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0시를 향하여 (6)
몇 걸음을 걸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밀리엄과는 한참 떨어져버렸으리라는 느낌이 들 즈음, 말없이 걷던 베네딕트 홀터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머님을 많이 닮으셨군요.”
정말로 뜬금없는 발화였지만 내용 때문인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베로니카의 어머니 얘기를 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휙 돌려 베네딕트 홀터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희 어머니를 아시나요?”
생각해보면 나는, 차라리 밀리엄이나 제임스에 대해 알면 알았지 베로니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빙의한 몸의 기억이 머릿속에 자동입력되는 형편 좋은 버프 같은 건 애석하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베로니카의 집에 있는 단서들이나 이런저런 상황을 조합해 자질구레한 정보를 유추해보는 정도였다.
조지 캠벨의 유산을 물려받기 전까지는 가정교사와 비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거나, 암만 봐도 친구라곤 없는 것 같다거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었다는 것도 그렇게 알게 된 몇 안 되는 정보 중 하나였다.
지난번 캠벨 저택에 갔을 때 알게 된 사실과 합쳐보자면, 어렸을 때 양친을 잃고 백부인 캠벨 남작에게 맡겨져 박대받는 성장기를 보낸 거겠지.
부친이 조지 캠벨의 남동생인 것까지는 안다. 하지만 모친이나 외가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는 바가 전무했고, 그 점에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다.
나는 은연중에 베로니카의 과거나 가족사 따위가 <블루 달리아>의 스토리에서 크게 중요한 비중을 가지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설령 중요하게 작용한다 한들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 계기가 캠벨 남작 일가 사망사건인 만큼, 추후에 뭔가 더 알게 되더라도 당연히 캠벨 가문과 관련된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 얘기가 나오다니. 심지어 말을 꺼낸 이는 메이슨 교단 소속일 것이 분명한 인간이다. 메이슨 교단과 베로니카의 접점은 조지 캠벨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나는 굉장히 꺼림칙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베네딕트 홀터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금세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안다고는 못하지만요.”
베로니카 캠벨의 모친이라. 얼마나 중요한 사안일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한때 그저 그런 속물 엑스트라라고만 생각했던, 그러나 이제 보니 의외의 정보를 쥐고 있는 듯한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병원장님.”
“예, 남작님.”
“사실 저는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다는 사실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요.”
“이런, 제가 괜한 이야기를…….”
“아니에요. 병원장님께서 어머니를 아신다니 오히려 기쁜 걸요. 저,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나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아주 작은 흔적이나마 붙잡아보려는 가련한 딸을 연기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아이고, 물론입니다. 딸이 어머니 이야기를 알고 싶다는데 괜찮지 않을 리가요.”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리라는 것 정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먼저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 게 저쪽이기도 하고, 애초에 베네딕트 홀터스는 병원 후원 건으로 베로니카에게 잘 보여야 할 입장이니 이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베네딕트 홀터스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레나는… 아, 죄송합니다. 남작님의 어머님께서는 엘모어 보육원에서 가장 영특한 아이였지요. 저희 부모님이 진지하게 입양을 고려하신 적도 있으니, 그때 이야기가 잘 풀렸더라면 남작님께서 제 조카가 되셨겠습니다, 하하.”
재미도 없고 실도 없는 농담과 함께 이어진 베네딕트 홀터스의 이야기는 ‘아주 잘 안다고는 못한다’던 말대로 다소 두서없이 흘러갔다.
베로니카의 모친인 ‘레나 엘모어’는 베네딕트 홀터스의 부모가 후원하던 엘모어 보육원의 원생이었다.
베네딕트 홀터스가 레나 엘모어를 알게 된 것은 부모를 따라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보육원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는 모양.
[ 키워드 ‘레나 엘모어’ 획득 ]
베네딕트 홀터스의 입에서 ‘레나 엘모어’라는 이름이 나오자 시스템창이 반응했다. 쓸모 있는 정보이긴 한 모양이었다.
“성함도 이제야 안 마당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어머니께서 보육원 출신이신 줄은 몰랐어요.”
“그 점 때문에 헨리 캠벨 씨와 결혼하실 때 조지 경께서 제법 거세게 반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형제의 연을 끊네 마네 할 지경까지 갔다던가요. 아, 그래도 결국엔 받아들이고 축복해주셨으니 작고하신 남작님을 너무 원망하지는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축복했다면 동생 부부가 남긴 외동딸을 그런 식으로 대했을까, 그래도 용케 안 버리고 거둬주긴 했군,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그게 뭐 중요할까 싶어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아무도 거둬주지 않아 시설에 보내지는 것과 백부의 저택에서 핍박받으며 자라는 것 중 어느 쪽이 어린 베로니카에게 그나마 더 나은 일이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글쎄.
