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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36화 (36/121)
  • 36화. 레드 헤링 (9)

    다짜고짜 자기 집에서 지내는 게 어떻겠냐니, 물론 당황스러운 말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굳이 거절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밀리엄을 대할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결심과는 별개로, 그와 함께 움직이는 시간이 많을수록 좋으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스토리를 진행시켜서 엔딩을 봐야 하는 마당에 한가하게 집이나 보러 다니며 시간을 까먹고 싶지도 않았고.

    게다가 어떻게 된 게 혼자 있기만 하면 데드엔딩 문턱을 밟게 되는 것 같단 말이지…….

    요컨대 나는 ‘혼자 있는 게 너무 위험하다’는 밀리엄의 말에 백번 동의했다.

    고맙게도 먼저 제안해줬는데 그걸 왜 마다하겠는가.

    애당초 나는 내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보람이나 스릴 따위를 위해 구태여 고행을 자처할 정도로 근성 있는 플레이어였던 역사가 없는 사람이다.

    아이템과 조력자는 십분 활용하라고 있는 거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밀리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곧장 마차에 올라 그의 집으로 왔다.

    지금 다소 어정쩡한 상태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이유 때문이다.

    향긋한 허브차 향기가 코끝을 맴도는 가운데, 내 시선은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널따란 응접실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이것도 비싸겠지, 저것도 비싸겠지 하며 눈을 굴리다 보니 조금 전 마차에서 내리면서 보았던 풍경이 절로 되새겨졌다.

    캠벨 저택처럼 쓸데없이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저택.

    집주인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고 있던 집사와 고용인들은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다들 아주 능숙한 사람들로 보였다.

    그렇다. 어째 그럴 것 같더라니 과연 예상했던 대로, 밀리엄 켄트우드는 돈 많은 백수였던 것이다.

    하긴 먹고살 걱정이 없으니까 신념 좀 꺾였다는 배부른 이유로 직장도 그렇게 덥석덥석 때려치우고 할 수 있었던 거겠지.

    호칭이 ‘켄트우드 씨’인 걸 보면 귀족은 아닌 듯싶지만, 여동생이 캠벨 남작의 외아들과 결혼했을 정도이니 어느 정도 명문가이기도 할 테고.

    아무튼 어렴풋이 예상만 했던 것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 조금 어색한 한편으로 어느 정도 안심이 됐다.

    그토록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리며 살아온 인생에 재력이나마 남아 있다니 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물론 밀리엄 켄트우드가 지나온 기구한 상실의 나날이란 결코 돈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겠으나….

    아니지, 아니지.

    거기까지 가지는 말자.

    나는 또다시 영 좋지 못한 방향―밀리엄 켄트우드의 인생극장―으로 빠지려던 생각의 뒷덜미를 급히 잡아채고서 내심 도리질을 쳤다.

    그러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다 대며 밀리엄을 흘끔 보았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는데, 조금 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어, 달리 필요한 게 있어서 쳐다본 건 아니었… 아!”

    생각해보니 필요한 게 있었다.

    나는 급히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소파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손가방을 주섬주섬 들어 올렸다.

    손가방 안에는 애초부터 든 것이 많지 않았으므로, 원하는 물건을 찾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가방 안에서 찾아낸 열쇠를 꺼내 테이블 위에 탁 놓으며 밀리엄을 향해 눈을 빛냈다.

    “예언서, 지금 열어보죠.”

    그는 내가 갑자기 예언서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열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왠지 모르게 안심한 사람처럼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입을 열었다.

    “금방 가져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알겠어요.”

    밀리엄은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고, 나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밀리엄이 예언서를 들고 돌아온 것은 내가 잔을 반 정도 비웠을 즈음의 일이었다.

    드디어 재회하게 된 예언서는 화사한 응접실의 따스한 조명 아래서도 변함없이 수상쩍기 그지없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예언서를 내려놓았고, 열쇠를 들어 올린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자물쇠에 꽂아 넣었다.

    달그락. 그리고 철컥.

    정확하게 맞물린 열쇠가 막힘없이 돌아가며 마침내 자물쇠가 입을 벌렸다.

    나는 자물쇠를 빼낸 뒤 곧장 책을 펼쳤다.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 위에 유려하게 적혀 있는 글씨들은 다행히도 읽을 수 있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1850년 1월 1일. 알트모어 시.’

    내용의 형식도 일정했다.

