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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44화 (44/121)

44화. 0시를 향하여 (7)

이…… 이렇게 만난다고?

마음의 준비고 준비운동이고 나발이고 할 새도 없이 이렇게 대뜸?

나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인사를 받았으니 나도 인사를 해야겠다는 발상까지는 어찌어찌 생각이 미쳤으나, 말이 혀 끝에 매달려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물론 교단에서 주최하는 자선파티에 참석했으니 메이슨 교단의 성녀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조사해볼 예정이긴 했다. 이 파티에 성녀가 참석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원체 두문불출하는 대단하신 위인이라기에 직접 마주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짐작해서, 그냥 먼 발치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정도만 염두에 뒀지 본인과 만났을 때의 작전 같은 건 세워두지 않았는데!

그런데 이게 뭐야! 아주 대놓고 만나주잖아!

“저,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성녀님. 베로니카 캠벨입니다…….”

반쯤 얼떨떨한 상태에서 어찌어찌 인사까지는 건넬 수 있었지만, 머릿속이 성녀의 드레스를 구겨넣어놓은 것처럼 새하얘진 터라 다른 말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내가 말을 이어가지 않고, 수상쩍기 짝이 없는 성녀님도 말을 이어가지 않고, 베네딕트 홀터스를 비롯해 주변에 모인 사람들도 무어라 입을 열지 않는 기묘한 침묵이 한동한 이어졌다.

이건… 내가 뭔가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인가. 아니면 무려 성녀님씩이나 되는 분을 직접 배알한 미물답게 얌전히 입을 닫고 저 양반께서 하문하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인가.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뻣뻣하게 서서, 기능이 정지된 머릿속을 어떻게든 복구하기 위해 기를 썼다.

그러나 나의 그런 노력은, 아리아 오큘러스가 난데없이 두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들어 올림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졌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손을 잡고 난리야, 진도 왜 이래?

퍼스널 스페이스를 예고 없이 침범해버리는 성녀님의 박력에 당황한 나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성녀 주위를 반원 모양으로 둘러싼 사이비 교도들의 표정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평온했다.

아무래도 이건 아주 여상스러운 상황이고, 당황한 사람 역시 나뿐인 모양이었다.

나는 성녀의 넓고 기다란 소매가 덮어버린 내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도 성녀의 손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지만, 실크장갑 속에서 움찔거리는 내 손을 미동 없이 꾹 부여잡고 있는 두 손의 느낌만은 쓸데없이 분명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가면 속의 눈이 기도하듯 꼭 감겨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조금 소름이 끼치기도 해서, 나는 힘겹게 입술을 떼어 그녀를 불렀다.

“서, 성녀…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베일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또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눈을 뜬 성녀와 시선이 맞닿았을 때.

“누군가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군요.”

저런, 세상에! 하는 탄식이 곁에 있던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를 어쩌냐며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걱정스런 눈으로 날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반응에 신경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별안간 머리 위로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나는 성녀가 부드럽게 내려놓은 손을 천천히 말아 쥐며 방금 들은 말을 침착하게 되새겼다.

누군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그건 분명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튜토리얼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교살당할 뻔했고, 지금은 누군가 침입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방을 버려둔 채 밀리엄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성녀라는 여자가 그런 사실을 꿰뚫어보았다고 놀라기엔……, 글쎄.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나는 켄트우드 저택의 금고에 고이 모셔져 있을 메이슨 교단의 ‘예언서’를 떠올렸다.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굵직한 사건들이 적혀 있던.

진짜 예언서라고 믿겠다면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범죄계획서에 가까울 바로 그 책.

어쩌면 저 여자가 방금 꺼낸 말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알고 있다는 투시나, 앞으로 일어날 테니 주의하라는 예언 따위가 아니라.

그 일의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일종의 자백, 혹은 협박 같은 것.

나는 거짓말처럼 눈높이가 꼭 맞는 성녀와 다시 한번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면전에서 남의 목숨 운운하는 이야기를 꺼내놓고도 언제 그랬냐는 양 평온하기 그지없는 시선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방금 한 말은 정말로 협박일까. 협박이라면 무엇에 대한 협박이지?

