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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54화 (54/121)
  • 54화. 붉은 벽돌성의 새벽 (5)

    그리고 내 기대대로 밀리엄은 해리엇 쪽으로 힐끔 시선을 움직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긍정해주었다.

    “당황스러울 만도 하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참, 블레어 수사관님.”

    “어…… 아, 네! 켄트우드 씨. 무슨 일이신가요?”

    해리엇은 본인 입장에선 대단한 선배인 밀리엄에게서 ‘블레어 수사관님’이라는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처럼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그런 해리엇의 반응에 밀리엄은 입술을 꾹 깨물며 끙, 하고 낮게 앓는 소리를 했다.

    언젠가 멜리사를 향해서도 보인 적이 있는, ‘영 못 미덥지만 그렇다는 말을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였다.

    그러고 보니 멜리사는 괜찮을까? 지하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조금 전 해리엇이 말한, 그녀를 범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수사관들에게 위협적인 자수종용 같은 걸 당하고 있다거나…….

    만나게 해주질 않으니 영 좋지 않은 상상만 떠오른다.

    걱정이라기엔 좀 애매하다. 그래봐야 시나리오가 정해놓은 대로 흘러가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니까.

    이건 그냥… 뭐라고 해야 하나, 자꾸만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인권침해의 현장에 대한 인간적 거부감에 가깝지 않을까?

    아무튼 나름대로 진정해보고자 작게 도리질을 치는데, 해리엇을 향한 밀리엄의 음성이 이어졌다.

    “이 자료들, 외부 반출이 가능할까요? 가져가서 찬찬히 살펴보고 싶은데.”

    “외, 외부 반출이요?”

    “달리 지시사항이 있는 게 아니라면 수습이라도 그 정도 결정권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

    질문을 받은 해리엇의 얼굴은 금세 난처한 기색으로 가득해졌다.

    그러나 정작 곤란하다는 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저토록 난처해하는 이유는 외부 반출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반출에 대한 결정권이 본인에게 넘어온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일 터.

    감히 예상하건대 그녀는 딜런 와이즈로부터 ‘캠벨 남작과 밀리엄 켄트우드에 대해서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의 두리뭉실하고 성의 없는 지시와 함께 이곳에 왔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에 ‘알아서 하라’는 말은 ‘내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방향이 무엇일지 네가 직접 생각하라’는 뜻.

    그리고 물론, 여기서 딜런 와이즈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해리엇 블레어는 자료의 반출을 허가하지 말아야 한다.

    눈치가 개미 눈물만큼이라도 있는 인간이라면 딜런 와이즈가 밀리엄의 수사합류를 아주 고까워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으니까.

    얼굴을 보아하니 기실 밀리엄도 무언가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물은 것은 아닌 듯 보였는데…….

    “가, 가능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달리 지시사항이 내려온 것도 없고, 남작님과 켄트우드 씨는 정식으로 수사에 협조 중이시니까요.”

    해리엇에게서는 꽤나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좀 전까지의 난처한 기색을 생각하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호탕하기까지 한 승인에, 나와 밀리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맞추고 고개를 기울였다.

    밀리엄은 다시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듯 해리엇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가, 이내 입을 닫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짧은 침묵 뒤에야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료를 넣어갈 가방도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안경이 흘러내릴 만큼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해리엇 블레어가 쌩하니 방을 빠져나갔다.

    둘만 남은 방 안에서 나는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며 밀리엄에게 물었다.

    “정말 가져가도 되냐고 다시 물어보지 않아도 괜찮았던 걸까요?”

    “저 친구에겐 괜찮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죠. 두 번 물었다가 생각을 바꾸면 기껏 굴러온 기회를 걷어찬 셈이 되니까요.”

    그건 그렇지.

    무엇보다 초면인 내가 봐도 훤한 딜런 와이즈의 속을 해리엇이라고 모를 리 없으니, 그녀도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자료반출을 허가해준 것일 터다.

    피차 어깨를 으쓱해 보인 나와 밀리엄은 이내 몸을 돌려,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종이들을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

    정리한 서류들을 해리엇이 가져다준 가방에 담고서, 우리는 일단 귀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왕립수사국의 붉은 벽돌 건물 내부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장소에서 발견된 12구의 시신과 열두 개의 현장을 각각 조사해야 하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현장조사를 맡은 수사관들은 하나같이 밀리엄에게 적대적이라 어떻게 파고들어 협조를 얻어낼 길이 요원했다.

