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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49화 (49/121)
  • 49화. 0시를 향하여 (12)

    이젠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고로 저 남자가 기억할 리 만무한 그 일.

    물론 당황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애초에 당황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 일이 있기 전에도 여러 차례 죽을 위기를 넘겼고, 밀리엄이 말하는 건 당연히 그 위기들일 것이었으므로.

    헛기침이 나온 김에 적당히 목을 가다듬은 나는, 어째선지 야속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밀리엄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안 죽었잖아요. 밀리엄이 제때 도착해준 덕분에요.”

    “누가 그런 걸 제때라고 말합니까. 로웰 씨가 함께 있지 않았다면…….”

    심각한 얼굴로 타이르듯 말하던 밀리엄이 별안간 말끝을 흐렸다.

    그는 무언가 영 좋지 못한 가능성을 떠올린 사람처럼 허, 하고 숨을 내쉬더니 이내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 혹시 로웰 씨에게 나 모르게 부탁해둔 것이 있습니까?”

    “어, 네……?”

    “가령, 국장님과 내가 연회홀을 나가려 들면 동행하지 말고 남아달라거나.”

    헙. 이건 뭐지, 독심술?

    정곡을 찔린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가, 그것이 실상 긍정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음을 깨닫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행동에서 확신을 얻은 모양인지, 밀리엄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것 같았다는 듯. 그러나 그게 아니기를 바랐다는 듯.

    “……하루 빨리 기억을 되찾고 싶다던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해줄 상대가 앞에 있는데도 굳이 혼자 남기를 고집하는 게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나는 그냥, 밀리엄이 더 자세한 정보를 캐내자면 국장님과 둘이 있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아서,”

    “정말 그 이유뿐이었습니까. 또 습격당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는 아니었고요?”

    “그건…….”

    엄밀히 말하면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라 그럴 거라고 확신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어쨌든 밀리엄이 늘어놓은 추측은 진실과 아주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진실에 밀리엄이 저 정도의 불만을 품을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제임스 로웰을 방패막이 삼았다고 여겨서 화가 난 건가? 그런 거라면 솔직히 아주 없는 소리도 아니어서 할 말이 없긴 하지만 화가 난 얼굴은 또 아닌 것 같은데…….

    당황해서 우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던 밀리엄이 별안간 눈을 질끈 감더니 주름진 미간을 꾹꾹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나는 정확한 영문도 모른 채로 그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아무리 봐도 화가 났다기보다는 불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운 얼굴이 돌연 다시 내게로 향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국장님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부탁, 내게 했을까요?”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어…….’ 하며 말끝을 끌었다. 그가 국장과 마주치지 않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었던 터라 그럴 듯한 대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그러는 한편 대충 감이 잡히기는 했다. 이건 그러니까, 남에게 달라붙어 살아남았다고 타박을 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는 위험한 일을 하고 있죠. 애초에 당신은 그걸 감수하겠다고 했고, 그러니 내게 당신의 행동이나 선택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베로니카…….”

    밀리엄은 내 대답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베로니카, 하고 이름을 부르는 한숨 같은 목소리 뒤에 잠시간의 침묵이 따라붙었다.

    이어질 말을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무슨 말이 나오든 가벼이 흘려들을 수는 없으리란 강한 예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말아 쥔 손 위로 느닷없는 온기가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나는 내 손등을 덮어오는 커다란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뜬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지키는 일은 내가 하고 싶습니다.”

    번뜩 정신을 차렸을 땐 선명한 금색 눈이 조금 두려울 정도로 정직하게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정말이지 너무나 정직하고 결연해서, 제 속을 숨기거나 포장하려는 기색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려 빤히 읽히는 속뜻을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위험을 직감했다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길 곁에 두어달라는 말, 뒤늦게 도착하는 쪽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소리 없이 전해졌다.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떨리는 숨이 새어 나갔다. 왜 굳이 그러고 싶은 거냐는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질문만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외침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입밖으로 흘러나가려 드는 질문을 꾹 눌러 담으며 밀리엄과 눈을 맞췄다.

    대답을… 아니, 어쩌면 내가 삼킨 바로 그 질문을 촉구하는 듯한 시선. 손등으로 전해지는 열기.

