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0시를 향하여 (11)
그러고 싶지 않지만 여차하면, 정말 여차하면 좀 아깝더라도 다시 호수에 몸을 던진 다음 시간을 돌리자.
저 칼에 찔렸다가 여기서 더 재수가 없어 태엽을 감기는커녕 시계조차 꺼내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억지로라도 시간을 끌어보기 위해 에드워드 녹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총을 경계하는 것인지 아직 내게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실상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쇠붙이를 들고 벌이는 이 무모한 허세가 언제까지 먹혀들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침착함을 가장한 채 그를 불렀다.
“에드워드 녹스.”
섬뜩한 푸른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내가 자기 이름을 안다는 사실 때문인지, 이 상황에 그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반쯤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 왜 저런 표정을 짓지?
이런 데 의문을 가질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궁금증이 일었을 때, 그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를 아나 본데? 여러모로 신기하군.”
어떻게 아는지를 묻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안다는 사실 자체에는 뭔가 의구심을 품은 것 같다. 어째서 그런 사고로 이어지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렇지만, 사정없이 바로 달려들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대꾸를 해왔다는 점만큼은 호재였다.
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리볼버의 쿨타임이 찰 때까지… 아니, 밀리엄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나는 에드워드 녹스가 제발 수다스러운 악당이길 바라며, 그게 아니라면 저 눈에 피어난 알 수 없는 의문의 답을 나에게서 얻어내고자 하길 바라며 쏠 수도 없는 총을 똑바로 겨누었다.
“뭐가 신기하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
“그걸 모른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 녹스는 딱히 급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오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정원에서 들려왔던 밀리엄의 외침을 듣지 못했거나, 아니면 나를 향한 제 의문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두 번째 호재였다.
나는 물을 말이 있어서 아직 총을 쏘지 않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왜 날 죽이려는 거지?”
“배신자의 핏줄이니까.”
당황스러울 정도로 순순한 대답이었지만 불행히도 내가 곧장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미간에 절로 주름이 갔다.
배신자의 핏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조지 캠벨이었다.
그를 죽인 건 권총이었지만 남작부인과 아들 부부는 목이 졸려 죽었지. 그리고 나 또한 튜토리얼에서 교살당할 뻔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자정의 교살자’에게.
“혹시 백부님 가족을 죽인 게….”
“잘못 짚었는데 바로 맞췄네.”
“그게 무슨 소―”
“그것보단 아가씨, 나도 아가씨한테 몹시 궁금한 게 있거든.”
캠벨 남작 일가를 죽인 게 에드워드 녹스라니. 그런데 그 사실이 이렇게 허무하게 밝혀지다니. 게다가 잘못 짚었는데 바로 맞췄다는 말은 또 뭐란 말인가.
자신이 캠벨 남작 일가를 죽인 건 사실이나, 앞서 언급한 ‘배신자’는 조지 캠벨이 아니라는 뜻인가?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지만, 날 죽이려는 살인마의 어깨를 붙들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닦달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든 시간을 버는 일이다. 내 입장에선 아주 다행스럽게도 몹시 궁금한 게 있으시다니 몇 마디 정도는 더 이어갈 수 있겠지.
저 입에서 흘러나오려는 게 과연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일지는 모르겠지만, 대답할 수 없다면 없는 대로 머릿속을 더듬는 척 계속해서 대화를 유도해가며 최대한…….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뭐라고?
제게 겨눠진 총구 앞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선 에드워드 녹스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어오는 말에 나는 더없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살아 있냐니, 날 죽이려다 실패하고 도망친 건 자기면서 그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설마 저놈도 기억상실인 건 아니겠지. 제작진에게 생각이란 게 있다면 절대 그건 아닐 텐데.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려던 순간이었다.
쾅!
에드워드 녹스의 등 뒤로 굳게 닫혀 있던 테라스의 문이 거의 부서질 것처럼 요란하게 열렸다.
바깥을 향해 나부끼는 커튼 사이에서 나타난 인영이 빠르게 에드워드 녹스에게 달려들었다.
뒤늦게 반응한 에드워드 녹스가 몸을 돌리기 전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뒤통수에 또 다른 총구가 바싹 겨눠졌다.
“에드워드 녹스. 칼 버리고 움직이지 마라.”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기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듯 매섭고 서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밀리엄이 씹어뱉었다.
“베로니카, 괜찮습니까?”
