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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58화 (58/121)
  • 58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9)

    그러나 피해자들이 서로 죽고 죽였다는 방금의 가설을 채택할 경우엔 이야기가 상당히 달라진다.

    수사국 건물의 창문들은 체구가 작고 마른 편인 베로니카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작은 것들뿐.

    출입구를 전부 바깥에서 봉쇄한 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갈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게 아닌 이상, 건물 안에 있던 멜리사 위브가 범인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설령 다른 방법이 있었다 한들 애써 저희끼리 죽고 죽이도록 세팅해놓은 건물 안에 굳이 기어들어가 자진해서 범인으로 몰릴 이유는 뭐란 말인가?

    뼈아픈 점은 멜리사가 현재 어떤 상태고 사건 당시 건물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확인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멜리사 위브가 범인일 가능성보다는 차라리 에드워드 녹스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스포트라이트는 명백히 이곳, 스칼렛 맨션 내부를 비추고 있다.

    에드워드 녹스가 범인이라면 나와 밀리엄이 협력하게 되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 밖에서 그의 행방을 추적하는 쪽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 떠오른 것이, 멜리사도 에드워드도 아닌 제3자가 범인이라는 새로운 가설.

    이 가설에는 정황상의 무리수나 시나리오 전개와의 괴리가 존재하지 않는 대신, 당장 용의자를 추리는 일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성가신 맹점이…… 있으나.

    어찌 되었건 탐색을 통해 알게 된 정보들로 새롭게 거론된 결론이라는 점에서 진실일 확률이 매우 높을 터.

    자, 그렇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범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바탕으로 용의자를 추려내는 것일 텐데…….

    나는 밀리엄의 손에 들려 있는 카드를 가만히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출입구 봉쇄가 가능했던 사람을 조건으로 삼았다간 범위가 너무 넓어진다.

    하지만, 저 카드를 희생자들이 발견할 만한 장소에 놓을 수 있었던 사람을 찾는다면?

    “저, 수사관님. 혹시 사건 전날 누가 수사국 건물 안에 들어왔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나요?”

    내가 고개를 휙 돌려 묻자, 조금 기가 죽어 있던 해리엇 블레어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있습니다! 수사국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전부 들어오고 나갈 때 출입대장에 이름과 시간을 쓰고 서명을 하게 되어 있어서요.”

    “그 출입대장을 좀 보고 싶은데요.”

    ***

    나와 밀리엄은 출입대장을 확인하기 위해 해리엇을 따라 1층 정문 근처의 경비실로 내려갔다.

    말이 경비실이지 정작 퇴근시간 이후 경비업무를 서는 사람은 없다는 밀리엄의 설명을 들었을 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사실 조금 전 방을 나설 때부터 내 머릿속은 조금 다른 이유로 복잡다단해져 있던 차였다.

    [ 12. 왕립수사국 내부의 불미스러운 일 ]

    근래 왕립수사국 안에서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몇몇 인물들에 대한 갑작스러운 인사이동과 징계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왕립수사국 내부가 아주 불합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강조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계산 하에 열어본 수첩에서 며칠 전 획득한 사건정보를 본 나는 방을 나서기에 앞서 해리엇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혹시 최근에 내부적으로 뭔가 소란이 있지는 않았느냐는 논조의, 다소 예민할 수 있는 질문이었는데, 해리엇은 딱히 고민하는 기색 없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고, 수석수사관님 두 분이 무슨 자료를 기자들에게 넘기려다 발각되셨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아, 그리고 그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데이 부국장님께서 돌아가신 국장님과 크게 다투셨는데 그 이후 갑자기 강등에 정직을 당하셨고요.’

    말씀 드리고 보니 소란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상한 일에 가깝네요…. 하고 말하며 해리엇 블레어는 턱을 긁적였다.

    나는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오는 내내 해리엇의 증언을 곱씹었다.

    이런저런 정황을 놓고 보았을 때, 사건정보에 언급된 ‘불미스러운 일’이란 해리엇이 말한 그 일이 맞는 것 같았다.

    딱히 근거는 없지만 그 일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형태로 돌아가고 있는 이 조직의 생태와도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직감 또한 들었다.

    불합리하고 무책임하고 배타적인 엘리트들의 조직.

    언론에 무언가를 넘기려 했다는 내부자들.

    부국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갑자기 자리를 내놓게 될 정도의 내부 분쟁…….

    뭔가 구린 구석이 있는 건 확실하고 어느 쪽이 통념상 정의로운 편일지도 대충 짐작이 가는데, 정작 그 모든 정황이 이번 사건과 무슨 상관인지만은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다.

    뭐, 정말 상관이 있다고 한다면 조만간 뭔가 쓸 만한 연결고리 같은 게 발견되겠지.

    마침내 출입대장을 눈앞에 둔 나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상념들을 재빨리 흐트러트린 다음 허리를 숙였다.

