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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47화 (47/121)

47화. 0시를 향하여 (10)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에, 나는 테라스로 나가는 문 근처에서 어정쩡하게 서성이고 있는 제임스를 발견했다.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임스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멀지 않아 금방 닿을 수 있었다.

“아, 남작님.”

다가선 나를 발견한 제임스가 곧장 아는 체를 해왔다. 됐어! 이제 최소한 혼자 남을 일은 없다.

“켄트우드 씨는 수사국장님과 함께 잠시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나가셨습니다.”

“그렇군요.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어려운 부탁을 하신 것도 아니었는데요. ……그보다 남작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많이 안 좋기는요, 뭘. 그냥 좀 답답해서 그래요.”

안 좋기야 할 것이다. 잔뜩 긴장했던 것이 한 방에 반쯤 풀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데다가, 고민할 것도 있고, 머리는 또 더럽게 아프고…….

“잠시 바깥바람을 쐬시는 게 좋겠네요. 나가시죠.”

“어, 네?”

이, 이게 아닌데?

제임스 로웰은 부축하듯 내 팔을 자기 팔에 걸치게 한 뒤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덩달아 발이 움직였다.

테라스까지의 거리가 쓸데없이 가까워서, 나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린 것은 덤이었다.

떠밀린 걸음 끝에, 시원한 밤공기가 순식간에 폐부를 가득 채웠다. 남의 속도 모르고 환히 빛나고 있는 달빛이며, 그 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빌어먹을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시원해서 좀 살 것 같기는 했다. 문제는 저번에도 이랬다는 데 있었다. 잠깐 살 것 같았다가 곧장 죽음으로 내동댕이쳐졌더랬지.

나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찔해지는 기억에 있는 힘껏 도리질을 쳤다. 그게 컨디션 난조의 일환으로 보였던 건지 제임스가 걱정스레 말을 걸어왔다.

“남작님, 괜찮으십니까?”

“아, 안 괜찮은 것 같아요. 춥기도 하고, 얼른…….”

“얼른 켄트우드 씨를 찾아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정원에 내려가서,”

“두고 가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며 제임스의 팔을 붙들었다. 적잖이 당황한 듯한 제임스 로웰의 얼굴이 보였지만, 너무 불안해서 낭패감조차 들지 않았다.

정신 차리자. 그땐 혼자였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아. 밀리엄만큼 믿을 만하지는 않아도… 아니, 빌어먹을, 이런 생각은 도움이 안 된다.

“저, 정원에 있으면 여기서 부를 수 있을 테니까요. 괜히 번거롭게 내려가실 필요 없어요.”

“아, 그렇겠군요.”

나는 테라스 한가운데에 난간을 등지고 서 있었고, 제임스는 나와 마주 선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정원 쪽으로 멀어졌다.

내가 팔을 놓아주지 않은 탓에 난간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는 제임스의 어깨너머로 나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바스락.

저번에는 조심성 없이 난간에 기댄 채 밀리엄을 보느라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미약한 소리가 테라스 옆의 풀숲에서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냥 바람이 스쳐 간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풀숲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제임스가 밀리엄을 발견한 듯 몸을 일으킨 것과 거의 동시였다.

“켄트우드 씨! 돌아와 주셔야겠습니다! 남작님께서―”

“로웰 씨, 뒤에!”

나는 다급히 제임스를 향해 소리치며 그의 팔을 놓았다.

놀란 얼굴의 제임스 로웰이 몸을 휙 돌렸을 때, 풀숲에서 튀어나온 검은 옷의 괴한이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베로니카!”

등 뒤에서 밀리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급히 몸을 숙인 제임스와 괴한의 몸이 맞부딪쳤다. 칼을 치켜든 팔뚝을 간신히 붙잡은 제임스가 다른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상대의 턱을 밀었다.

나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손을 가까스로 움직여 리볼버 아이콘을 눌렀다. 묵직한 총의 감촉이 곧장 손에 잡혔다.

그러는 사이 괴한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말려 올라갔다가, 그걸 부여잡은 제임스에 의해 쭉 찢어져 내리며 얼굴이 눈이 들어왔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얼굴의 남자.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 매서운 푸른 눈.

튜토리얼 때의 그놈이다.

하지만 그때는 얼굴 아랫부분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는데, 왜 저 얼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나는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왼손으로 부여잡고, 대치 중인 두 남자 쪽으로 총구를 겨누며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때, 붉은 머리의 남자가 푸른 눈을 부라리며 포효하듯 소리쳤다.

“제임스 로웰, 잘도 나를……!”

분노에 찬 목소리에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가는 이름이 있었다. 총구가 흠칫 흔들렸다.

왜 진작 떠올리지 못했을까. 붉은 곱슬머리에 선명한 벽안.

그건 에드워드 녹스의 특징이었다.

