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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46화 (46/121)
  • 46화. 0시를 향하여 (9)

    [ 1. 놀라셨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어요. ]

    [ 2. 실은……. ]

    이윽고 내가 기다리던 그것이 허공에 떠올랐다.

    세이브 지점과 배드엔딩 사이에 존재했던 단 하나의 선택지창.

    나와 밀리엄이 하고 있는 일을, 제임스 로웰에게 사실대로 설명하느냐 마느냐의 기로.

    지난번의 이 순간에 나는 1번을 선택했다.

    그때는 밀리엄과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가면서까지 제임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실은…….”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제임스 로웰은 <레드 헤링>의 주인공이었고, 결국 이렇게 <푸른 달리아>에까지 등장한 상태다. 그것도 기억상실이라는 아주 임팩트 있는 설정을 달고서.

    이 정도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 스토리에서 배제되는 게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에서 눈을 뜬 직후, 우리가 식당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의 일이었다.

    밀리엄 켄트우드의 지인이 아니라 <블루 달리아>의 플레이어로서 판단했을 때 제임스 로웰은 선택할 수 있다면 스토리에 깊숙이 끌어들여야 마땅한 인물이다.

    한번 죽을 뻔하고 나서야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니 우스운 노릇이긴 하지만 뭐, 반쯤 죽었다가 깨어나서 뒤늦게 개안이라도 한 모양이지.

    제임스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하는 한편으로 나는 식당에 들어서기 전 밀리엄과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메이슨 교단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임스 로웰에게 말입니까?’

    ‘네. 지금이야 기억을 잃으셨다곤 하지만 그래도 왕국 제일의 명탐정이셨던 분이잖아요. 분명 큰 도움이 되어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그건 어떨지…….’

    ‘본래 하시던 것과 비슷한 일이니까, 어쩌면 기억을 되찾는 데도 도움이 될지 모르고요. 밀리엄도 로웰 씨가 하루빨리 기억을 찾으셨으면 좋겠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하고 말끝을 흐린 밀리엄은 한참을 고민에 잠기는가 싶더니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 말에 수긍해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 내키지 않는 기색이긴 했다. 하기야 존재 자체가 전혀 달갑지 않고 결코 신용할 수도 없는 인간과 함께 행동하는 게 어디 즐거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나로서는 정말이지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이 선택이 옳아서, 밀리엄이 그런 괴로움을 감수할 만했다고 여길 법한 결과가 나오길 바랄 수밖에.

    자기 자리에 앉은 밀리엄은 내 설명이 자선 파티 초대장에 대한 것으로 이어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식에도 손대지 않은 채로 그저 가만히 제임스를 지켜보았다.

    제임스는 마땅찮은 티를 팍팍 내는 밀리엄의 눈치를 중간중간 보면서도 내가 하는 말을 칼같이 알아듣는 듯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함께 조사에 임해달라는 말도 흔쾌히 수락했다.

    그 대답이 너무 달가워 보였던지라 나도 모르게 밀리엄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 아슬아슬한 기분을 맛보긴 했지만, 어쨌거나 대화는 계획대로 순탄하게 풀렸다.

    “그러니까 로웰 씨도 꼭 저희와 함께 파티에 참석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마침내 가장 실질적인 목적에 가까운 제안을 건네며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제임스 로웰은 당연히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돌렸다가, 밀리엄의 표정이 방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실망한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내 착각이겠지만.

    ***

    뭔가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의 시간은 아주 소소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지난번과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밀리엄과 둘이 의상실 순회를 한 것도, 드레스며 액세서리 대금의 대부분을 밀리엄이 부담한 것도, 그가 아주 센스 있는 쇼핑 파트너라는 사실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제외해야 할 소소한 부분이란, 오며 가며 나눈 잡담의 내용이 아니면 대부분 제임스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내가 제임스도 연미복이 없을 테니 같이 쇼핑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가 정중하게 거절당한 일이라던가, 체격이 얼추 비슷한 밀리엄이 제임스에게 옷을 빌려주기도 한 일이라던가, 뭐 그런 것들.

    나는 오히려 그렇게 큰 변화가 없는 편이 좋았다.

    겨우 두 번째라 그런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썩 지루하지도 않았고, 어느 정도 변인통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만에 하나 또 일이 잘못되어서 마지막 남은 회중시계를 사용하게 될 경우도 고려는 해두어야 하니까.

    마지막 회중시계에는 일단 식당에 들어서기 직전 시점을 저장해둔 상태다.

    첫 번째 회중시계로 이미 확인했듯 세이브 자체는 지난 데이터 위에 덮어씌우는 식으로 여러 번 다시 하는 것이 가능하니, 거기까지는 낭비가 아닐 터였다.

