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41화 (41/121)

41화. 0시를 향하여 (4)

하얀 장갑을 낀 주먹에 가려진 입술이 숨길 수 없는 호선을 그리고, 눈매 또한 보기 좋게 휘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선은 곧게 나를 향해 있었다.

정확한 영문은 모르겠으나 퍽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 눈빛을 나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요. 확실히.”

밀리엄이 두어 번의 유쾌한 헛기침 끝에 짤막하게 덧붙였다. 마차가 덜컹 흔들렸다.

나는 대충 그 또한 예쁘고 반짝거리는 드레스며 보석 따위를 잔뜩 보고서 기분전환을 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잠시간 그러고 있자니, 그래도 주의 정도는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돌연 들었다.

예쁘고 반짝거리는 걸 보는 것도 좋고, 그걸 가지는 건 더 좋고, 하나만 고르기 위해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는 기분이란 솔직히 정말 최고였지만…….

마냥 생각 없이 즐거웠다, 하고 끝내자니 별안간 조금 찝찝한 느낌이 찾아든 것이다.

“밀리엄. 모르나 본데 나는 되게 염치가 없는 편이거든요. 얻어먹는 것도 좋아하고, 선물 받는 것도 좋아하고.”

“하하, 그거 다행이군요. 혹시 불쾌했을까봐 걱정했습니다.”

“불쾌하진 않았어요. 대신 계속 지금처럼 퍼주다가 살림살이 거덜나도 나는 책임 안 져줄 거예요.”

아무리 실감이 안 나기로서니 대부호씩이나 되어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튼 나는 그런 농담으로라도 ‘당신이 나에게 이것저것 너무 퍼주고 있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보기 좋게 휘어진 눈꼬리와 능청스러운 목소리였다.

“그건 조금 유감이군요. 책임져달라고 졸라볼 심산이었는데.”

응……?

어째 예상과는 많이 다른 반응이었던 터라, 나는 조금 당황해서 반쯤 입을 벌렸다.

어딘지 모르게 달큰한 미소가 문제인지 뭐가 문제인지, ‘책임진다’의 어감이 다소 미묘하게 들려온 것이다. ……십중팔구 착각이겠지만.

내가 어정쩡하게 입을 벌린 채 ‘어……’ 하며 뺨을 긁적이자, 그런 내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밀리엄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입니다. 나도 그 정도로 대책 없는 인간은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그, 그래.

이 반응이지.

비로소 예상했던 대답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다음 순간 다시 의문에 사로잡혔다.

안도라니. 내가 왜 안도 같은 걸 하고 있지?

나는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이 기이한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고, 마차는 계속해서 굴러갔으며, 확실한 것은 밀리엄의 기분이 다른 때보다 퍽 좋아 보인다는 사실뿐이었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야속할 정도로 느리게 흐른다고 생각했던 시간은, 내가 평화로운 초호화 식객 라이프에 아쉬움을 느끼는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달콤했던 평화가 미련 한 줄기 남기지 않고 스쳐간 자리에 남은 것은, 당최 어느 위험천만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스토리 진행에 다시금 임해야 하는 나의 서글픈 입장뿐이었다.

요약하자면, 대망의 자선파티날이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 아스톤 홀 ]

‘지도’에 새로운 장소가 추가되었다.

한 손으론 밀리엄의 에스코트를 받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서 마차에서 내린 나는 계단 위의 저택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스톤 홀은 그새 이름을 까먹은 아무개 왕 시절에 지어진 유서 깊은 저택으로 본래는 왕가의 사유재산이었는데, 십수 년 전 재정난에 시달리던 왕실에서 경매에 내놓은 것을 메이슨 교단이 낙찰받으면서 교단 소유가 되었다나 뭐라나.

문화유산 수준의 가치를 가진 왕실의 부동산을 경매에서 낙찰받을 정도로 탄탄한 금력을 가진 사이비 종교란 말이렷다?

알게 모르게 점점 커져가는 듯한 스케일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 와중에 눈치도 없이 계단은 또 어찌나 많은지!

내 발치에서 건물 입구까지 기다랗게 이어진 대리석 계단들을 한칸 한칸 밟아오르자니 슬금슬금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개중 움직이기 편한 것을 골랐는데도 현대인 기준에는 한없이 치렁치렁하기만 한 드레스를 입고 도각거리는 구두를 신은 채 마주한 계단은 정말이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원수 같았다.

나는 있지도 않은 HP 게이지가 초 단위로 뚝뚝 떨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위의 커다랗고 새하얀 저택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감미로운 음악소리조차 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번엔 다 쓰러져가는 폐병원에서 팔자에도 없는 장애물 달리기를 시키더니 이번엔 계단 등반이냐? 다음엔 번지점프도 시키겠네, 이 빌어먹을 게임 같으니!

