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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60화 (60/121)
  • 60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11)

    탁상용 달력 하나 없이 휑한 책상 위를 잠시 내려다보던 나와 밀리엄은 뒤이어 책상에 딸린 서랍 여섯 개를 하나씩 열어보았다.

    다행히 잠긴 서랍은 하나도 없었지만, 애석하고 기이하게도 모든 서랍이 비워져 있었다.

    “저기, 밀리엄. 수사국장이란 게 원래 좀 한가한 자리인가요……?”

    “그럴 리가요. 현장에서 뛰지 않을 뿐이지 누구보다 바쁜 위치인 걸요. …물론 이래서야 내 말이 썩 신빙성 있는 소리로 들리진 않겠습니다만.”

    밀리엄이 텅 빈 마지막 서랍을 들여다보며 본인도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바빠서 늘 홀로 두어야 했는데 이번 생일엔 함께 해줄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바빠서 아픈 아들 생일도 함께 해주지 못했다던 사람의 책상이라고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이…….

    “엇.”

    순간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 한 줄기에 내가 작은 탄성을 지르자, 밀리엄이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히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밀리엄, 밀리엄. 와이엇 국장님 아드님 생일이 언제인지 혹시 알아요?”

    밀리엄은 내 말을 듣자마자 질문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잠시 금고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기억을 되짚듯 눈을 굴리다가 금세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12월 31일일 겁니다.”

    나는 대답을 듣기 무섭게 금고를 향해 튀어나가 번호판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투박한 금속 버튼을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1을 누르고 2를 누른 다음 3을 누르고 다시 1.

    그러자 고맙게도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금고 문이 열렸다.

    밀리엄에게 테오도어 와이엇과 대화할 시간을 갖도록 한 게 아주 무용한 일만은 아니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만족스레 웃으며 밀리엄과 눈을 맞춘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문을 활짝 열어 금고 안을 살폈다.

    금고 안에는 웬 서류철들이 더미를 이룬 채 잔뜩 싸여 있었다.

    이게 혹시 에이미 키트너가 책장을 뒤져가며 찾던 물건일까?

    [ ‘수수께끼의 서류더미’를 발견했다. ]

    나는 서류철들을 한꺼번에 꺼내, 테오도어 와이엇의 휑한 책상 위에 턱 내려놓았다.

    서류더미 아래서 피어난 먼지가 깔끔했던 책상 위를 부유하기 시작했다.

    나는 간질거리는 코끝을 문지르며 제일 위에 있던 서류철을 들어올렸다. 그 다음 것은 밀리엄의 차지였다.

    왠지 사건번호 같은 것이 적혀 있을 듯했던 겉표지에는, 당혹스럽게도 내가 요 며칠 여러 번 전해 들어 아는 어떤 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알버트 브레너’

    이게 뭐지?

    고개가 절로 기울어지며 움직인 시선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밀리엄의 손에 들린 서류철로 향했다.

    표지에 적힌 클라라 웨이튼의 이름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서류철을 펼쳐 내용을 확인하고 있는 밀리엄을 뒤로한 채, 책상 위의 서류철 더미를 제일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세어보았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서류철은 총 아홉 개였다.

    내가 하나를, 밀리엄이 또 하나를 들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금고 안에 들어 있던 건 열한 개였던 셈…인데.

    바로 그때, 어떤 가능성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알버트 브레너의 이름이 적힌 파일을 내려놓은 뒤, 다른 파일들을 하나씩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테오도어 와이엇의 넓은 책상 위에 열 개의 파일들이 다 맞춰진 퍼즐처럼 주르륵 놓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손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내려다보며 내가 잠시 말을 잃고 서 있던 때였다.

    어느 틈에 책상 쪽으로 다가온 해리엇이 표지의 이름들을 보더니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나 대신 입을 열었다.

    “이건, 돌아가신 수사관님들의…….”

    그녀의 말대로였다. 각 서류철의 표지에는 테오도어 와이엇을 제외한 피해 수사관 열한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한껏 당황한 채 책상 위를 내려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밀리엄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손에 들린 파일의 내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조금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심각하고… 뭐라고 해야 할까, 약간은 사나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을 한 채였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려던 조금 전의 계획을 반쯤 잊고서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려한 얼굴에 어리는 서늘한 분노의 기색이 점점 짙어졌다.

    대체 무슨 내용이 들어 있길래 저러나 싶어 내가 다시 알버트 브레너의 이름이 적힌 서류철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밀리엄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철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덮혔다.

