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55화 (55/121)
  • 55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6)

    수사국에서 챙겨온 자료들이라고 대단히 영양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어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아직 현장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 사건.

    수사체계가 워낙 삐걱거리고 있는 탓에 딱히 이렇다 할 단서가 나오지도 않았고, 설령 나왔다 한들 그것을 문서화할 시간 같은 것은 없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노릇이다.

    그리하여 반출해온 서류 가운데 현 상황에서 가장 쓸모가 있어 보이는 것은, 이미 시스템창도 한 번 반응한 바 있는 피해자들의 신상정보였다.

    테오도어 와이엇, 알버트 브레너. 그리고 이어지는 10개의 낯선 이름들…….

    기실 가장 쓸모가 있어 보인다고 해보았자, 일면식도 없고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는 이들의 신상정보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별것이 없었다.

    하지만 밀리엄은 다르겠지.

    서재의 소파에 기대 앉아 손에 들린 열두 장의 종이를 한 장씩 넘겨보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밀리엄을 보았다.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하고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손 안의 서류를 들여다보던 밀리엄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 그는 다를 것이다. 다르기 때문에 어쩌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불편해졌다.

    나와 달리 저쪽은 뭔가 얻을 정보가 더 있으리라고 판단한 직후인데 마음이 불편해지다니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밀리엄과 눈이 마주치자, 생각을 거치지 않은 질문이 자동적으로 흘러나갔다.

    “밀리엄은 괜찮아요?”

    “뭐가요?”

    “아까 내가 브레너 수사관님 이름을 보고 놀랐을 때,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나보다는 밀리엄이 더 놀랐겠다 싶어서요.”

    내 말을 들은 밀리엄은 잠시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이내 들고 있던 종이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또 내 걱정을 해준 겁니까?”

    보기 좋게 탄탄한 상체가 탁자 위로 기울어지면서 자연히 좁혀진 거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허리를 바짝 세우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밀리엄은 종이를 내려놓은 뒤에도 탁자를 손으로 짚고 눈가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한동안 내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머리는 어째선지 제발 피하라고 사이렌을 울려대는데 딱히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기묘한 시선이었다.

    사실은 괜찮냐고 물은 시점부터 길을 잃고 헤매고 있던 생각이 또 걱정을 해준 거냐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연결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결론에 도달한 뒤에도 나는 곧장 말을 잇지 못했다.

    걱정해서 건넸다고밖에는 달리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는 물음을 던져버렸다는 선득한 깨달음 때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혼란에 빠졌다. 내가 또 밀리엄 켄트우드를 걱정해줬다니.

    현실의 인간인 내가.

    게임 캐릭터일 뿐인 밀리엄을.

    어쩌다 잠시 헷갈려 한 번도 아니고 본인에게 ‘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러 번…… 와. 이건 좀 아니지 않니, 나?

    자꾸 이 세계를 현실처럼 인식하게 되는 듯한, 그리고 그 인식의 중심에 밀리엄이 있는 듯한 불안이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밀리엄이 픽, 하고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당신의 걱정을 받을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걱정을 받을 자격 같은 건 누가 정하는 건데요……?”

    나는 순간 미간을 팍 찡그리며 물을 수밖에 없었다.

    좀 전까지는 그를 걱정했다는 데서 충격과 공포를 느꼈던 주제에 우습게도, 막상 당사자가 자격미달을 운운하자 괜히 분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러자 어느새 다시 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은 밀리엄이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놀랐을 뿐이지 슬픈 게 아니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그리 유감스럽지도 않습니다.”

    “……혹시 죽은 수사관님들과 사이가 안 좋았어요?”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는지 놀라울 정도로 하나같이요. ……베로니카, 방금까지 본 서류에 클라라 웨이튼이란 이름이 있었지요?”

    클라라 웨이튼?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마침 종이 상단에 클라라 웨이튼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직위는 수석 수사관.

    나는 눈을 끔뻑이며 그 이름을 한번 보고, 다시 밀리엄을 보았다. 이 사람이 어쨌다는 거지?

    “그녀는 ‘자정의 교살자’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관입니다. 더 조사할 여지도 여력도 충분했던 사건을 조기종결한 장본인이기도 하고요. 내가 말한 적이 있던가요? 나는 그 사건으로 양친을 잃었습니다.”

    말한 적은 없지만 당연히 알고 있다. 그가 그때 양친을 여의었다는 것도, 당시의 졸속수사에 분노해서 수사관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도.

    나는 좀 더 착잡해진 기분으로 다시금 서류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 키워드 ‘클라라 웨이튼과 자정의 교살자 사건’ 획득 ]

    눈치 없는 시스템창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클라라 웨이튼. 아마도 그 시절의 밀리엄이 누군지 모를 범인 다음으로 원망했을 인물.

    그런 사람이 죽었다고…….

    “경멸스럽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씁쓸한 웃음을 터뜨린 밀리엄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이마를 문질렀다.