    여차할 때 회중시계 아이콘을 빠르게 누를 수 있도록 나름대로 틈틈이 훈련도 했다.

    배드엔딩 분기점을 완전히 알아내 해결한 것이 아닌 탓에, 나는 반쯤 시한부 인생을 사는 기분으로 자선파티까지의 며칠을 보내야 했다.

    당연하게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그 바람 같은 흐름을 따라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끝내 다시 계단 앞에 선 뒤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지난번 내 체력을 반 토막 냈던 바로 그 계단은 내 불안감 탓인지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욱 험난한 난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저번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밀리엄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 범의 아가리 같은 아스톤 홀로 들어섰다.

    그 이후로도 모든 것이 큰 변화 없이 흘러갔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내용 또한 거의 엇비슷했다. ‘그 명탐정’ 제임스 로웰이 살아 돌아와 켄트우드 저택에서 머물고 있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하는 이야기가 추가된 정도였다.

    어김없이 금색 브로치를 달고 나타나 옛 부하 밀리엄을 당황하게 만든 수사국장 테오도어 와이엇은 제임스 로웰을 보고도 꽤 반가워했다.

    살아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다, 어서 기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혹시 날 보고 뭔가 기억나는 건 없냐, 내가 한때 당신을 특채로 스카우트하겠다고 제법 열심히 쫓아다녔더랬다…….

    나는 시스템창이 반응하지 않는 TMI가 수사국장의 입에서 줄줄 나오는 걸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의 주의가 밀리엄에게 향한 틈을 타 제임스에게 슬쩍 손짓을 했다.

    상체를 낮춰달라는 내 손짓을 알아본 제임스가 허리를 숙였다. 먼발치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베네딕트 홀터스를 곁눈질하며 나는 제임스의 귓가에 내 용건을 전달했다.

    내가 잠시 동안 조금 성가신 사람을 상대하고 와야 하는데, 혹시 그사이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더라도 당신은 연회홀 안에 남아 있어달라는 말이었다.

    밀리엄에게 나가지 말아달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밀리엄이 수사국장으로부터 정보를 캐낼 기회와 내 부탁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내 부탁이 결과적으로 그가 국장에게서 얻어올 정해진 정보의 내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해도 그랬다.

    굳이 표현하자면 심정적인 문제였다. 이미 제임스를 끌어들여 밀리엄을 괴롭게 만들었으니, 이 이상의 곤란함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떠넘기고 싶지 않다는… 뭐 그런.

    우습고 말이 안 되는 발상이라는 건 알았지만 달리 주워섬길 마땅한 표현이 없었다.

    에라이. 나는 찝찝한 기분으로 목 뒤를 긁적였다.

    제임스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베네딕트 홀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캠벨 남작님!”

    그 뒤의 전개도, ‘조금 성가신 사람’이 이 인간이냐고 표정으로 물어오는 제임스를 향해 눈을 찡긋해준 것 외에는 기억하는 장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더 의식적으로 그렇게 흘러가도록 만들어야 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베네딕트 홀터스는 지난번과 다르지 않은 말로 나를 데려가려 했고, 나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의견을 따라 세 사람을 두고 이동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가슴에 금색 링 브로치를 단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아리아 오큘러스를 만났다. 그녀의 경고도 지난번과 같았다. 누군가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군요.

    그러나 같은 말을 들었는데도, 이번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지난번에 아리아 오큘러스의 말을 듣고 떠올린 것은 튜토리얼 때의 습격과 침입자의 흔적이었지만 이번엔 떠올릴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까.

    하필 저 말을 들은 직후 나간 테라스에서 내 등을 밀었던 누군가.

    그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아리아 오큘러스의 말이 협박보다 경고에 가깝게 들렸다.

    베로니카 캠벨의 목숨을 노리는 누군가가 아리아 오큘러스 본인이라면 습격에 바로 앞서 굳이 저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게 정말 예언일까?

    오늘 모종의 이유로 베로니카를 죽이려는 누군가가 여기에 있고, 아리아 오큘러스는 그 사실을 알지만 베로니카가 죽지 않길 바라고, 그러면서도 그 모종의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없어서 예언 같은 형태로 경고를 전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아리아 오큘러스가 예의 그 중요한 존재 어쩌고 하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뒤, 날 둘러싼 이들에게서 벗어나 눈으로 연회홀 곳곳을 훑으며 머리로는 그런 생각을 거듭했다.

    두통까지 반복되는 건지 저번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메이슨 교단.

    베로니카 캠벨을 노리는 누군가.

    그 둘이 별개거나, 최소한 완전히 같지만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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