    밀리엄이 출입대장의 표지를 넘기자 곧장 사건 전날 수사국을 드나든 사람들의 리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과 들어온 시각, 나간 시각, 서명과 비고를 나란히 적어놓은 퍽 체계적인 형식의 리스트였다.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적힌 글씨들을 일단 쭉 훑어보던 나는 비고란에 새끼 손톱만 한 크기의 도장 같은 것이 찍혀 있는 몇몇 서명들을 발견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밀리엄, 이건 뭐예요?”

    “수사관들에게 지급되는 인장입니다. 그게 찍혀 있는 출입자는 수사관이라는 뜻이에요.”

    수사관들도 외부인과 같은 출입대장을 쓴단 말이지…….

    이제 보니 사건 전날은 외부인의 출입이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으로, 도장이 찍힌 비고란이 그렇지 않은 칸보다 훨씬 많았다.

    리스트에 나간 시각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은 열세 명이었다. 열두 명의 피해자와 멜리사 위브.

    전날 미리 야근계를 제출해둔 상태였다는 피해자 열두 명과 달리 멜리사는 당일에 임의로 야근을 결정했다는 해리엇의 설명이 이어진 뒤, 밀리엄이 곧장 말을 받았다.

    “그럼 일단 보죠.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 다녀간 사람들은 제하는 게 맞겠고…….”

    나는 밀리엄의 기다란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천천히 미끄러지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왕립수사국 수사관들과 기타 잡무를 맡은 직원들의 공식 퇴근 시간은 저녁 6시. 외부인의 체류가 허용되는 시간도 6시까지였다.

    범인이 외부인이라면, 문을 봉쇄한 것은 그 이후겠지만 카드를 놓아둔 것은 6시 이전일 터.

    물론 문을 봉쇄하기 전에 카드가 발견되어선 안 되므로 정확히 표현하자면 6시에 한없이 가까우나 6시를 많이 넘기지는 않은 시각일 것이었다.

    아마도 가장 많은 인원이 수사국을 빠져나가는 6시를 기점으로 그들 틈에 섞여 나갔다가, 새벽녘 즈음 다시 들어가 마지막 생존자를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겠지.

    멜리사 위브를 놓친 것은 아마 그녀가 본래 야근할 예정이 아니었기 때문일 테고….

    일단 수사관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퇴근한 이는 딜런 와이즈였다.

    그보다 조금 앞서서 조이가 건물을 나섰고… 딜런 와이즈 이후에 나간 이는 카일리 돌턴과 프랭크 딜린저, 그리고 당일 출입대장을 관리하던 경관인 보리스 베인까지 총 세 명.

    나는 카일리 돌턴이 채워놓은 이름과 시간, 서명과 비고란의 글자들이 오른쪽으로 조금씩 번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왼손잡이인가? 누가 어느 손을 주로 쓰느냐도 추리물에서 범인을 특정할 때 자주 쓰이는 장치이긴 한데.

    그래도 최대한 번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쓴 기색이 역력한 글자들을 죽 훑어보다가 또다시 멈칫한 것은 서명란을 지나친 지점에서였다.

    나는 카일리 돌턴의 비고란에 적힌 ‘플레밍턴 타임즈’라는 글귀에 나도 모르게 밀리엄을 슬쩍 보았다.

    물론 아침에 그를 착잡하게 만든 기사를 쓴 건 앤서니 롭이었지만, 플레밍턴 타임즈라는 단어를 다시 보니 어쩔 수 없이 아침의 일이 떠올라서였다.

    그러나 밀리엄은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게 그 부분을 넘긴 듯 보였다.

    하기야, 듣기로 플레밍턴 타임즈는 왕국 유수의 대형 신문사라고 했으니까. 하루에 두어 번 마주친 정도로 일일이 반응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해서 종이 위의 손을 응시했는데, 정작 밀리엄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프랭크 딜린저의 이름 앞에서였다.

    썩 단정하다고는 못할 필치로 적힌 이름을 손가락으로 슥 훑은 밀리엄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째선지 언저리에 한탄 비슷한 것이 어렴풋하게 어려 있는 길고 나직한 한숨이었다.

    “밀리엄, 혹시 아는 이름이에요?”

    한참 리스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밀리엄이 내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대답이 곧장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어딘지 음울해 보이는 금색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대답 대신 그늘진 얼굴로 서서히 고개를 끄덕인 것은 잠시간 눈을 내리깐 채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 뒤의 일이었다.

    “별로 그렇게… 좋은 일로 아는 이름은 아닌가 보네요.”

    “따지자면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기억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이름이죠.”

    좋은 일로 아는 건 아니지만 기억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이름이라.

    뭔가 아리송하면서도 묘하게 감이 잡힐 듯한 설명이었다.

    나는 덩달아 궁금증이 생긴 얼굴의 해리엇을 한번 본 뒤 다시 밀리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베로니카. 4년 전 남부 말디스에서 일어난 연쇄독살사건을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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