나는 밀리엄의 손을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머리로만 설핏 인식한 채, 내심 씩씩거리며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고지에 도착했을 때는, 솔직히 스토리 진행이고 메이슨 교단의 비밀이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당장 땅바닥에 주저앉아 헉헉거리고 싶은 것을 베로니카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위해 꾹 참고 서 있자니, 문앞에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초대장을 요구했다.

나는 팔뚝에 걸쳐둔 작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초대장을 빠르게 확인한 남자가 내게 물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캠벨 남작님. 옆의 신사분은 일행이십니까?”

여기서 ‘보면 모르냐’고 볼멘소리를 하면 그게 바로 진상이고 갑질이겠지…….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베로니카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 그런 추한 짓은 하지 말도록 하자.

나는 몰아치는 육체적 피로 앞에 고삐를 풀고 날뛰려 드는 성질머리를 꾹 찍어누르며 ‘맞아요.’하고 웃어 보였다. 딴에는 필사적인 노력이 깃든 웃음이었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밀리엄이 제 손 위에 얹어진 내 손을 부드럽게 끌어 자기 팔에 걸치며 남자를 향해 말했다.

“밀리엄 켄트우드입니다.”

아, 일행이면 이름을 알려달라는 소리였구나. 같이 온 게 뻔히 보이는데 일행인지는 왜 물어보나 했네.

내심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던 음악소리가 대번에 커지고, 환한 불빛과 다채로운 색채가 미처 준비되지 않은 눈앞을 흐트러트렸다.

뒤이어 목소리를 가다듬은 고용인이 ‘베로니카 캠벨 남작님과 밀리엄 켄트우드 씨’를 외쳤다.

나는 밀리엄의 팔에 팔짱을 낀 채 건물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완전히 실내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한 일인데도 괜히 어깨가 움찔 떨렸다.

밀리엄이 왜 그러냐는 듯 내려다보는 통에 조금 민망해지긴 했지만, 갑작스런 운동으로 잠시 가출했던 정신이 빠르게 돌아온 것은 호재였다.

음악과 담소가 뒤섞여 흐르는 저택 안은 언젠가 외국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화려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넓은 1층 홀 곳곳에 와글와글 모여 자기들끼리 떠들거나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쭉 훑어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아는 얼굴은 없었지만, 그에 반해 들려오는 이야기는 대부분 퍽 익숙한 것들이었다.

저 아가씨가 새로운 캠벨 남작인가 보다, 밀리엄 켄트우드와 교제 중이라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눈이 맞다니 둘 다 보통내기는 아니다, 벌써 동거 중이라는 얘기도 있다…….

전부 사실이거나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으므로 새삼 불편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 밀리엄에겐 다를까 싶어 슬쩍 고개를 올렸는데 별안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내 팔이 걸쳐진 팔을 자기 몸 쪽으로 더 바싹 당기더니 살포시 눈을 접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입안에 달큰한 기운이 감도는 듯한 착각을 맛보며 나는 요리조리 눈을 굴렸다.

눈을 맞추기가 괜히 민망해지는 눈빛이었다.

그…… 저런 눈을 보고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하는 건가? 하필 금색이라 잘하면 진짜 떨어질 것도 같은데.

연기를 참 본격적으로 디테일하게 하네……. 심지어 능숙해! 난 저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는데.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가는 와중에도 밀리엄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정말이지 꿋꿋하고 프로페셔널한 자세였다.

더 들여다봤다간 나까지 이상한 착각을 하게 될 것만 같은…… 와, 이미 굉장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잖아?

어쨌든 그 또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듯했으므로,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치고 재빨리 고개를 도로 내렸다.

그 순간 나직한 한숨소리 비슷한 게 들린 것도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여하간 우리는 졸지에 좀 전보다 더 바싹 붙은 채 1층 로비를 지나 연회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홀 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째선지 밀리엄 쪽을 보기가 좀 껄끄러워진 터라 최대한 주변을 살피는 데 집중하던 나는, 연회홀 곳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이 왼쪽 가슴께에 똑같은 모양의 금색 브로치를 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브로치는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어떤 장식도 더해지지 않은, 얇고 동그랗고 광택이 옅은 금색 링. 크기는 오백원 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정말로 단순하기 그지없는 모양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럿이서 같은 것을 착용하고 있는 광경이 오히려 눈에 띄었다.

저런 게 장식용으로 유행을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마 뭔가를 증명하기 위한 표식 같은 거겠지. 이런 데서 써먹자니 좀 죄책감이 드는 예시지만, 굳이 예를 들자면 사랑의 열매처럼 말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짐작하고 나니 그 뒤로는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 자선파티의 주최만 생각해봐도 브로치의 정체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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