밀리엄과 함께 교단의 뒤를 캐고 있는 것에 대한?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런 거라면 내 목숨만 노릴 이유가 없을뿐더러, 최초의 습격과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마땅히 떠오르는 이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대로 계속 자기네 뒤를 캐고 다니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이외에 달리 무엇으로 방금의 발언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베로니카 캠벨과 메이슨 교단 사이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접점이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말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계속 눈을 맞추고 있자니, 아리아 오큘러스가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부디 몸조심하도록 하세요. 당신은 저희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니까요.”

그러나 이어진 말은 그 전의 발언보다도 훨씬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설마 협박이 아니라 진짜 충고였나? 하지만 그것 또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나는 아리아 오큘러스에게 해야 할 마땅한 질문을 찾아내지 못했고, 흰 옷의 성녀는 용건을 마쳤다는 듯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

맥이 빠져버린 나는 아까부터 주위를 감싸고 있던 이 징그러운 사이비 교도들이 그녀를 따라 사라져주기를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처음에 그녀와 함께 나타났던 것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성녀가 떠난 뒤에도 계속 자리에 남았다.

그들은 ‘중요한 존재’라는 성녀의 말 때문인지, 오히려 한층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내게 다가서려 하고 있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이들에게서 메이슨 교단에 대한 정보를 캐내야 한다는 다짐 위로 끔찍한 피로가 내려앉아 정신을 더욱 흐릿하게 만들었다.

일단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 벗어나서 생각을 정리하든 밀리엄에게 돌아가든 해야겠어.

결심을 굳힌 나는 베네딕트 홀터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병원장님. 죄송하지만 머리가 조금 아파서요. 친구분들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혼자서 바람을 쐬고 오고 싶은데…….”

“실례라니 무슨 그런 매정한 소리를 하십니까. 저쪽으로 가시면 테라스로 나가실 수 있습니다. 호수가 바로 내려다보여서 경치가 아주 근사하죠. 안내해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저쪽이라고 하셨죠? 감사합니다.”

나는 따라나서려는 베네딕트 홀터스를 대충 떼어놓고서, 그가 가리킨 테라스 쪽으로 걸어가는 척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밀리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사국장과 함께 어디 다른 곳으로 이동한 걸까.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밀리엄을 찾는 걸 포기한 나는 차선으로 테라스행을 선택했다. 바깥공기를 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중간중간 알아보고 인사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 눈에도 내 안색이 영 좋지 못했던 모양인지, 테라스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은 그리 길거나 고되지 않았다.

넓은 테라스에는 다행히 선객이 없었다. 문이 닫히고 안쪽에서 도로 커튼을 치자 정신없는 연회홀과 완전히 분리된 듯한 느낌에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테라스 난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말마따나 바로 밑에 펼쳐진 호수가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풍경이 퍽 아름다웠다.

호수는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 네모반듯했다. 그리고 그 네모난 호수를 빙 둘러 산책로 같은 것이 나 있었다.

턱을 괸 상태 그대로 달빛이 일렁이는 호수를 내려다보며 머릿속을 정리해보려는데, 산책로를 걷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둘 다 키가 컸지만 한쪽은 곰처럼 커다란 풍채를 자랑했고,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익숙한 조합. 테오도어 와이엇과 밀리엄이었다.

바깥공기 때문인지 아까보다 아주 약간 흐트러진 듯한 밀빛 머리칼이 걸음에 맞춰 아른아른 흔들렸다.

어딜 갔나 했더니 밖으로 나가서 안 보였던 거였군. 먼저 흩어지자고 한 쪽은 나인데도 괜히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가, 돌연 실소가 터져 나왔다.

찾을 때 나타나주지 않았다고 야속하다니 미쳤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밀리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왠지 그가 이쪽을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정말로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대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해준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쯤은 덜 외롭고 덜 막막하고… 아무튼 기분이 꽤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때.

마법처럼 밀리엄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눈을 깜빡였다. 딱히 훔쳐보다 들킨 것도 아닌데 괜히 광대뼈 언저리가 뜨끈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눈이 마주치기까지는 금세였고, 나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밀리엄은 조금 놀란 듯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손을 들었다.

정확히는, 손을 들려던 것 같았다.

“베로니카!”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색이 된 것만은 분명한 얼굴로 밀리엄이 내 이름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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