    나는 그렇게 덮은 파일을 한 손에 든 밀리엄의 다른 손이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밀리엄……?”

    “어떻게 이런,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씹어뱉듯 튀어나온 사나운 어조는 정말이지 그답지 않았고, 나는 그러한 사실에서 어떤 불안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밀리엄, 왜 그래요? 뭘 봤길래….”

    “증거입니다.”

    “무슨… 증거요?”

    “클라라 웨이튼 수사관이 ‘자정의 교살자’ 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미제로 종결시켰다는 증거.”

    다음 순간 밀리엄이 세상의 끝에 선 듯 허탈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등부터 떨어진 서류철이 바닥 위로 펼쳐지며 드러난 것은 몽타주로 추정되는 그림이었다.

    날카로우면서도 어딘지 음울해 보이는 인상. 그림 속의 남자는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 옆에 적힌 글자들은 그러한 기시감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붉고 긴 곱슬머리. 벽안.’

    확실했다. 그림 속의 남자는 에드워드 녹스였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허리를 숙여 파일을 주워 들려다가, 조금 전 밀리엄이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밀리엄은 이 파일 안에서, 클라라 웨이튼이 ‘자정의 교살자’ 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를 보았다고 했다.

    잠시 멍하니 허공에 멈춰 섰던 고개가 금세 아래로 떨어졌다.

    몽타주가 그려진 종이의 오른쪽 하단에 붉게 찍힌 도장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직사각형 모양의 붉은 상자 안에 ‘폐기’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나는 여전히 반쯤 멍한 기분으로 파일을 들어 올려 제일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책상 위의 다른 파일들을 열어보기 시작하는 밀리엄의 옆모습을 확인한 다음, 이내 한 줄 한 줄 꼼꼼하게 내용을 살펴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읽어 나갈수록 미간에 힘이 들어가고, 몸속의 피가 서늘하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밀리엄의 말대로였다.

    서류에 적힌 것은 클라라 웨이튼이 범인을 알고도 사건을 미제로 종결시켰다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범인을 아는 상태에서, 멀쩡한 증거를 은폐하고 없는 정황을 조작했다는’ 증거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밀리엄을 보았고, 때마침 밀리엄 또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펼쳐진 다른 파일을 짚고 있는 그의 손이 조금 전처럼 떨리고 있었다.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밀리엄이 시선을 내리깐 채 암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자명했다.

    테오도어 와이엇의 금고에서 발견된 이 서류들은 피해 수사관들의 비리증거였다.

    11월의 마지막 날, 이곳에서 죽은 열두 명의 피해자. 진실을 밝히고 수호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이들.

    사실은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거짓 신의 사도들’이었던 것이다.

    ***

    두 가지 사실이 확실해졌다.

    첫째는 피해자들이 전부 중대비리를 저질러 진실을 은폐한 이들이었다는 점.

    둘째는 그러한 증거들이 담긴 치부책을 테오도어 와이엇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몇 가지 정황이 희미하게나마 제 윤곽을 찾았다.

    사건이 일어나던 날, 테오도어 와이엇과 열한 명의 비리수사관은 마치 짠 것처럼 다 함께 야근을 했다.

    이게 우연일까? 설마 그럴 리가.

    그들에겐 높은 확률로 서로 간에 커넥션이 존재했고, 모종의 이유로 한데 모일 필요가 있어 야근이란 수단을 선택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문제의 카드를 발견했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최후의 생존자가 나오기까지 문은 열리지 않는다.’

    보통은 그런 내용의 카드를 받는다고 해서 곧장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죽이려 들지 않는다.

    어차피 카드를 보낸 범인이 누구든 아침이 되었을 때 수사국 문이 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니 상식적으로는 카드의 내용을 무시하고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대처.

    그러나 피해자들은 굳이 범인이 의도한 대로 살육전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자신과 함께 건물에 남아 같은 내용의 카드를 받았을 이들이, 하필이면 자신의 인생을 박살낼 비밀을 알고 있는 공범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 중 하나가 작정하고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 안에는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이들뿐.

    괘씸하게 다른 생각을 품은 배신자가 누구든간에 나는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 내 공범의 입을 영원히 막아서라도.

    그런 심리가 이어지고 이어져 누구 하나라도 범인이 의도한 대로 살인을 저지른다면, 그 순간 건물 안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마경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좁은 골목을 달리던 마차가 우뚝 멈춰 섰다.

    “도착했군요.”

    밀리엄의 말과 함께 문이 열리며, 작고 낡은 단층 주택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프랭크 딜린저의 집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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