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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42화 (42/121)
  • 42화. 0시를 향하여 (5)

    나는 시선을 정면으로 유지한 채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다행히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은 밀리엄뿐이었다.

    “밀리엄, 사람들이 하고 있는 금색 브로치 말인데요.”

    “당신도 봤군요. 아마 교단 관계자임을 뜻하는 표식이겠지요.”

    밀리엄이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나는 일단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 브로치를 단 사람들이 정확히 교단의 무엇인지까지는 추측하기 어려웠다.

    그냥 신도라는 뜻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일정 수준 이상의 간부라는 표식일 수도 있겠고…….

    밀리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뭐지 싶어 들어 올린 시선 끝의 밀리엄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한층 더 멀끔한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살짝 기울였던 고개를 그의 눈길이 향하는 쪽으로 슥 돌렸다.

    누가 봐도 나와 밀리엄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왼쪽 가슴께에 달린 브로치를 발견한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남자가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밀리엄이 반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국장님.”

    “세상에, 이게 누구야. 켄트우드!”

    국장님이라고 불린 남자는 연미복 대신 각 잡힌 검은색 제복 차림이었다.

    남자의 가슴팍에는, 아마도 메이슨 교단 관계자를 의미할 금색 브로치 말고도 묘하게 낯이 익은 은색 배지가 달려 있었다.

    어디서 본 배지인지를 떠올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저것과 꼭 같은 모양의 배지를 달고 있던 사람을 둘이나 안다.

    멜리사 위브.

    그리고 왕년의 밀리엄 켄트우드.

    “오랜만에 뵙습니다. 와이엇 국장님.”

    “자네, 이게 대체 얼마만인가? 그리 매정하게 관두고 나가서는 몇 년을 편지 한 통 없이…….”

    “괘씸한 옛 부하 아닙니까. 달가워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해서.”

    “달가워하지 않기는. 자네가 내 밑에서 일한 세월이 있는데!”

    아무래도 밀리엄의 옛 상사인 듯한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두드렸다. 브로치와 배지가 나란히 달려 있는 바로 그 가슴팍이었다.

    남자의 손짓에 맞춰 흔들리는 두 장식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밀리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연락을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보다 베로니카. 소개가 늦었지요. 여기 계신 분은 왕립수사국장 테오도어 와이엇 씨이십니다. 국장님, 이쪽 숙녀분은…….”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어. 새로운 캠벨 남작님 아니신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작님. 테오도어 와이엇이라고 합니다.”

    [ 인물정보 ‘테오도어 와이엇’ 획득 ]

    나는 반짝 떠오른 시스템창을 힐끔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고 인사에 화답했다.

    “아…, 베로니카 캠벨입니다. 저야말로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국장님.”

    “와이엇 씨라 불러주셔도 되는데요.”

    “저는 밀리엄이 부르는 대로 불러드리고 싶은데 혹시 불쾌하신가요?”

    광택도 옅은 주제에 쓸데없이 미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브로치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다가 냅다 던진 아무 말에, 테오도어 와이엇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밀리엄의 팔이 조금 움찔하는 것도 느껴졌다.

    그러나 고개를 기울일 새도 없이, 테오도어 와이엇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하하하! 불쾌할 리가요!”

    “그, 그러시다니 다행,”

    “켄트우드. 자네가 남작님께 푹 빠져서 답지도 않게 수표를 펑펑 뿌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제 보니 남작님께서도 자네에게 제대로 빠지신 모양이군!”

    아, 방금 그게 그런 뜻으로 들릴 법한 말이었나? 그럼 뭐 다행인데.

    나는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소가 된 기분으로, 켄트우드 저택의 하녀가 심혈을 기울여 예쁘게 틀어 올려준 머리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뒷목을 긁적이며 생각했다.

    “국장님, 그런 말씀은 남작님께 결례입니다.”

    “아, 나도 모르게 신이 나서 그만……. 혹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남작님.”

    “앗, 아니에요! 전혀 불쾌하지 않았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밀리엄의 팔에 걸쳐뒀던 손까지 풀어가며 황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이 아가씨가 너한테 푹 빠졌네 어쩌네 하는 주책맞은 소리를 면전에서 하는 게 객관적으로 실례냐 아니었냐 하면 솔직히 실례에 가깝겠다는 생각은 물론 들었다.

    그러나 불쾌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인 데다, 지금은 저 문제적 브로치를 단 수사국장과의 대화를 어떻게든 호의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괜한 소리를 꺼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뻔했던 밀리엄을 향해 은근히 눈을 흘기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메이슨 교단으로 연결될 법한 화제를 생각해보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냈다.