    그렇게 현장조사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보니 당장은 해리엇이 가져다준 자료들을 들춰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면 어수선한 수사국 건물 한구석의 좁고 낡은 빈방보다는 켄트우드 저택의 쾌적한 서재가 더 좋은 작업공간이 되어줄 터였다.

    그리하여 나와 밀리엄은 해리엇에게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수사국을 나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뜻밖의 인물 두 명과 마주쳤다.

    첫 번째 인물과 마주친 곳은 우리가 기자들의 눈을 피해 들어왔던 뒷문 앞에서였다.

    ‘아니, 캠벨 남작님 아니십니까!’

    ‘……홉스 변호사님?’

    내가 이 망할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이후 제일 처음 마주했던 인물인 변호사 벤자민 홉스가 경관의 안내를 받아 뒷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쩐 일이시냐는 내 물음에 그는 자신이 몇년 전 왕립수사국의 협력변호사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려놓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 수사관들이 법적 분쟁에 연루되거나 하는 일이 생겼을 때 변호를 전담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된 수사관님의 변호를 맡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요….’

    멜리사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는 설명을 끝으로 그는 경관에 의해 지하로 내려갔다.

    스친 것이나 다름없는 짧은 만남이었다.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저 그뿐.

    기실 벤자민 홉스 본인보다는, 변호사도 붙여주고 하는 걸 보니 아주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건 아닌 듯한 멜리사에게 조금 더 생각이 미치기도 했다.

    그 잠깐의 마주침 이후 수사국을 나선 우리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건물 앞쪽으로 향했다.

    두 번째 인물을 만난 것은 그때였다.

    “앗, 남작님! 켄트우드 씨!”

    입구 앞에 몰려있는 기자들 뒤편에서 우리 쪽으로 조르르 달려오며 손을 흔드는 낯익은 소년의 이름을, 밀리엄이 의아한 듯 입에 담았다.

    “조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조이는 밀리엄만큼이나 의아한 얼굴로 우리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두 분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만.”

    밀리엄의 말에 아차, 하고 뒷머리를 긁적인 조이가 이내 배시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 저 실은 얼마 전부터 여기서 일하고 있어요.”

    “여기서?”

    “네. 이젠 탐정님도 안 계시고…… 제 앞가림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하니까요.”

    일이라고 해봤자 수사관님들 심부름을 해드리는 정도지만요, 하고 아무렇지 않게 첨언하면서도 조이의 얼굴에는 도리 없는 상실감이 짙게 묻어났다.

    그리고 그 상실감 짙은 얼굴에 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모양인지, 밀리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이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그래, 그렇구나. 장하다. 헤이즈 씨도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그래주신다면 좋겠는데…… 아, 그보다 들으셨어요? 기자님들 말로는 수사관님들이 여러 분 돌아가신 것 같대요.”

    조이가 돌연 심각해진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방금까지 건물 안에 있다가 나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뭔가 이상하긴 했어요. 평소처럼 들어가려고 하니까 건물 앞에 계시던 수사관님이 오늘은 나올 필요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매일 일하러 오는 거야?”

    내 물음에 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당을 받으니까 많이 나올수록 이득이죠. 꼭 돈 때문이 아니라도, 설렁설렁 구는 것처럼 보이면 해고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래. 그렇겠지……. 저기, 그럼 어제도 나왔겠네?”

    “그럼요.”

    “어제 일하면서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니? 뭔가가 평소와 달랐다던가.”

    대답은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조이는 기억을 더듬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잠시간 ‘음…….’ 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야근을 하신다는 수사관님들이 평소보다 많긴 했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럼 피해자들은 야근을 하던 수사관들인 건가?

    나는 조금 더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누르며 입을 닫았다.

    핵심 수사인력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태에서, 탐정조수 출신인 데다 밀리엄에게 우호적인 조이가 근래 수사국에서 일해왔다는 것은 분명 희소식.

    그러나 완전한 관계자라고 보기 애매한 조이의 증언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조이는 아직 지난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명확히 알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저쪽의 협조성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우리는 협력요청을 받은 입장이니, 언젠가 공표될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전까지는 함구해주는 게 도리일 것이다.

    고맙게도 조이는 왜 그런 걸 물으시냐는 식의 질문으로 이야기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방금의 대화를 통해 나와 밀리엄이 무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어쨌든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밀리엄은 조이에게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 함께 마차로 가자고 제안했지만, 조이는 걷는 게 익숙하다며 사양했다.

    그러고는 꾸벅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조금 전 우리를 향해 달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발 빠르게 멀어져 갔다.

    우리는 조이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마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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