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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39화 (39/121)
  • 39화. 0시를 향하여 (2)

    그 정도로 만나기 어려운 인물이 자리하는 것으로 공언된 자선 파티라면, 교단 입장에서도 제법 중요한 행사라는 뜻이리라.

    내 손에 들린 것은 그런 행사에 당당히 참석할 수 있는 티켓이고…….

    나는 지난 며칠간의 올인클루시브 호캉스 같은 호사가 마침내 막을 내리고, 비로소 또 다른 스토리 진행의 막이 오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밀리엄과 눈을 마주했다.

    “친절하게도 일행동반을 권장해주기까지 했으니, 응해주는 게 도리에 맞겠죠.”

    조금 사납게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밀리엄이 말했고, 나는 말없이 동의를 표했다.

    이윽고 서류철을 덮어 다시 서랍에 집어넣고 돌아온 그가 ‘이제 그만 식당으로 내려갈까요?’하고 물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재를 빠져나와 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식당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아까 전 보았던 제임스 로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난데없이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지.

    갑자기 식당을 나서는 나와 밀리엄의 모습은 분명 대단히 부자연스럽고 수상해 보였을 것이다.

    만약 이대로 식당에 들어섰을 때, 제임스가 무슨 일이시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별수 없는 일이었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내가 딴생각에 잠겨 있느라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발은 이미 헛디뎌버린 뒤였고 난간을 잡기에도 늦어버렸다. 나는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베로니카!”

    밀리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게 되리라는 찰나의 상상과 달리, 몸과 계단이 부딪치는 충격 대신 허리를 휙 감싸오는 단단한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떠보았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훅 가까워진 밀리엄 켄트우드의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역시 그 집에 혼자 두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건 고맙지만.”

    나직한 속삭임이 한숨과 함께 귓가를 파고들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무어라 답할 새도 없이 다음 말이 이어졌다.

    “함께 있는데도 손이 닿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어요.”

    한 손으론 난간을 잡고, 다른 쪽 팔로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밀리엄은 내 몸을 번쩍 끌어당겨 들어 올리더니 한 칸 아래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나는 일순 붕 떴다가 사뿐히 내려앉는 두 발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녹색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며 흔들렸다.

    밀리엄은 허리를 감싼 팔을 풀며 나를 가만히 보다가, 이내 안 되겠다는 듯 몇 계단 아래로 내려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제대로 내려갈 건데요.”

    “발밑을 조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두 번이나 확인한 뒤라 썩 믿음이 가지 않는군요.”

    그는 지난번 지하실에서의 일까지 언급하며 내민 손을 조금 더 가까이 들어 올렸다.

    솔직히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결국 그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차근차근, 두 쌍의 걸음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발밑을 다시 보니 1층까지 남은 계단이 제법 많았다. 말마따나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자각이 그제야 들었다.

    설마 ‘계단에서 굴러 사망’ 같은 허망한 배드엔딩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재수가 없어 잘못 굴렀다면 목이 부러져 죽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소름이 오소소 끼쳤다.

    나는 밀리엄의 손을 잡지 않은 손을 움직여 회중시계 아이콘을 눌렀다.

    튜토리얼 직후까지의 데이터를 저장해두었던 회중시계가 손에 잡혔고, 나는 시계 뚜껑을 다시 열었다 닫았다.

    [ 저장 완료 ]

    시스템창이 나타났다가 스르륵 사라지기 무섭게, 두 발이 계단에서 완전히 내려섰다.

    ***

    돌아온 식당에는 여전히 제임스가 있었다. 막 식사를 마친 모양인지 고용인이 그의 앞에 놓인 빈 접시를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물이 든 유리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던 제임스의 시선이 식당으로 들어서는 나와 밀리엄에게 향했다.

    그의 눈빛에 서린 지대한 궁금증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밀리엄과 함께 다시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그때, 잔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두드린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던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나가시기에 놀랐습니다. 많이 중요한 편지였나요?”

    이런 질문을 해도 좋은 입장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듯 퍽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어조.

