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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45화 (45/121)
  • 45화. 0시를 향하여 (8)

    다급하고 경악에 찬 목소리를 인지하기 무섭게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거센 힘이 훅하고 등을 밀쳐왔다. 난간에 기대고 있던 몸이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얼핏 붉은 머리칼 같은 것이 보였다고 생각한 순간에는 이미 추락하고 있었다.

    누군가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군요.

    아리아 오큘러스의 목소리가 바람소리와 함께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몸은 땅 대신 호수 위로 떨어졌다.

    머리부터 땅에 박아 즉사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할 법했으나 이어진 상황은 불행에 한없이 가까웠다.

    갑작스런 입수에 대비하지 못한 입과 코로 물이 밀려 들어왔다. 팔다리를 내저어보아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줄 알았는데, 애석하게도 공포보단 고통이 앞섰다. 괴로워서 무서워할 새도 없었다.

    젠장, 이것보단 차라리 머리가 깨져서 한 방에 가는 게 나았을 텐데! 밧줄에 목이 감겼을 때도 이보다는 덜 아팠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런 분노가 치미는 와중에도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다행이었다.

    얼음으로 살을 찢는 듯 차갑고 아득한 고통 속에서 힘겹게 눈을 떴을 때, 기적처럼 회중시계 아이콘이 시야에 잡혔다.

    나는 버둥거리던 손을 뻗어 아이콘을 눌렀다. 동그랗고 묵직한 회중시계가 곧장 오른손 안에 들어왔다.

    간신히 눈을 뜬 채 왼손을 움직였다. 온몸의 구멍을 통해 계속해서 물이 차오르는 듯한 괴로움을 이겨내며 가까스로 태엽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고 태엽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내 온 세상이 먹먹해졌다.

    ***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열린 입을 통해 들어온 것은 물이 아니라 적당히 시원한 실내의 공기였다.

    나는 오른손에 들려 있던 회중시계가 가루로 변해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걸음을 내디뎠다. 마지막 계단.

    왼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자각한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자 한 발 앞에서 내 손을 잡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밀리엄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갑자기 속이 울컥했다. 눈물이 나온 것은 아니었으나 대신 목구멍이 뜨끈해졌다.

    안심이 되어서 그런가. 좀 반가운 것 같기도 하고.

    “계속 그렇게 엉뚱한 데 신경을 쓰니 자꾸 넘어지는 겁니다.”

    발밑을 조심하랬더니 빈손은 괜히 왜 들여다보고 있었냐는 물음이 함축된 한숨과 함께 걱정 어린 잔소리가 이어졌다.

    덕분에 몽글대는 감정에서 빠져나온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왼손을 빼기 위해 슬쩍 힘을 주었다.

    그러나 밀리엄은 도리어 힘을 주어 내 손을 꾹 잡았다. 바라는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뚫어지도록 쳐다보며.

    “……앞으론 조심할게요.”

    조금 억울한 것과는 별개로, 내 입에서 어물어물 흘러나간 반성의 말은 퍽 진솔하게 들렸다.

    조심성이 부족해 등 뒤로 접근하는 괴한을 눈치채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구사일생해 돌아온 참이라 그런지 오기를 부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이 순간의 밀리엄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있었던 일’이므로 어쩔 수 없이 양심이 쑤셔온 것이다.

    내가 군말 않고 순순히 조심하겠다고 말하자 밀리엄은 그제야 내 손을 놓아주었다.

    왼손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스르륵 사라졌다. 먼저 손을 빼려고 했던 주제에, 우습게도 그 부재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미친 생각이군.

    나는 헛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짧게 도리질을 쳤다. 영영 할 필요 없는 생각인 데다가, 지금 고민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우선은 확인부터.

    아이콘을 눌러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 사건정보와 인물정보를 연달아 살펴보았다. 예상했던 대로의 결과를 확인한 뒤 수첩을 덮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식당으로 향하고 있는 밀리엄의 뒷모습이 보였다. 생각을 갈무리한 나는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그를 따라잡으며 입을 열었다.

    “밀리엄, 잠시만요.”

    지금 식당에 가면 제임스 로웰이 있을 것이다. 그가 있는 식당으로 돌아가기 전에 밀리엄과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걸음을 멈춘 밀리엄이 나를 돌아보며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이 생각보다 가까웠다.

    급하게 따라잡은 탓에 멈추는 타이밍이 좀 늦은 모양이었다. 슬그머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물론 이런 종류의 고민이 으레 그러하듯 뾰족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냥 부딪쳐보자는 결론은 전혀 뾰족하지 못하다. 그러나 개중 그럴듯해 보이기는 했다.

    밀리엄은 성격이 급한 편이 아니었지만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결심을 굳힌 뒤 곧장 입을 열었다.

