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10)
당연히 알 턱이 없지만, 메이슨 교단의 예언서를 읽다가 얼핏 비슷한 대목을 본 것 같기는 했다.
말디스 시에서 네 개의 식탁에 독배가 올라가리라는… 뭐 그런 내용이었지, 아마?
“어,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프랭크 딜린저 씨는 당시 범인으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진 퀴니 딜린저 양의 남동생입니다.”
범인으로 ‘몰려’?
나는 밀리엄이 선택한 노골적인 표현에 조금 당황했다. 해리엇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가 선 쪽에서 헉,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도 누나의 결백을 주장했고, 끝내 형이 집행된 이후에는 아예 플레밍턴으로 올라와 주기적으로 재수사를 요청하러 수사국에 찾아오곤 했죠.”
“저기, 그럼 켄트우드 씨는 딜린저 씨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당시의 수사결과를 대놓고 부정하는 듯한 밀리엄의 언사가 아무래도 걸렸던 모양인지, 해리엇이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그러자 밀리엄이 미세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퀴니 딜린저 양은 결백했어요. 멀쩡한 증거를 무시하고 범인으로 몰아 죽여버려도 뒤탈이 없을 만큼 만만한 인물이란 게 죄가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어떤 응어리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어진 밀리엄의 설명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지역 유지의 양자가 범인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증거를 폐기한 담당수사관이, 애당초 용의자조차 아니었던 퀴니 딜린저를 느닷없이 범인으로 결론 지었다는 것.
그런 정황을 확인한 그가 상부에 수차례 재수사를 요청했으나 전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종내에는 사건정보를 열람하는 일 자체가 금지되어 손쓸 도리를 잃어버렸다는 것…….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밀리엄이 어느 순간 미간을 왈칵 찌푸린 채 말을 멈췄다.
갑작스런 침묵이 공기를 타고 흘렀지만, 나는 굳이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분노가 치밀어서 좀 가라앉히려는 모양이지 싶어서였다.
그러나 조금 뒤 흘러나온 말은 그런 내 예상과 전혀 무관하고, 어찌 보면 그보다 훨씬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건을 담당한 이가 죽은 브레너 수석수사관이었군요.”
[ 키워드 ‘알버트 브레너와 말디스 연쇄독살사건’을 획득했다. ]
***
알버트 브레너는 대체 뭘까.
4년 전의 말디스 연쇄독살사건에 캠벨 남작 일가 사망사건까지.
수석수사관씩이나 되어서 멀쩡한 사람을 살인마로 만들어 죽여버리질 않나, 죽은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 사건을 졸속종결 해버리질 않나.
의심의 여지없는 비리수사관이었다는 것쯤이야 아주 잘 알겠다.
그런데 그 이름에 내가 몇 번이나 귀를 더럽히고 시스템창이 두 번이나 반응할 이유는 대체 뭐지?
대사 한 줄 없이 요단강 건너간 엑스트라 주제에 왜 이렇게 깨알같이 글러먹은 거지? 그걸 왜 자꾸 나한테 어필하지?
짜증 나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다. 나는 손에 들린 수첩을 신경질적으로 덮고 고개를 살짝 털었다.
이내 수첩이 파스스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커다란 핏자국이 남은 카펫을 다시 쳐다본 뒤, 이내 고개를 들어 넓은 집무실의 전경을 쭉 훑어보았다.
죽은 테오도어 와이엇이 사용했던 국장실은 클라라 웨이튼과 알버트 브레너가 썼던 방을 하나 반 개 정도 합쳐 터놓은 듯한 넓이를 자랑했다.
삼면이 책장으로 막혀 있고, 중앙에는 소파와 탁자가 있고, 책상과 의자는 정면으로 문을 마주 보도록 놓여 있는 방.
테오도어 와이엇은 바로 이 방 한가운데의 탁자 위에서 머리에 총을 맞아 고꾸라진 채 숨져 있었다고 한다.
하긴 나라도 그 정도 체구의 인간을 죽이는 데는 밧줄이나 둔기나 날붙이보다 총을 선택했을 것이다.
문제는 또 다른 피해자인 에이미 키트너의 시신이 발견된 곳 또한 이곳이라는 데 있다.
테오도어 와이엇의 시신이 탁자 정가운데에 반듯하게 엎어진 모양으로 발견된 반면, 에이미 키트너의 시신은 왼쪽 벽 앞의 마구 뽑힌 책 더미 위에서 교살당한 채 발견되었다.
나는 그녀의 시체보존선과 그 주변의 아수라장을 보았다.
왼쪽 벽의 책장에 꽂혀 있었을 책들은 정말 책장을 죄 뒤엎을 심산으로 뽑아댄 것처럼 바닥을 나뒹둘고 있었다.
테오도어 와이엇과 에이미 키트너 중 누가 먼저 사망했는지를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모양이니 그 부분은 완전히 추측의 영역.