진짜 베로니카도 아니고, 베로니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베로니카를 딱히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끼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닌 입장에서 따질 문제는 그게 아닐 터였다.
나는 ‘작고하신 남작님을 너무 원망하지는 마셨으면 좋겠다’는 베네딕트 홀터스의 표현 쪽에 조금 더 집중했다.
저번에 윌 그렉슨이 보였던 것과 비슷한 태도였다. 죽은 조지 캠벨을 심히 존중하는 언사. 심지어 저 작자는 그를 원망하지 말아달라며 두둔하기까지 한다.
암만 죽은 사람 욕은 하는 게 아니라지만, 일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공표된 인간인데 예의상으로라도 굳이 저렇게까지 실드를 쳐줄 필요가 있나?
여기서 ‘혹시 저희 백부님과 친분이 있으셨나요?’ 같은 질문을 하는 건 좀 위험할까?
그건 그렇고, 그래서 레나 엘모어에 대한 정보가 뜻하는 바는 뭐지?
그렇게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베네딕트 홀터스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보폭에 맞춰 걷기를 한참, 마침내 그가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주변이 부쩍 소란스러워진 것을 느끼고 잠시 사위를 둘러보았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베네딕트 홀터스가 나를 인도한 곳은 당혹스럽게도 연회홀의 중심부였다.
베네딕트 홀터스는 짐짓 자랑스러운 투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주변에 모인 이들은 말해줄 필요도 없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는데, 하나같이 가슴께에 금색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와, 어떡하지.
나 지금 사이비 소굴에 있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가 싶더니, 이내 이걸 갑작스럽다고 느끼는 나 자신이 몹시 한심해졌다.
이건 남작님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을 소개시켜드리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곧장 예상했어야 하는 전개였다.
성 조나단 병원은 메이슨 교단 소유고 베네딕트 홀터스는 성 조나단 병원의 원장이며 가슴에 저 빌어먹을 금색 링 브로치를 달고 있다. 고로 베네딕트 홀터스는 사이비다.
사이비가 사람들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럼 그들이 누구겠는가. 사이비겠지!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을 꾹 억누르며 눈앞의 사이비들을 향해 열심히 영업용 억지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명 한명 인사를 건네오는데 이름이며 얼굴이며 도무지 머리에 들어와 박히질 않았다.
시스템창이 조용한 걸 보니 그냥 엑스트라 사이비들인가보다 하는 어림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시각각 뇌세포가 공회전을 하는 듯한 기분 속에 지쳐가고 있는데, 갑자기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옆으로 쫙 물러섰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홍해의 기적인가 싶어 이리저리 움직이던 눈길 끝에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모세… 아니, 웬 여자가 보였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가면이었다. 얼굴의 윗부분을 가리고 있는 가면 아래로 불투명하고 하늘하늘한 재질의 흰 베일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베일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베일의 끝은 드레스와 어우러져 제대로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금사가 수놓인 새하얀 드레스는 그 모양새가 이 자리에 있는 누구의 드레스와도 달라서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부드럽게 바닥을 지나는 드레스 자락을 확인하고서 다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나는, 상대의 연한 갈색 머리칼 위에 성화 속의 광륜처럼 얹어져 있는 동그란 금빛 머리장식을 보았다.
여기 모인 사이비들의 가슴팍에 꽂혀 있는 브로치를 커다랗게 만들면 꼭 저런 모양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정체를 직감할 수 있었다.
베일이 달린 가면.
‘나는 성스럽다’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듯한 저 수상쩍은 행색…….
“어…….”
“캠벨 남작님. 남작님께 저희 성녀님을 소개시켜드릴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베네딕트 홀터스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부드러이 움직인 ‘성녀님’은 어느덧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한 치의 비틀림 없이 정면으로 마주한 채 거리는 가깝고 키는 같아서, 내가 잠시 전신거울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맛보고 있을 때였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베일 너머에서 가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나서 반가워요, 베로니카 캠벨 남작님. 아리아 오큘러스입니다.”
투명한 유리구슬이 은쟁반 위를 도르르 굴러가는 것만 같은 목소리.
[ 인물정보 ‘아리아 오큘러스’ 획득 ]
가면에 뚫린 구멍 안쪽에서 얼핏 금색으로도 보이는 밝은 갈색 눈이 맑고 청명한 빛을 내며 나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