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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40화 (40/121)
  • 40화. 0시를 향하여 (3)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오, 켄트우드 씨! 오랜만에 찾아주셨군요!”

    만면 가득 반가움의 미소를 머금은 채 큰 소리로 외친 남자는 금세 나와 밀리엄 앞까지 도달했다.

    밀리엄을 부르며 다가온 주제에 그는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말하기를.

    “누추한 가게에 걸음 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캠벨 남작님.”

    고급 정장을 빼입은 두 남자, 화사한 가게 안에 죽 늘어서 있는 고급 드레스들.

    어느 모로 보나 여기서 가장 누추한 존재는 단조롭고 수수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암녹색 드레스를 걸친 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진심으로 영광이라는 듯 제 가슴팍에 손을 갖다 대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루크 시릴이라는 자기 이름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아, 네에…….’ 하며 얼결에 인사를 받았다.

    내가 캠벨 남작인 걸 어떻게 알았냐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밀리엄과 좋은 마음으로 만나고 있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를 처음 꺼낸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성 조나단 병원 사건 이후 밀리엄이 사실상 내 보호자를 자처하며 매일같이 병원에 드나든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고.

    그러니 지금 정도면 밀리엄 켄트우드가 캠벨 남작과 교제 중이라는 소문이 이곳저곳에 발 빠르게 퍼진 뒤일 것이다.

    확신에 차서 대뜸 인사부터 건네온 용기에는 조금 놀랐지만, ‘밀리엄과 단둘이 의상실을 방문한 숙녀’가 베로니카 캠벨일 것이라는 판단 자체는 전혀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건 그렇다 치겠는데…….

    “이게 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켄트우드 씨.”

    “시릴 씨가 남성복 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셨다면 더 자주 뵐 수 있었을 텐데요.”

    “하하, 민망하게도 그쪽으로는 통 영감이 떠오르질 않아서요.”

    “농담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퍽 화기애애하게 안부를 주고받는 두 남자를 보며, 밀리엄이 어떻게 이런 여성복 가게에서 ‘간만에 방문한 단골’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일지를 고민해보았다.

    “저야 잘 지냈지요.”

    ……답은 싱거울 정도로 금세 나왔다.

    시릴 씨는 시종일관 밝은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짠한 시선으로 밀리엄을 바라보았고, 매 순간 무언가 할 말을 전하려다 포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서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몇 년 전까지는 여동생과 왔던 가게였으리라는 걸.

    그렇게 또다시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듯한 기분으로 밀리엄을 보고 있자니, 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시릴 씨에게 이쪽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작님께서 급하게 파티에 참석할 일이 생기셨는데, 새 드레스를 맞추기엔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서요.”

    “아, 그래서 저희 가게를 찾아주신 거로군요. 잘 알겠습니다. 어디 보자, 제 생각에 남작님께는…….”

    그리고 시작된 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신선하다면 신선한 경험이었다.

    맹금류를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빠르게 스캔한 시릴 씨는 직원을 불러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지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체구가 작고 마른 편이시니 무슨 디자인이 어쩌고, 혈색이 좋은 편이시니 무슨 색 계열이 어쩌고.

    외계어처럼 들리는 설명이 줄줄 흘러나오는 광경을 멍하니 보던 나는 치수를 재야겠다는 직원 둘에게 이끌려 탈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땐 이미, 십수 벌은 족히 되어 보이는 드레스들이 눈앞에 늘어서 버린 뒤였다.

    “자, 어떻습니까. 남작님. 마음에 드시나요?”

    “어어……, 전부 다 정말 예쁘네요.”

    맹세컨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눈앞에 줄 지어선 드레스들은 정말이지 하나하나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평가였고, 엄밀히 말해 전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개중 몇 벌 정도는―베로니카에게 퍽 어울릴 것 같다는 감상과는 별개로― 너무 부담스럽게 화려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어떻게 말해야 저 시릴 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그것들을 후보에서 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 세 벌은 꽤 화려하군요. 베로니카, 마음에 듭니까?”

    밀리엄이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내가 부담스러워하고 있던 세 벌을 귀신같이 집어낸 상태였다.

    “그, 솔직히 저한테는 너무 화려한 것 같은…….”

    밀리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난데없이 백화점 VIP가 된 기분에 적응하지 못해 허둥대고 있는 나 대신 ‘이 세 벌은 도로 가져가주셔도 될 것 같다’는 의사를 전해주었다.