이가 절로 악물렸다. 머리가 아파서이기도 했고, 자괴감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물론 변명거리가 없지는 않았다. <레드 헤링>은 내가 10년 전에 했던 게임이고, 에드워드 녹스는 주요인물이긴 했으나 주인공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베로니카와 접점이 없었다.

아니… 캐보면 뭔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랬다.

그래서 베로니카를 죽이려는 괴한과 에드워드 녹스를 연결 짓지 못했다.

애초에 탈옥했다는 정보를 접한 것부터가 제임스의 등장 이후였다. 당연히 죽은 줄 알았는데 색 조합 좀 같다고 곧장 연상할 수 있을 리가.

하지만 한순간의 아주 작은 의혹으로라도 떠올리지 못한 것은 내 패착이…….

아니, 아니다. 사형 집행 전에 탈옥해서 2년을 숨어 다닌 놈인데 미리 알았다고 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을까.

나는 두통과 자괴감을 가까스로 떨쳐내며 총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몸싸움 중인 두 사람. 미동 없이 고정되어 있어도 될까 말까 할 마당에 눈치라곤 없이 덜덜 떨리고 있는 총구.

성 조나단 병원 구관 지하실에서 밀리엄과 수잔 로이드가 대치할 때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좋지 못한 상황이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내 외침에 맞춰 제임스가 에드워드에게서 떨어질 여유가 없다.

운 좋게 떨어진다 해도, 저번처럼 상대에게 몸을 일으킬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니 에드워드가 곧장 뒤따라 달려든다면 제대로 조준할 자신이 없다.

심지어 당장 쓸 수 있는 총알은 단 한 발.

한 방에 맞추지 못한다면 리볼버의 쿨타임이 차거나 다른 누군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 밀리엄이 정원에서 여기가지 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칼을 든 에드워드와 달리 제임스는 맨몸이다. 저대로 계속 대치할수록 불리해질 텐데.

나는 두 남자 너머로 보이는 문을 힐끔 보았다. 연회홀로 연결되는 문이다. 닫혀 있고, 안쪽으로는 커튼이 쳐진 상태.

저기로 달려가서 문을 열고 사람들을 부르려면 총을 내리고 둘을 등져야 한다. 등 뒤를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건 사양하고 싶다.

허공에 총을 쏴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건 어떨까? 에드워드 녹스는 튜토리얼 때도 총상을 입고 밀리엄이 나타나 자기가 불리해지자 꽁무니를 뺀 전적이 있다.

하지만…….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제법 크다. 저 안쪽에선 더 크게 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 비명도 에드워드 녹스의 포효도 닿지 않은 거겠지.

그래 봐야 음악 소리인데 설마하니 총성이 묻히기야 하겠느냐마는, 만에 하나라도 묻혀버리면 아까운 총알만 낭비하는 셈이 될 터.

떠오르는 모든 방법이 전부 도박처럼 느껴진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입술을 잘근 깨무는데, 언제 제임스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것인지 에드워드 녹스의 오른팔이 빠르게 사선을 그었다.

“으윽……!”

북, 하고 천 찢기는 소리가 났다. 에드워드를 완전히 놓친 제임스가 배를 잡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투두둑 떨어진 핏방울을 밟고 에드워드 녹스가 다시 제임스에게 달려들었다.

제임스는 다행히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부상 때문인지 금방 밀릴 것 같았다.

에드워드 녹스의 칼날은 제임스 로웰의 목덜미 바로 옆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지만, 제임스가 아주 약간만 힘을 풀어도 곧장 목을 뚫어버릴 듯했다.

팔은 겹쳐져 있고, 제임스가 날 등지고 서서 에드워드 녹스의 몸을 가리고 있는 상태라 자세는 조금 전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이젠 정말 도박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나는 총구를 하늘로 들어 올리고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이 고막을 흔들었다.

더 버티지 못한 제임스가 쿨럭 기침을 토하고 쓰러진 것도 하필이면 그때였다.

그의 부상이 얼마나 심한지를 확인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총구를 도로 내렸다. 총구 끝의 에드워드 녹스가 제 뺨에 방울방울 튄 피를 손등으로 훔쳐냈다.

거친 숨소리.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향하는 시선. 어딘지 기묘한 것을 보는 듯한.

총성이 닿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바깥의 소음 정도로 치부하고 넘겨버린 것인지 커튼을 열고 테라스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어지간하면 들릴 거라고 생각해서 내 딴엔 가장 승산 있는 선택을 한 거였는데,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드워드 녹스가 내 리볼버의 맹점을 모르리라는 사실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겨누기만 한 채로 멈춰 있으면 금방 들켜버릴 것이다.

서늘하게 식은땀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등 뒤에 차가운 난간이 닿으며 소름이 오소소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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