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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57화 (57/121)
  • 57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8)

    “그게… 석연치 않은 점이라고 해봤자 어제 말씀 드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요. 담당수사관님들은 굳이 현장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시는 것 같은데, 제 생각엔 그 이유가 아무래도…….”

    “이미 멜리사 위브를 범인으로 상정해두었기 때문이다?”

    밀리엄의 말에 해리엇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플레밍턴 타임즈에 실린 기사 때문에 분위기가 더 그쪽으로 기운 것 같기도 합니다.”

    “범인이 현직 수사관이라는 결론도 명예나 체면과는 거리가 멀 텐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 분들은 차라리 이미 놓친 에드워드 녹스를 범인으로 만드는 편이 나으리라고 여기시고요.”

    “요컨대.”

    듣는 내 속까지 불편해지는 이야기가 줄줄 이어졌고, 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듯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 밀리엄이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안에… 무엇이 진실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로군요.”

    당면한 상황을 뼈아프게 관통하는 정리의 말을 따라 불편한 침묵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해리엇의 말대로라면 이번 사건을 대하는 수사관들의 입장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에드워드 녹스를 범인으로 만드느냐.

    멜리사 위브를 범인으로 만드느냐.

    그러나 그렇게 뜻이 갈렸어도 두 파벌의 목적은 오직 하나. 땅에 떨어진 왕립수사국의 체면과 입지를 최대한 방어해내는 것이지, 진범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었다.

    수사관 열두 명을 살해하고 또다시 도주한 수배범을 체포하지 못했다는 오명과, 전대미문의 대량 살인범이 알고 보니 현직 수사관이었다는 오명을 놓고 벌어지는 저울질.

    밀리엄의 말마따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나는 절로 착잡해지는 심정을 애써 다잡았다. 그리고 묵직한 얼음덩어리에 짓눌려 있는 듯한 침묵을 뚫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그럼 우리끼리라도 현장들을 다시 조사해보는 게 어떨까요? 어제는 미처 살펴보지 못했으니까요.”

    수사관들의 글러먹은 자세야 어찌 되었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그만이지.

    지금은 앤서니 롭의 기사에 팩트폭력을 당한 수사국에서 사건을 말도 안 되는 형태로 종결시키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제대로 된 진상을 파헤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

    피해자 열두 명의 사인은 균일하지 않았다.

    해리엇의 설명에 따르면 두 명은 목이 졸려 죽었고 두 명은 칼에 찔려 죽었으며, 세 명은 둔기에, 나머지 다섯 명은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현장의 모습은 전부 제각각이었다.

    넓게 진 피웅덩이 자국이 카펫을 둥그렇게 물들이고 있는 현장이 있는가 하면, 피 한 방울 없이 깔끔한 현장도 있었고, 여기저기 잔뜩 피가 튀어 있어 소름이 절로 끼치는 현장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 클라라 웨이튼과 알버트 브레너의 집무실은 그중 세 번째에 속했다.

    창문도 없이 두 수석수사관의 널찍한 책상이 마주 보고 있는 이 방에서 발견된 시신은 클라라 웨이튼의 것이었다.

    그녀는 두 책상 사이에서 알버트 브레너의 책상을 등진 채, 단단한 둔기로 뒷통수를 여러 차례 가격당해 사망했다.

    시신은 알버트 브레너의 것과 마찬가지로 치워진 상태였지만, 바닥과 책상과 의자와 그밖의 물건들 위로 이리저리 흩뿌려진 핏자국들을 보니 머릿속이 금방 아찔해졌다.

    나는 시시각각 비위가 상하는 현장을 애써서 천천히 둘러보았다.

    끔찍하기만 한 핏자국에 시선과 기력을 빼앗기기보다는 어디에 있을지 모를 단서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현장을 담당했던 수사관은 아주 강경하게 멜리사를 범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라는 모양.

    이렇다 할 탐색도 무엇도 없이 그저 시신만 빼내게 한 뒤 현장조사를 끝냈다고 했으니 무언가 단서가 있다면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공산이 컸다.

    그렇게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시선이 제일 처음 정착한 곳은 알버트 브레너의 책상 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었다.

    중간에 상패 같은 것들을 놓아둔 칸이 있었다. 묵직하고 단단해 보이는 상패 네 개가 나란히 서 있는 가운데, 왠지 상패 하나를 더 놓을 수 있을 듯한 공백이 보였다.

    나는 왠지 밟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카펫의 핏자국들을 피해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문제의 상패칸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와중, 조금 전 보았던 빈자리 부분에만 먼지가 없었다.

    먼지가 쌓여 있지 않은 자리엔 사각형 모양의 무언가가 놓여 있던 흔적만이 선명했다.

    [ ‘상패칸의 빈자리’를 발견했다. ]

    “블레어 수사관님. 혹시 범인이 웨이튼 수사관님을 살해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흉기는 발견되었나요?”