    보기만 해도 부담스러웠던 세 벌이 사라지고 난 뒤, 나는 꿈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흔들리는 정신을 최대한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순간.

    “시릴 씨. 여기 있는 드레스들을 켄트우드 저택으로 보내주시겠습니까?”

    “그럼요.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눈을 번쩍 뜬 채 밀리엄을 응시했다.

    하지만 내 시선을 받은 그는 부드럽게 눈을 휠 뿐이었다. 뭐가 문제인지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를 더 경악하게 한 것은 그 뒤에 이어진 밀리엄의 행동이었다.

    갑자기 겉옷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대뜸 만년필과 수표책을 꺼내드는 게 아닌가?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챈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황급히 밀리엄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자 그는 물끄러미 내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저기, 밀리엄. 일단 저걸 다 사는 건 너무 많은 것 같고요.”

    “이번 시즌에 파티를 하나만 참석하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건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네요. 하지만 내 옷이니까 계산은 내가 할게요.”

    “그럼 내 입장이 곤란해지는데요.”

    “밀리엄 입장이 왜요?”

    “대금을 지불할 게 아니면서 파트너의 쇼핑에 동행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니까요. 시릴 씨가 나를 한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니, 그게 대체 어느 나라 상식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정말로 이 세계의 상식일지 모를 밀리엄의 주장 앞에 조금 주춤했다.

    그리고 그때 밀리엄이 다시 한번 부드럽게 눈을 휘더니, 만년필을 든 손으로 내 손을 덮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럴 때가 아니면 내가 달리 언제 친애하는 상대에게 선물을 안겨주는 즐거움을 누려보겠습니까?”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진 눈을 본 순간, 정말이지 속절없이 말려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쇼핑은 네댓 군데의 의상실을 순회한 뒤에야 끝이 났다. 짧게 소회하자면,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시간이었다.

    마지막 의상실을 나설 때 나는 당최 드레스를 몇 벌이나 장만한 건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부득불 우겨서 힘겹게 얻어낸 두어 벌을 제외한 나머지 대금을 전부 밀리엄이 치렀다는 것이다.

    밀리엄은 내가 이의를 제기할 때마다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대금을 지불할 게 아니면서 파트너의 쇼핑에 동행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라거나, 친애하는 상대에게 선물을 안겨주는 즐거움이 어쩌네 하는 말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왕 연인 사이를 표방할 거라면 제대로 하고 싶다, 우리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는 해주어야 남들도 의심없이 우리가 교제 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뭘 저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해 돈을 쓰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사주고 싶다는데 한사코 거절만 하기도 뭐해서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밀리엄의 돈이나 베로니카의 돈이나 도무지 진짜 돈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역시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한바탕―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쇼핑을 끝내고 난 후 올라탄 마차에서, 밀리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너무 과하게 군 거라면 미안합니다.”

    그는 제 행동이 다소 볼썽사나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한 사람처럼 말했다.

    덕분에 나는 그를 향해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하게, 라…….

    돈을 좀 과하게 쓰는 것 아닌가 싶긴 했지만 그거야 본인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고.

    내 옷을 사는 데 나보다 더 열성적이긴 했지만 딱히 못 봐줄 정도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밀리엄은 굉장히 도움이 되는 쇼핑 파트너였다.

    그간 알게 모르게 관찰이라도 해온 것인지 경이로울 정도로 내 취향을 훤히 꿰고 있는 데다, 내가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칼 같이 알아차리고 대신 설명해주는 살뜰함까지 갖춘 완전체.

    맘에 드는 것 여러 개를 놓고 고민이라도 할라치면 대뜸 전부 계산해버리는 게 유일한 흠이랄 수도 있겠으나, 기실 나는 그런 걸 흠이라고 여길 만큼 염치 있는 인간이 못 되었다.

    요컨대 나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밀리엄과의 쇼핑에 제법 만족한 상태였다.

    막말로 내가 언제 또 이런 호사스러운 경험을 다 해보겠는가? 밀리엄은 내게 사과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에이, 즐거운 경험이었는걸요.”

    “어…… 즐거웠습니까?”

    “예쁘고 반짝거리는 걸 보면 기분전환이 되잖아요.”

    내 말에 이번에는 밀리엄이 눈을 깜빡였다.

    선명한 금빛 눈이 눈꺼풀 아래로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수차례, 그는 별안간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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