    테오도어 와이엇은 떡 벌어진 어깨와 곰 같은 몸집만큼이나 목소리가 크고 호탕하며 발언에 다소 거침이 없는 성격으로 보였다.

    광대뼈 부근에 희미한 홍조가 든 데다 손에 들린 술잔이 반쯤 비어 있는 것을 보면, 아주 조금이지만 취한 것 같기도 했다.

    밀리엄의 옛 상사이면서, 현재는 메이슨 교단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듯한 남자. 인물정보가 추가된 걸 보면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 위인도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도 테오도어 와이엇의 얼굴과 가슴께의 금색 브로치를 번갈아 보며 찝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밀리엄에게 나름대로 불타는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내 시선이 빛을 발한 건지, 마침내 밀리엄이 입을 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캠벨 남작님!”

    어디선가 분명 들은 것 같긴 한데 어디서 들었는지는 바로 떠오르지 않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별안간 나를 불렀다.

    나는 조금 맥이 빠진 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미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또 다른 중년의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 걸어왔다.

    부르는 톤을 보아 확실히 초면은 아닌 듯한 남자가 가까워지는 동안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어디서 보았었는지 생각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천만다행히도 나의 노력은 ‘실례지만 뉘신지’ 따위의 대사를 뱉을 일 없이 빠른 결실을 맺었다.

    “아, 홀터스 원장님.”

    나를 부르며 다가온 남자의 정체는 성 조나단 병원의 속물 원장, 베네딕트 홀터스였다.

    “다치신 곳은 이제 괜찮으십니까? 퇴원하신 뒤로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풍채 좋은 수사국장과 나란히 서니 꼭 곰과 기린 같은 인상을 주는 홀쭉한 병원장은, 예의 그 과장된 표정으로 자본주의의 냄새가 진동하는 걱정을 쏟아냈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로 신경 써주신 덕분에 지금은 씻은 듯이 나았어요.”

    “아이고, 그거 정말 다행입니다. 아, 와이엇 씨와 켄트우드 씨도 계셨군요!”

    베네딕트 홀터스가 뒤늦게 테오도어 와이엇과 밀리엄에게 아는 체를 했다.

    곁에 누가 있는지는 신경도 쓰지 못할 만큼 내게 집중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정말 이제야 발견한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는 늦게나마 인사를 주고받는 세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뭐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상황이 조금 오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였다.

    그 느낌의 정체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작님. 와이엇 씨가 간만에 만난 옛 부하와 회포를 풀고 싶으신 모양인데, 남작님께선 저와 함께 잠시 홀 안을 둘러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베네딕트 홀터스가 에스코트하겠다는 듯 내 쪽으로 팔을 굽히며 물었고, 나는 그에게 한번 눈길을 주었다가 밀리엄과 수사국장을 번갈아보았다.

    밀리엄은 나와 마찬가지로 조금 당황한 것 같았으나, 테오도어 와이엇은 양해를 바란다는 듯 웃고 있었다.

    순식간에 입안이 텁텁해진 채 다시 시선을 돌리자 베네딕트 홀터스의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남작님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답니다. 꼭 소개시켜 드리고 싶습니다만.”

    안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오는 병원장은 이미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든 끝내 날 데려가고 말 101가지 방법을 준비해둔 사람처럼 기세등등했다.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여기서 밀리엄과 함께 있고 싶다고 어떻게든 뻗대는 것과, 흔쾌히 베네딕트 홀터스를 따라가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정보를 모으는 데 유용할 것인가?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기가 몹시 애매한 자문이었다. 그러나 선택을 하기는 해야 했다.

    나는 내 곁에 선 세 남자의 눈치를 차례차례 살핀 끝에 다소 꺼림칙하게나마 결정을 내렸다.

    “그, 그럼… 두 분이서 회포를 나누실 수 있게 병원장님과 저는 잠시 실례하도록 할까요?”

    내 말에 베네딕트 홀터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테오도어 와이엇은 ‘그거 참 감사한 말씀’이라며 밀리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괜찮겠냐는 듯 불안한 시선을 보내는 밀리엄에게 코끝을 찡긋해 보이고서, 나는 병원장이 내민 팔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 병원장의 가슴팍에서 탁한 빛을 내고 있는 금색 브로치 쪽으로 천천히 눈길을 내렸다.

    상대가 둘이니만큼, 여기서는 각개전투를 하는 것도 방법일 터.

    그렇게 돌아선 등 뒤로 밀리엄과 수사국장이 멀어지는 것을 힐끔 돌아본 나는 이내 베네딕트 홀터스가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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