 일라나 데이의 파벌에 속해 있던 수사관들일 것이다.

“한데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폐하의 칙령을 받아 막 복귀한 입장인 터라, 수사가 이미 종결되었다면 그 정황을 최대한 자세히 폐하께 보고드릴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데이 수사관,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따로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있을까요? 부국장님의 결론이라면 이미 여기 와이즈 수사관과 우리 옛 동료 켄트우드 씨의 대화를 통해 충분히 전달받은 듯합니다만. 저는 이대로 돌아가 폐하께….”

“아니, 아닙니다! 그저 그런 의견이 있을 뿐 아직 확정된 바는 없어요.”

“아, 그렇습니까?”

일라나 데이가 밀리엄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신호를 확인한 밀리엄은 목을 까딱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곧장 일라나 데이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보아하니 켄트우드 씨에게는 수사를 여기서 종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 모양이고, 나도 무언가 힘을 보태고 돌아가야 폐하께 면이 설 것 같으니… 다급히 굴 게 아니라 하루 이틀 정도라도 더 시간을 주시는 게 어떨는지요?”

유수처럼 말을 이어가는 일라나 데이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다시금 계단 위의 랄프 드레이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이어질 말을 예측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

결과적으로 우리는 수사 종결까지 이틀의 말미를 더 얻을 수 있었다.

애당초 멜리사 위브를 범인으로 만드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억지였음을 고려하면 그조차 결코 타당하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기는 했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향후 이틀간은 절대 수사를 종결하지 않겠다는 랄프 드레이크의 확답을 얻은 뒤.

밀리엄은 사건에 대해, 그리고 어쩌면 이 사건을 둘러싼 수사국 내부의 부조리에 대해 일라나 데이와 이야기를 나누러 그녀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그사이 나는 해리엇 블레어를 찾기 위해, 오늘 오전까지 나와 밀리엄이 썼던 구석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해리엇이 아니라, 온갖 서류들이 사정없이 어질러져 있는 책상과 의자 세 개뿐이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는 풍경이었다.

나는 아까 전 프랭크 딜린저의 집으로 향하기에 앞서, 국장실에서 발견한 피해자들의 비리증거를 이 방에 가져와 하나씩 확인했던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밀리엄이 일라나 데이에게 사건에 대해 효과적으로 설명하자면 그 자료들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제의 자료들을 찾을 심산으로 책상 위의 서류들을 살폈다.

다음 순간 찾아든 것은 난데없는 당혹감이었다.

책상 위를 아무리 뒤져봐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피해자들의 비리증거들은 단 한 장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곧장 밀리엄에게 달려가 이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전했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을 몽땅 할애해 수사국 곳곳을 뒤졌으나, 사라진 자료는 보이지 않았고 해리엇 블레어 또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빈손으로 귀가한 뒤 다시 맞이한 아침.

어김없이 식사 자리로 전달된 플레밍턴 타임즈의 1면에서 나와 밀리엄은 전날과 또 다른 내용의 수사국 비판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밤새 죽고 죽이는 참극을 벌인 이번 사건의 이른바 ‘피해자’들이 과거에 저지른 비리 수사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기사.

역시나 앤서니 롭이 작성한 바로 그 기사에서 제시된 근거가 전날 사라진 비리 증거자료라는 사실은, 솔직히 말해 전혀 놀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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