    연도를 포함한 날짜와 장소 밑에 짤막한 줄글이 두어 줄씩 쓰여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이 꼭 추리소설의 요약된 줄거리나 신문기사의 첫 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나같이 무슨 일이 일어나 몇 명이 사망한다거나, 누가 어떤 형태로 죽는다거나 하는 내용만 적혀 있는 까닭이었다.

    “조금 더 뒤쪽을 봐야겠어요.”

    띄엄띄엄 수기로 적힌 줄글을 손가락으로 주욱 훑어 내려가다 중간중간 멈칫거리던 밀리엄이, 선득하게 낮고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윽고 밀리엄의 손에 뭉텅이로 잡힌 페이지가 휙 넘어갔다.

    펼쳐진 것은 책의 끝이 몇 페이지 남지 않은 거의 끝쪽이었다.

    나는 무심결에 오른쪽 페이지의 제일 상단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1899년 늦가을. 성 조나단 병원.’

    분명 서재 지하에서 발견된 뒤 오늘까지 잠겨 있었을 ‘예언서’에는, 수일 전 성 조나단 병원에서 일어난 바로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반쯤 벌어진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가 급히 수첩 아이콘을 눌러 그간의 사건정보들을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캠벨 남작 일가 사망 사건이 일어난 것은 10월 28일.

    서재의 지하실은 적어도 그날부터 열린 적이 없을 테니, 그날 이후로 우리에게 발견되기 전까지는 예언서 또한 방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성 조나단 병원 사건의 첫 번째 희생자인 로라 히스가 사망한 날이 10월 31일이니까…….

    나는 종이 위로 다시 한번 시선을 내렸다. 1899년 늦가을. 성 조나단 병원. 열 번의 의문사.

    사망인원이 안 맞기는 했지만, 어쨌든 간에 아무리 날짜를 되짚어보아도 사건 발생 전에 기록되었다는 결론 밖에는 나오지 않는 문구였다.

    심지어 내가 읽은 것은 그 페이지의 제일 첫 줄에 불과했다.

    인쇄한 것처럼 유려한 필기체의 나열은 그 밑으로도, 다음 페이지로도 이어져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내용의 글귀들.

    나는 다음 페이지의 옆 페이지가 뜯겨나가 있는 것과, 그 뒷장들이 전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성 조나단 사건이 기록된 페이지로 넘어왔다.

    머릿속에 아득한 혼란이 찾아들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의 내용이 줄줄 적혀 있는 책이라니.

    진짜 예언서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나는 벌레를 쫓듯 고개를 저으며 황당무계한 생각을 재빨리 털어냈다.

    이 시점에 제기해야 할 가설은 그게 아니었다.

    “저, 밀리엄. 여기 적힌 사건들 말인데요. 혹시….”

    “아무래도 우리 둘이 같은 짐작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베로니카. 내게 확인할 시간을 좀 주겠습니까?”

    밀리엄은 화살촉 같은 시선을 책에 꽂고서 딱딱하게 굳은 채 말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살벌하던지, 그가 나를 보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곧장 예언서를 들어 올린 밀리엄이 이번엔 몇 페이지 정도 앞으로 돌아갔다.

    설핏 보이는 종이 위의 날짜는 1896년. 그가 한창 수사관으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나는 심각한 얼굴을 한 밀리엄이 책을 한 장씩, 때로는 서너 장씩 거꾸로 넘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책을 내려놓으며 입을 연 것은 그렇게 한참을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뒤의 일이었다.

    그는 무언가 영 좋지 못한 것을 본 사람처럼 사정없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천천히 조금 전의 굳은 표정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익숙한 사건들이 많군요.”

    “전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인가요?”

    “내 기억에도 한계가 있으니 전부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게다가?”

    “성 조나단 병원 건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범인이 잡히지 않은 사건들뿐이에요.”

    밀리엄은 책 속의 사건들이 전부 불운한 사고였던 것으로 마무리되거나 끝내 미제로 종결되었다고 설명했다.

    개중에는 너무 기괴하고 엽기적인 데다 결국 범인의 단서를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간의 소행이 아닌 것처럼 와전되어 괴담으로 번진 사건도 있다고 했다.

    나는 잠자코 밀리엄의 설명을 들으며, 그 사건들이 불가해한 것으로 종결되면서 가지게 되었을 어떤 신비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아마 몇 개 정도는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는 사건일 겁니다.’라고 말했을 땐 어색하게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밀리엄은 너무 심각한 나머지 내 시선 처리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고, 대화는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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