    “로웰 씨에게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요? 우리가 하고 있는 조사에 대해서요.”

    ***

    자, 생각해보자.

    나는 메이슨 교단에서 주최한 자선 파티에 참석했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 호수에 빠져 죽는 배드엔딩을 맞이할 뻔했다.

    내가 순수한 플레이어 입장이었다면 엔딩 수집이나 할 겸 그대로 한번 죽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베로니카 캠벨의 몸에 빙의해 있는 이상 그런 모험은 불가하다. 진짜로 죽어버릴지 누가 알아.

    그러니 일단은 죽을 뻔한 것을 사실상의 배드엔딩이라고 간주해 보기로 한다.

    자, 다시.

    나는 배드엔딩을 맞이했다.

    그리고 스토리 게임의 엔딩에는 반드시, 그곳으로 향하게 된 분기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그런 엔딩으로 이끌었는가? 나는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그릇된 선택을 한 것일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테라스로 나간 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조금 더 뒤로 돌아가 보자면 밀리엄과 떨어진 것이 패착이었는지도 모른다.

    보다 디테일하게 들어갈 경우엔… 자선 파티에서 만난 이들, 그러니까 테오도어 와이엇이나 베네딕트 홀터스나 아리아 오큘러스와의 대화에서 내가 무언가를 해야 했거나, 또는 하지 말아야 했는지도 모르지.

    나는 내 선택이 정확히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고, 그렇다고 루프물 주인공처럼 수십 차례 선택을 달리해가며 결과를 실험해볼 수 있는 형편도 되지 못한다.

    이제 내 수중에 남은 회중시계는 제임스와의 조우로 획득한 하나뿐이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앞으로 한 번은 또다시 죽을 위기에 처해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는 뜻이지만, 글쎄올시다.

    향후의 시나리오에서 최대 몇 개를, 어느 정도 간격으로 획득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 와중에 마지막 남은 하나를 가볍게 허비해버려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위기의 순간에 반드시 회중시계를 사용할 여유가 주어지리라는 법도 없다.

    일단 지금의 목표는 회중시계를 추가로 사용하는 일 없이 이 구간을 넘기는 것.

    그리고 그러자면, 어느 시점에서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할 것인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확신할 수 없다면 납득이라도 할 만한 근거가 필요하다.

    나는 문제의 근거를 얻기 위해 수첩을 확인했다. 혹시 하는 마음이었는데 다행히 예상대로였다.

    수첩에는 내가 분명 시스템창으로 획득을 확인했던 세 가지 정보가 누락되어 있었다.

    키워드 레나 엘모어.

    테오도어 와이엇과 아리아 오큘러스의 인물정보.

    켄트우드 저택의 계단을 밟으며 데이터를 저장해놓은 시점부터 호수에 빠지기 전까지 모아둔 그 정보들은, 되감긴 시간을 기억하는 내 머릿속에나 남아 있을 뿐 수첩에선 지워진 상태였다.

    ‘베로니카 캠벨’이 테오도어 와이엇을 만난 것이나 모친의 과거에 대해 들은 것, 메이슨 교단의 성녀 아리아 오큘러스와 대면한 것은 내가 시간을 되돌리면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여기, 이 빌어먹을 게임 속에 들어온 이래 내 나름대로 열심히 지켜온 대전제가 하나 있다.

    ‘시스템이 무언가에 반응한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유의미하다.’

    쉽게 말해 시스템상으로 획득 알림이 뜬 정보들은 스토리 전개를 위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적재적소에서 획득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 대전제대로라면 자선 파티에 참석해 수사국장과 성녀를 만나고 베로니카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은 건 내 실수의 부산물이 아니라 전개상 필요했던 일들이다.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으니 다시 겪어서 수첩에 채워 넣어야 한다. 그러므로 최소한 그러기 위해 해야 하는 선택만큼은 오답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아닐 터.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 건 잘못된 선택이다. 그럼 세 정보 모두 다시 얻지 못할 테니까.

    파티에 참석하되 밀리엄과 갈라지지 않으면, 테오도어 와이엇과는 만날 수 있겠지만 베네딕트 홀터스에게 레나 엘모어의 이야기를 듣고 아리아 오큘러스를 만나는 전개가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무엇이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역시 테라스로 나간 것이 문제였을까? 머리가 깨질 것 같아도 보는 눈이 많은 실내에서 밀리엄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나?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이번에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나는 절대 혼자서 테라스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답이고 거기가 분기점이었다고 단정 짓고 안심하기엔 아직, 앞선 근거로 증명되지 않은 선택의 순간이 하나 남아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정면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갑자기 나가시기에 놀랐습니다. 많이 중요한 편지였나요?’ 하는 질문을 방금 막 던져온 제임스 로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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