    “아니요. 발견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찾아보려고 하지 않으신 거겠지만요…….’ 하고 중얼거리는 해리엇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한번 눈앞의 상패들을 훑어보다가,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려보았다.

    상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묵직했다. 모서리가 뾰족한 것이 손에 쥐고 보니 퍽 위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혹시 범인은 여기 있던 상패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이쪽을 등지고 서 있던 클라라 웨이튼의 머리를 가격한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면 문제의 상패는 대체 어디로…….

    어?

    일순 어떤 물건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브레너 수사관의 시신 근처에서 발견했던 ‘피 묻은 조각품’.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이 상패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 물건이 여기서 사라진 상패였다고 해도, 정작 알버트 브레너는 총상으로 사망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게 왜 그곳에 떨어져 있었을까.

    나는 잠시 인상을 쓴 채 고민하다가, 이내 상패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저쪽에 서 있을 때와는 또 다른 각도의 방 안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자, 이제 또 어디를 찾아봐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모노클 아이콘을 눌렀다. 3개나 있으니 하나 정도는 여기서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아이콘 옆의 숫자가 2로 줄어들며 손 안에 쥐여진 모노클을 눈가에 가져다 대자 해변의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부분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클라라 웨이튼의 책상과 바닥 사이의 틈새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자그마하게 비죽 튀어나와 있는 종이 모서리가 보였다.

    종이는 피 때문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하필 카펫과 색이 비슷한 탓에 좀 전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모노클이 스르륵 사라지는 것을 느낀 나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고, 조심스럽게 종이를 빼냈다.

    [ ‘수수께끼의 카드’를 획득했다. ]

    카드라고?

    스르륵 떠오른 시스템창이 사라지기 무섭게 나는 피에 젖어 붉게 물든 작은 종이를 휙 뒤집었다.

    뒤집힌 종이 중앙에 수상하기 짝이 없는 문구가 타이핑되어 있었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최후의 생존자가 나오기까지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밀리엄 쪽으로 카드를 내밀며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카드를 넘겨받은 밀리엄 역시 아리송한 얼굴로 종이 위의 문장들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다 그는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몸을 돌려 해리엇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수사관님. 어제 아침 이 건물의 출입구들이 바깥에서 봉쇄되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들은 해리엇이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문이란 문에는 전부 못질이 되어 있어서 여는 데 아주 진땀을 뺐습니다.”

    일순간 서늘한 가능성 한 줄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깥에서 봉쇄되어 있던 출입구와 최후의 생존자를 운운하는 카드, 그리고 통일되지 않은 흉기들.

    “밀리엄.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에요. 피해자들이 서로….”

    밀리엄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나는 다시 한번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만약 건물에 갇힌 피해자들이 ‘최후의 생존자’가 되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인 거라면.

    그저 그들을 가둬두고 서로를 죽이게 만들 어떤 미끼를 던지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처리한 것이 진범이 한 일의 전부라면.

    그렇다면 이 방에서 사라진 상패가 알버트 브레너의 시신 옆에서 발견된 이유도 대강 설명이 가능하다.

    클라라 웨이튼을 상패로 살해한 알버트 브레너가 그것을 들고 내려갔다가, 다른 이에게 총을 맞고 사망한 것이다.

    요컨대 이 정황은 에드워드 녹스나 멜리사 위브가 아닌 제3자도 얼마든지 진범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엉망진창이군.”

    밀리엄이 나직하게 뇌까렸고, 나는 그의 심정을 절절히 이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출입구가 전부 바깥에서 봉쇄되어 있었다면 멜리사도 갇혀 있기는 매한가지였다는 뜻.

    수사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리사를 유력 용의자로 꼽은 것이다.

    단지 혼자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고작 수사국의 체면 따위를 지키고자 어떤 형태로든 사건을 해결해버리기 위해서.

    정말로 엉망진창이라 이쯤이면 밀리엄이 이곳을 관둔 게 퍽 옳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꾹 말아 쥔 밀리엄의 주먹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그리고 그 위로 성난 듯 튀어나온 힘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파트너의 옛 직장이 상상 그 이상으로 썩어빠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유감만 표하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우선 지금까지 나온 단서들 가운데서 도출될 수 있는 가설들을 차분히 정리해보기로 했다.

    기실 여태까지는 피해자들이 잘 훈련된 베테랑 수사관들이라는 점에서, 에드워드 녹스를 범인으로 상정하든 멜리사 위브를 범인으로 상정하든 어느 정도 무리수를 안고 가야 했다.

    둘 중 누구를 범인으로 놓고 생각하든 간에, 한 명이 하룻밤 사이에 열두 명이나 되는 피해자들을 물리적으로 상대해 죽일 수 있었다는 전제 자체가 과히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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