흉기가 다른 만큼 두 사람을 죽인 것이 한 명일 가능성은 일단 제외하도록 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책 사이사이를 천천히 밟아 걸어간 나는 왼쪽 벽에서 유일하게 책들이 멀쩡히 꽂혀 있는 마지막 책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에이미 키트너는 이 책장에 도달하지 못한 채 죽었다. 여기 꽂힌 책들만 멀쩡하다는 건 책을 마구잡이로 뽑아댄 사람이 그녀라는 뜻.
상식적으로 부하가 자기 방에 쳐들어와 멀쩡한 책들을 마구 뽑아대고 있는데 그걸 구경만 하고 있을 상사는 없다.
그러니 에이미 키트너는 테오도어 와이엇을 직접 죽였거나, 그가 이미 죽어 있는 방에 들어왔거나, 비어 있던 이 방에서 책을 뽑다가 뒤늦게 들어온 테오도어 와이엇 혹은 제3자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는 무슨 이유로, 살육전이 벌어지는 건물 안에서 가만히 있는 책들을 뽑아 바닥에 내던지는 기행을 벌이고 있었단 말인가?
어쨌든 그럴 여유가 있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에이미 키트너는 진범의 손에 살해당한 ‘최후의 생존자’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최후에 살아남아 있었다는 점이 이 기행의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지나온 자리에 떨어진 책들을 주욱 훑어본 뒤 다시 눈앞의 책장을 보았다.
에이미 키트너는 이 방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은 이 방을 처음 보고서 받은 인상이었다.
클라라 웨이튼과 알버트 브레너가 썼던 방을 ‘한 개 반’ 정도 합쳐둔 듯한 넓이의 방.
국장실이니 넓게 쓰시라고 방을 튼 거라면 두 배일 텐데, 왜 애매하게 1.5배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아주 익숙한 비밀공간의 향기가 나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책장으로 손을 뻗어 일단 내 눈높이에 있는 넓은 칸의 책들을 뭉텅이로 뽑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등 뒤에서 밀리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로니카, 무슨 일이에요?”
“키트너 수사관님이 못 찾은 걸 찾아보려고요.”
나는 곧장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책을 뽑는 데 열중했다.
힘겹게 허리를 들어 마지막 대여섯 권 정도를 한꺼번에 뽑으려는데, 별안간 머리 위로 그늘이 지며 등 뒤에서 기다란 팔이 쑥 뻗어 나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꺾자 밀리엄의 얼굴이 보였다.
나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은 그는 이내 내가 뽑으려던 책들을 뽑아 한 손에 세 권씩 나눠 들고는 바닥에 턱턱 내려놓았다.
“그런 건 같이 찾아보자고 해줘요.”
“그랬다가 아무것도 없으면 민망하잖아요.”
“좀 민망해지면 어때서요.”
“당신 앞에서 민망, 아니!”
나는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가려던 말을 황급히 주워 삼키고 눈을 치켜떴다.
미쳤나? 내가 미쳐서 방금 ‘당신 앞에서 민망한 꼴 보이기 싫은데요.’ 따위의 말을 하려고 한 건가?
“…나, 남들 앞에서 민망한 꼴 보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내 뺨을 한 대 때리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냉큼 말을 바꾸자 ‘그렇군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러면서 빙글 웃는 모습이 영 얄미웠다.
나는 어째 좀 구차해진 기분으로 다시 고개를 휙 돌려 텅 빈 책장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주먹 쥔 손을 뻗어 책장 안쪽의 벽을 쿵쿵 두드려보았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안이 빈 것처럼 소리가 울리는 게 아닌가?
그 소리를 들은 나와 밀리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위칸에 꽂힌 책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두 분 대체 뭐 하시는 거냐’며 당황하는 해리엇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마침내 위칸의 책들이 모조리 바닥에 자리했다.
나는 안쪽으로 한 발 몸을 비켰고, 이내 밀리엄이 두 칸 사이의 칸막이를 양손으로 붙잡고 힘을 주어 뽑아냈다.
팔을 뻗어 칸막이가 꽂혀 있던 기다란 홈을 더듬자, 홈 안쪽의 아랫부분에 또 다른 홈이 길게 나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곳에 손가락을 끼운 뒤 아래로 힘을 주었다.
그러자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안쪽의 벽이 내려가며, 그 너머에서 먼지 쌓인 은회색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제작진 아무래도 책장에 뭔가를 숨겨놓는 게 취미인 모양인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금고를 응시했다. 금고의 정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물쇠나 다이얼이 아니라, 다소 투박하지만 제법 본격적인 모양새의 번호판이었다.
[ ‘잠긴 금고’를 발견했다. ]
번호판 부분을 만지자 시스템창이 곧장 반응했다.
굳이 잠겨 있다는 확인사살이 더해진 것을 보며 나는 작게 실소를 한번 터뜨렸다.
자, 문제는 저걸 어떻게 여느냐는 건데…….
보통 이런 식으로 암호를 입력해야 하는 대목에서는 주위에 암호에 대한 힌트가 있기 마련.
나는 몸을 돌려 마침 등 뒤에 있는 넓은 책상을 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엔 잉크병에 꽂힌 깃펜이며 만년필, 메모장 같은 간단한 사무용품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책상의 넓이에 비해 뭔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