사납게 웃으며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리는 오랜 원수에게서 시선과 총구를 떼지 않으면서도 그는 용케 잊지 않고 내 안부를 물어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차 싶어 급히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로웰 씨가 다치셨어요. 칼에 베이신 것 같았는데…….”
“부상자가 있습니다! 당장 마차를 대기시켜주십시오!”
내 말을 들은 밀리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활짝 열린 문 안쪽의 눈부신 연회홀에서 이쪽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개중 몇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누군가는 마차를 준비시키러 가는 것 같았고, 몇 명은 조심스럽게 테라스로 나와 제임스 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쓰러진 제임스의 상태를 살피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바닥에 자그마한 피 웅덩이가 보였다. 저 정도면 출혈이 심한 건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윽고 헉헉대며 테라스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수사국장 테오도어 와이엇이었다. 그는 등 뒤에 두어 사람을 대동한 채였는데, 한 명이 수갑을 든 것으로 보아 수사관인 모양이었다.
테오도어 와이엇의 뒤에 서 있다가 이쪽으로 달려온 둘은 에드워드 녹스의 등을 바닥으로 밀쳤다.
챙그랑. 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한 명이 에드워드 녹스를 누르는 사이 다른 한 명이 그의 팔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그러는 내내 에드워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던 밀리엄은 그의 양손이 완전히 포박된 것을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총을 내렸다.
그러고는 곁으로 다가온 테오도어 와이엇에게 빌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총을 건넸다.
나는 내가 언제쯤에 총을 내렸는지도 알지 못한 상태로 멍청하게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별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말하긴 뭣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그럭저럭 괜찮은가,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허물어지던 몸이 도중에 덜컥 멈췄다.
등을 감싸는 온기가 훅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바로 옆에 밀리엄의 얼굴이 있었다.
턱시도 상의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며 한쪽 팔로 나를 붙잡은 밀리엄이 다른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부축해주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등을 감싼 온기에 나직한 목소리가 더해졌다. 다행이라 말하는 것치고는 딱히 여유로운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심장 또한 여전히 소란스럽게 뛰고 있는 와중인데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그러나 안심과 진정은 또 별개였는지 나는 ‘내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까지 말해주는 밀리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렇게 괜스레 머물 곳을 찾지 못해 바닥을 맴돌던 시선이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정없이 제압당한 에드워드 녹스에게 가닿았다.
[ 인물정보 ‘에드워드 녹스’ 획득 ]
말없이 고개를 움직여 날 올려다보는 붉은 머리의 살인마 위로 불길한 시스템 문구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밀리엄과 닿은 순간 간신히 찾을 수 있었던 이유 모를 안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불길함이었다.
***
에드워드 녹스는 수사국으로 연행되었고, 제임스 로웰은 곧장 병원으로 옮겨졌다.
아스톤 홀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은 공교롭게도 성 조나단 병원이었다.
이미 한바탕 사건이 휘몰아치고 난 장소에서 다시 일이 터질 것 같진 않았지만 영 찜찜한 것도 사실이라, 가뜩이나 긴장되어 있던 몸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어쨌든 나는 밀리엄과 함께 수술실 앞을 지키며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에드워드 녹스가 체포된 순간 떠올랐던 시스템 문구는 불길하기 짝이 없으나 어찌 되었건 무사히 한고비를 넘겼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상황.
회중시계를 꺼내 새 데이터를 덮어씌우고 나자 금세 잃어버렸던 안정감이 다시 찾아들었다.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대충 이성을 되찾고 보니 제임스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기억 상실씩이나 되는 대형 떡밥을 안고 등장한 전작의 흑막이 이대로 맥없이 퇴장할 리 없다는 나름의 확신이 있어서였다.
순간 제임스가 아니라 밀리엄이 다쳤더라도 이렇게 태평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정말이지 맥락도 없고 쓸모도 없는 생각이었다. 가슴 한쪽이 시큰해지는 것 같지만 착각이겠지.
나는 잡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밀리엄이 조심스럽게 내 팔을 붙잡았다.
“괜찮습니까?”
아까와 같은 질문. 별것도 아닌 고갯짓 한 번에 돌아오기엔 퍽 과민한 반응.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와중에도 날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진중한 금빛 눈에 염려가 가득해서 괜히 겸연쩍어졌다.
“보다시피 다친 구석 하나 없이 멀쩡한걸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 말아요. 또 죽을 뻔했으면서.”
‘또’라는 말에 지레 당황해 헛기침이 나왔다. 호수에 빠졌을 때를 떠올린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