    슬프지도 유감스럽지도 않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기쁘거나 속이 시원해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설령 기뻐하고 있다고 해도 그게 뭐 어때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경멸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경멸이람. 싫어하던 인간이 죽었는데 진심으로 애도하고 유감스러워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있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지.

    이왕지사 죽은 것 딱한 심정으로 용서하거나 내 응어리는 여기까지라고 딱 잘라낼 수 있는 사람 정도는 있겠지만, 그건 뭐 흔한 일인가?

    재수 없는 놈 잘 죽었다고 길바닥에서 춤이나 안 추면 점잖은 지성인인 것이다.

    아무리 죽음이 중재에 나섰다 한들 용서도 화해도 의무가 될 수는 없다.

    “베로니카. 그러면 말입니다.”

    홧김에 우르르 말을 토해내고 내심 씩씩거리느라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 것도 모르고 있던 나는, 별안간 나를 향해 쭉 뻗어나온 부름에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밀리엄이 어느새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벌꿀을 한 방울 떨어트려놓은 듯한 금빛 눈은 어쩐 일인지 아까의 부드러운 웃음기를 되찾은 채였다.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또 한번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당장이라도 그렇게 말할 것 같은 얼굴로 말하기를.

    “내가 만약 이 상황에, 오늘부터.”

    그러나 어떻게 보면 묘한 불안과 시원함이 공존하는 그런 얼굴로 말하기를…….

    “당신에게 정식으로 구애해보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도, 나를 경멸하지 않을 건가요?”

    정식으로 뭘 해보겠다고?

    나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멍청하게 멈춰 눈을 깜빡였다. 당연히 대답 같은 건 생각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좀 안 웃긴 농담이겠거니 넘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점멸하는 시야에 잡히는 밀리엄의 얼굴은 애석하게도 농담을 하고 있다기엔 꽤나 진지해 보였다.

    머릿속에 새하얀 물감이 번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완전히 할 말을 잃은 나는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며 그를 보았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놀란 얼굴을 하고 있을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쩌면 너무 곤란한 나머지 울상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밀리엄이 웃는 낯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농담이었다는 말이 나오길 간절히 바랐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무례한 착각이었지만, 나는 한때 당신이 나와 같은 구덩이에 빠졌다고 여겼던 적이 있어요. 그 즈음 당신은 꼭 낯선 세상에 홀로 떨어진 인간 같아서… 내가 혼자 남은 것처럼 당신도 혼자고, 내가 그렇듯 당신에게도 이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나 기력 따윈 없을 거라고 지레 짐작했죠.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을 얼마나 함께하든 그 일이 끝나면 처음부터 아무 상관 없었던 사람들처럼 서로의 인생에서 말끔히 지워질 수 있을 거라고요.”

    쏟아져 나온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고, ‘낯선 세상에 홀로 떨어진 인간’이라는 아주 날카로운 표현에서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나가지 않는 와중에 이야기가 이어졌다.

    “지금은 어떻게 감히 그런 착각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내가 늘 실패해서 영영 포기하기로 결심했던 것들을 다시 기대하게 만들어요. 당신이라면 믿어도 좋다고, 이번에야말로 지킬 수 있다고 말이에요. 베로니카, 나는 당신이 내 마지막 기회인 것만 같습니다.”

    무어라 끼어드는 것이 지독한 무례처럼 느껴지는 거창한 말들이었다. 그가 여전히 웃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너무 신기한 나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얼굴이 적잖이 혼란스러워 보였던 모양인지, 밀리엄은 잠시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당장 나와 어떤 관계가 되어달란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냥, 내가 당신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허락해주지 않겠냐는 겁니다.”

    그런 노력에 상대의 허락을 맡는 경우가 몇이나 되는지는 둘째치고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대관절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좋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분명 추리 어드벤처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와 있었을 텐데 왜 갑자기 전개가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튀는 거지?

    이게 전개의 일환이긴 한 건가? 아니면 버그? 그도 아니면 내가 베로니카 캠벨에게 빙의한 상태라서 발생한 어떤 자유행동의 영역?

    수많은 물음표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다 첫 번째 자문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어버렸을 즈음에는 그냥 기절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 타이밍에 날 기절시킬-물론 그러다가 요단강도 건너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한- 에드워드 녹스 같은 게 나타나줄 리는 만무했다.

    결국 나는 내가 밀리엄의 위험한 질문 앞에 비무장 상태로 내동댕이쳐졌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 상황이 정확히 무엇인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말이다! 젠장!

    나는 상상도 못한 전개에 혼란해진 머릿속을 대강 갈무리하고서, 이 순간 가장 적당하고 적절할 대답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그렇게 떠오른 답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럭저럭 쓸 만은 해 보이는 것이었다.

    “이, 일단 나는 그런… 일에 내 허락 같은 게 필요하지는 않다고 봐요. 지금이든 나중이든 내가 밀리엄을 경멸할 일은 더더욱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던 나는 경멸할 일이 없을 거라는 대목에서 그의 눈빛이 조금 서글퍼진 듯한 느낌을 받고 잠시 말을 멈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