    내게 온 편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만큼 제임스의 눈길은 내게로 향해 있었다. 질문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대답 또한 내 몫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별안간 선택지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 1. 놀라셨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어요. ]

    [ 2. 실은……. ]

    ……별로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오히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상황이 된 탓에 난감해졌다.

    1번은 기실 대답이 아니라 차단에 가까웠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이 먹히기에 나와 밀리엄이 보인 행동은 이미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웠다.

    이건 그러니까, ‘네 알 바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설명해줄 의사가 없으니 쓸데없이 궁금해하지 말라’는 면박의 완곡한 표현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2번을 고르자니 ‘실은…….’ 뒤에 무슨 설명을 붙이라는 건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준비된 거짓말은 없다. 그렇다면 정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야 하나? 말한다면 어디까지 말해야 하지?

    어떤 식으로든 설명을 하기 시작하면 그 뒤로 이어질 질문을 차단할 수 없다.

    질문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호기심에 응해주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셈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질답을 이어가다 보면 결국엔 나와 밀리엄이 캠벨 남작 일가 사망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합심했고, 지금은 그 연장으로 메이슨 교단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말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밀리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말없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속뜻이 읽히지 않는 진중한 얼굴로.

    저 남자는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바라고 있을까? 돌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내가 제임스 로웰에게 미주알고주알 전부 털어놓으면, 제임스에게 지독한 앙금이 남아 있는 밀리엄으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가만히 밀리엄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추후 내게 어떤 불이익으로 다가올 것 같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밀리엄 켄트우드를 속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저 남자는 고작해야 게임 캐릭터일 뿐인데 우습게도 그랬다. 그래서.

    “놀라셨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나는 제임스 로웰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부자연스럽지만 명백한 회피에 제임스는 ‘그렇군요.’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호기심이 남은 표정이었으나, 이쪽에서 말해주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이상 굳이 두 번 세 번 캐물어 올 일은 없을 터였다.

    맞는 선택을 한 것인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고용인들이 새로 내온 음식 위로 시선을 떨어트리고 식기를 들었다.

    그렇게 잠시간 식탁 위에 감돌던 어색한 침묵을 깨트린 이는, 의외로 밀리엄이었다.

    고상한 동작으로 식기를 움직이던 그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불렀다.

    “참, 베로니카.”

    “네?”

    “의상실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

    그러고 보니 베로니카에겐 파티에 입고 갈 만한 옷이 없었다.

    초대장엔 별도의 드레스 코드 따위가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파티씩이나 되는 자리에 평상복을 입고 갈 수는 없으리라.

    옷을 사러 가긴 해야겠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닫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나에게, 밀리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만에 외출을 해야겠군요.”

    당연히 함께 가겠다는 투였다.

    ***

    늦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서, 나는 밀리엄이 미리 대기시켜놓은 마차를 타고 그와 함께 시내의 의상실을 찾았다.

    밀리엄은 출발에 앞서 마부에게 몇 개의 주소가 적힌 메모를 건넸는데, 뭐냐고 물었더니 오늘 들러볼 가게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성복을 전문으로 하는 의상실에 일가견이 있는 밀리엄 켄트우드라니 왠지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파티에 입고 갈 만한 드레스를 취급하는 고급의상실은 고사하고 베로니카가 본래 옷을 사 입던 가게조차 모르는 입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마차가 향하는 곳으로 잠자코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달려 마차가 멈춰선 곳은,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선 고급상점가였다.

    밀리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나는 대낮인데도 별천지처럼 반짝이고 있는 눈앞의 풍경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윽고 밀리엄은 바로 앞에 위치한 의상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부담스럽게 화려하지 않으면서 아주 세련된 느낌을 주는 드레스 두어 벌이 쇼윈도 안쪽에서 눈부신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가게였다.

    “어서오세… 어머, 켄트우드 씨!”

    의상실에 들어서자 늘씬한 몸에 맵시 있는 드레스를 입은 직원이 밀리엄을 알아보았다.

    밀리엄은 말없이 모자 끝을 살짝 들어 보이며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런 밀리엄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무언가 떠오른 모양인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터뜨린 직원은 잠시만 기다리시라는 말을 남긴 채 가게 안쪽으로 포르르 달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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