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7)
하지만 금세 착각일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경멸할 일이 없을 거라는데 서글퍼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냥 감수성 폭발한 눈이랑 헷갈린 거겠지. 그건 그거대로 부담스럽지만.
“아무튼 당신 말은, 내게 호감이 있고 그래서 나한테… 그…….”
“정식으로, 정중히 구애해보고 싶습니다.”
“구, 구애라…….”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성심성의껏 유혹해보겠다는 말로 받아들여줘도 괜찮고요.”
“아뇨. 구애가 낫겠네요.”
내가 단호하게 대꾸하자, 언제 서글퍼 보이는 눈을 했었냐는 듯 밀리엄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런 밀리엄을 향해 괜스레 눈을 흘겼다.
창졸간에 남의 머릿속을 뒤집어 엎어놓고 저렇게나 뻔뻔하게 구는데 실상 대단히 원망스럽지도 않다는 점이 얄미워서였다.
그렇게 한참을 흘겨봐도 그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그에게서 눈을 떼는데, 책장 옆의 금고가 움직이는 시야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무언가를 떠올리자 거짓말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황급히 다시 밀리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내 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인 그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애가 어쩌고 유혹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직후로 재차 마주친 시선이 조금 민망해진 나는 눈길을 슬쩍 아래로 내리며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리고 왠지 조금 뜨끈해진 듯한 뺨의 온기를 애써 무시한 채, 그 이상으로 뜨거워진 옆목을 매만지며 말을 꺼냈다.
“요, 요컨대 당장 내가 뭘 대답해주길 바라는 건 아닌 거죠?”
“당연하죠. 당신은 그냥 이대로 있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불편하게 굴지도 않을게요. 약속해요.”
“이미 불편하다면 어쩔, 아니, 이게 아니라. 어쨌든 우리한텐 할 일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본업으로 돌아와서, 우리 저거 좀 잠깐 확인해보는 게 어떨까요…?”
나는 목을 만지던 손을 움직여 금고를 가리켰다.
내 손가락 끝을 따라 몸을 돌린 밀리엄이 아, 하는 낮은 탄성 비슷한 것을 내뱉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장 금고 쪽으로 향한 그는 달그락거리며 다이얼을 돌렸다. 밀리엄은 금세 금고 문을 열고 안에 들어 있던 것을 꺼내들었다.
이윽고 몸을 돌려 다시 소파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낯익고 커다란 책과 열쇠였다.
메이슨 교단의 예언서.
그리고 그것을 여는 열쇠.
“이번 사건이 예언서에 적혀 있는지 확인해보자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며 밀리엄에게서 열쇠를 받아든 나는 그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책의 자물쇠에 그것을 꽂아 넣었다.
저번에도 성 조나단 병원 사건 뒤에 적힌 사건들을 얼핏 들여다보긴 했지만, 그렇게 주의를 기울여 보지는 못했었다.
그때는 나나 밀리엄이나 이 책이 메이슨 교단의 범죄계획서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자체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으니까.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자물쇠를 곁에 내려두고서, 성 조나단 병원 사건이 적혀 있던 부분을 대강 가늠해 책을 펼쳤다.
거기서 두어 장을 넘기니 나를 병원 지하실에서 거의 죽일 뻔했던 바로 그 사건에 대한 예언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문득 떠오르는 섬뜩한 기억에 잠시 눈살을 찌푸린 뒤 곧장 다음 대목에 집중했다.
‘1899년 11월의 마지막날. 마거릿 극장.’
“마거릿 극장?”
예언서에는 1899년 11월 30일 마거릿 극장에서 거짓 신의 사도 12인이 참극의 희생양이 된다고 적혀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오늘은 11월 30일이고, 와이엇 국장과 수사관들이 오늘 새벽 사이 사망한 거라면 사건이 일어나는 날짜와 희생자의 머릿수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곳은 왕립수사국이지 마거릿 극장이 아니지 않나.
나는 며칠 전 신문에서 읽었던 기사를 떠올렸다. 마거릿 극장에서 장기공연 중인 연극에 대한 기사였다.
거짓 신의 사도들이 음모를 꾸며 진실된 신으로 자랄 소녀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끝내 제물로 바쳐 세상이 멸망한다는 내용의 비극.
그런 연극이 성황리에 장기공연 중이라니 이 동네 사람들 취향도 참 괴상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지만 중요한 것은 물론 그게 아니었다.
예언서에 적힌 대로라면 11월 30일에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 12명은 그 연극에서 거짓 신의 사도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성 조나단 병원 사건 때는 예언서에 적힌 희생자와 실제 피해자의 수가 맞지 않았었는데.