    절체절명의 위기는 진작 지나가버렸을 텐데, 대관절 무슨 영문인지 이 순간을 구성하고 있는 어느 것 하나도 안전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며 어서 이 상황을 타계하라고 닦달에 닦달을 해댔다.

    나는 결국 밀리엄의 손 아래 갇혀 있던 손을 스르르 빼내고서 어설픈 눈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앞으로는 위험해질 것 같으면 꼭 밀리엄한테 먼저 얘기할게요. 고마워요.”

    횡설수설하는 내 대답에 밀리엄이 조금 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거둬들였다.

    그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데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것처럼,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나를 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적막이 찾아들었다.

    ***

    제임스 로웰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 시점에 퇴장하지 않으리라는 내 믿음은 적중해서, 수술은 성공했고 제임스는 금세 의식을 되찾았다.

    간호는 나와 밀리엄의 몫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덕분에 살았으니 내가 곁에서 간호를 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내 말에 밀리엄이 그럼 자기도 함께 있겠다며 고집을 피운 결과가 그러했다.

    밀리엄은 여전히 ‘기억을 잃은 제임스 로웰’의 무해함을 신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신중하다기보다는 방어기제에 가까운 불신으로 여겨졌으나, 기실 그가 겪은 바를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굳이 그 점을 들추지 않기로 했다.

    갓 채워온 물병을 협탁 위에 내려놓은 순간 등 뒤에서 덜그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무심한 얼굴로 잭나이프를 접는 밀리엄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으로 시야에 잡힌 것은 제임스 로웰의 무릎에 놓인 접시와, 그 위에 일정하고 깔끔한 모양새로 나란히 줄지어 선 사과조각들이었다.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예쁘게도 깎아놨네.

    “굳이 깎아주실 필요까진 없었는데…….”

    “내가 심심해서 깎은 겁니다.”

    “그, 그럼 감사히….”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사과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물병을 채워다 준 데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제임스는 사과를 먹으면서도 계속 밀리엄의 눈치를 살폈고, 밀리엄은 그를 무시한 채 내게 살포시 웃어준 뒤 이내 팔짱을 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임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켄트우드 씨. 그 남자 말입니다.”

    “그 남자라면?”

    “남작님과 저를 습격했던 남자요.”

    그러고 보니 깨어난 이후로 한번도 에드워드 녹스를 화두에 올린 적이 없긴 했지.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침대 밑에 넣어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밀리엄이 미간을 찌푸리자 잠시 한번 헛기침을 한 제임스 로웰이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저를 아는 모양이었습니다. 죽일 듯이 달려든 걸 보면 제게 원한이 있는 것도 같았고요. 혹시 뭔가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있기만 할까…….

    밀리엄 켄트우드에게 있어 에드워드 녹스는 이른바 역린 같은 존재다.

    그렇게 되도록 그를 몰아간 장본인이 바로 제임스 로웰이고.

    그러니 이걸 두고… 핵심을 잘 짚었다고 해야 할지, 지뢰를 밟았다고 해야 할지.

    물론 그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야 하는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서 밀리엄의 대답을 기다렸다.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조금 불편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그가 이 상황에 어떤 설명을 꺼낼지 궁금하기도 했다.

    설마 사실대로 말할까? 여태 침묵해온 바가 있는데 새삼스레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지만 솔직히 거짓말을 하기엔 또 미묘한 상황 아닌가?

    그냥 별건 아니고 그놈이 당신 덕분에 감방을 가서 그렇다, 정도로 가볍게 넘길 셈이었다면 애당초 저렇게까지 뭔가 있는 티를 내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서늘하게 식어버린 밀리엄의 시선이 하얀 이불보를 스윽 훑더니 이내 제임스의 얼굴에 가닿는 장면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밀리엄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똑똑.

    노크소리가 고요한 1인실을 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제법 중요한 화제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제임스가 허어, 하며 긴장이 죄 풀린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밀리엄은 나직한 헛기침과 함께 입을 꾹 닫아버렸고, 내가 그런 그를 조금 야속하게 바라보는 사이 제임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들어오세요.”

    병실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윽고 문이 열렸다.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왕립수사국 제복을 갖춰 입은 멜리사 위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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