[ 키워드 ‘예언서와 현실의 괴리’ 획득 ]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문제의 대목을, 그리고 조금 뒤 그 위에 떠오른 시스템 문구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밀리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 마거릿 극장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 정도의 대사건이라면 분명 수사국으로 이관되었을 텐데, 나와 밀리엄은 오늘 하루 종일 수사국에 있었지만 마거릿 극장의 ‘마’ 자도 듣지 못했다.
“장소가 다르군요. 피해자들도… 예정과는 달랐던 것 같고.”
“왜 다른 걸까요? 임의대로 마구 바꿔댈 거라면 예언서랍시고 이런 걸 만들어둔 의미가 없을 텐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건 뭔가 이상한데…….”
어쩌면 메이슨 교단에서 예언서의 사건들을 실현하기 위해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우리의 추리가 틀렸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아예 별도의 범행을 저지르지 않고 굳이 예언을 연상케하는 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뭐지?
혹시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부분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펼쳐본 메이슨 교단의 예언서가 남긴 것은 애석하게도 또 다른 수수께끼였다.
그렇게 무엇 하나 해결된 것도 없이, 이거다 싶은 단서의 발견도 없이, 11월의 마지막 밤은 그저 유난스러울 정도로 서늘하고 음침하게 저물어갔다.
***
그리고 찾아온 12월의 첫 번째 아침.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온 나를 맞이해주는 밀리엄은 늘 그렇듯 정중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심각해진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고용인이 빼준 의자에 앉으며 밀리엄의 자리 앞에 놓인 신문을 보았다.
식당에 들어서는 나를 인지하기 전까지 밀리엄이 사나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던 신문이었다.
“남작님. 신문을 읽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때마침 휴스턴 씨가 여러 신문사의 조간신문을 접어 올려둔 쟁반을 가져다주며 말을 걸었다.
“아, 네. 켄트우드 씨와 같은 신문사 걸로 부탁드려요.”
내 말을 들은 밀리엄이 착잡한 한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일단 무슨 기사가 실렸기에 저러는지 직접 확인해볼 심산으로 말없이 신문을 받아 들었다.
그대로 신문을 펼치자, 상단 중앙에 큼지막하게 박힌 ‘플레밍턴 타임즈’라는 이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1면의 헤드라인이었다. ‘붉은 벽돌성, 굴욕의 붕괴!’라는 제목 아래로 긴 기사가 이어졌다.
어제 새벽 수사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건조하게 보도하는 듯했던 기사는 중간을 넘어가자 어느새 왕립수사국 자체를 강도 높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의 제일 끝자락, 기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자리에는 ‘앤서니 롭’이라는 낯익은 이름이 인쇄된 채였다.
***
앤서니 롭.
성 조나단 병원 사건 당시 204호에 입원해 있던 환자 중 하나.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이제 보니 직업은 플레밍턴 타임즈의 기자…….
이 시점에 하필 그 사람이 쓴 기사를 읽게 된 건 우연일까? 그 기사의 내용이 하필 왕립수사국을 향한 강도 높은 비아냥인 것은?
다시 찾아온 수사국 건물의 뒷문을 앞에 두고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짧은 기다림 끝에 해리엇 블레어가 문을 열고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는 빈말로라도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턱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하며 퀭해질 대로 퀭해진 눈까지.
‘나 어제 퇴근 못함’이라고 써붙여 놓은 듯한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의 피로로 가득했다.
앤서니 롭의 기사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기로 한 나는 밀리엄과 함께 해리엇을 따라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알버트 브레너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시체가 쓰러져 있던 모양을 본뜬 초크 자국이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저 그뿐, 조사에 임하고 있는 수사관도 현장을 지키고 있는 경관도 없는 상태였다.
“현장조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건가요?”
내 물음에 잠시 뒷머리를 긁적이며 앓는 소리를 낸 해리엇이 이내 영 시원찮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어제의 그 체계라곤 없어 보이는 아수라장을 분명히 기억하는데, 뿔뿔이 흩어진 열두 개의 현장을 조사하는 일이 하룻밤 사이에 종결되었다니.
게다가 표정을 보아하니 해리엇 또한 현장조사가 ‘일단’ 마무리된 이 상황에 적잖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인지했는지, 이번에는 밀리엄이 해리엇을 향해 말을 꺼냈다.
“수사의 방향이 썩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죠?”
“고작 수습인 저 따위가 만족하고 말고 할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요…….”
잔뜩 풀이 죽은 음성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이미 한번 이의를 제기했다가 ‘고작 수습 주제에’ 운운하는 말로 된통 깨지고 자신감이 바닥에 떨어진 듯한 목소리였다.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든지 그래도 좋은 문제입니다.”
“맞아요, 수사관님.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씀해주세요.”
밀리엄과 나의 연이은 충동질에 해리엇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