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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35화 (35/121)
  • 35화. 레드 헤링 (8)

    다른 인물들은 다 괜찮다. 애초에 혼동이 올 만큼 자주 만나는 인물이 더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문제는 저 남자, 밀리엄 켄트우드.

    곤란하게도 나는 자꾸만 밀리엄을 ‘인간적으로’ 신경 쓰고 있다.

    정말이지 딱하고 안쓰럽다고 생각했다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려 들며 그의 감정에 주의를 기울인다.

    따지고 보면 내가 밀리엄의 속사정을 이리저리 아는 것도 결국엔 그가 게임 캐릭터였기 때문인데.

    나와 밀리엄의 관계가 진짜 사람 대 사람의 그것이라면 오히려, 내가 그의 작은 반응이나 감정표현 따위에서 일일이 그의 과거를 떠올리며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건 정말로 아주 우습기 짝이 없는 고민인데.

    그런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느냔 말이다…….

    나는 그대로 머리를 싸매려다가, 밀리엄이 눈앞에 있다는 걸 깨닫고 참았다가, 그걸 또 왜 참고 앉았느냐며 다시 머리를 싸매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 이게 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지난 며칠 때문이다.

    갑자기 기억을 잃은 제임스 로웰이 등장했는데 그걸 평화로웠다고 말하는 건 좀 어폐가 있겠지만.

    아무튼 뭔가 사건이 좀 펑펑 터져주고 정신없이 몰아쳐주고 스토리도 마구 진행되고 했으면 내가 밀리엄의 감정 같은 걸 헤아릴 여유도 없었을 게 아닌가?

    그런데 괜히 사건이랍시고 제임스 로웰 따위나 튀어나와선 밀리엄 눈치를 잔뜩 보게 만드니까 이런 낭패가 생기지!

    머리를 싸매거나 마차 벽에 관자놀이를 찍는 대신 긴 한숨을 푹 내쉬려던 찰나, 마차가 멈춰 섰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마차에서 내린 밀리엄이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킨 나는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붙든 채 다른 손을 밀리엄의 손 위에 얹고 천천히 마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두 발이 완전히 땅에 닿았을 때, 밀리엄의 다정한 인사말이 서늘한 밤공기를 뚫고 들려왔다.

    “조심히 올라가고, 좋은 밤 보내요. 베로니카.”

    “당신도 조심해서 들어가요.”

    나는 조금 전까지 하던 고민의 내용이 불러온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을 외면한 채, 가까스로 그를 향해 마주 웃어 보이고서 몸을 돌렸다.

    낡은 타운하우스의 3층에 위치한 베로니카의 집에 도착해 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이제 몇 번이나 보아서 익숙해진 시스템 문구였다.

    [ 베로니카의 방 ]

    그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마차에서 막 내려서 맛본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서늘한 공기였다.

    나는 천천히 사라지는 시스템창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낡아서 그런지 밤이 되면 이불을 덮어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집이건만.

    낭패감을 느끼며 방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려던 순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창문을 열어둔 적이 없는데?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오싹한 기분에 나는 급하게 뒷걸음질을 치며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르게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누군가 쫓아오긴커녕 등 뒤에서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그걸 인지한 상태로도 달음박질은 도무지 느려지지 않았다.

    1층에 도착해 요란하게 문을 열고 건물을 빠져나온 뒤에야 나는 멈춰 서서 무릎을 짚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머릿속이 아찔해진 채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데, 사정없이 오르내리는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이 덥석 내려앉았다.

    침입자가 그새 쫓아온 것인가 싶어 순간 겁을 집어먹은 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휙 뿌리쳤다.

    그러나 돌아간 시선 끝에 보인 것은 낯선 괴한 따위가 아니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밀리엄의 얼굴이었다.

    내가 뿌리쳐버린 탓에 나를 붙잡지도, 그렇다고 손을 완전히 거두지도 못한 채 당황하고 있는 그의 어깨너머로 아직 떠나지 않은 마차가 보였다.

    밀리엄의 존재를 인식하기 무섭게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치맛자락이 풀썩 나부끼며 속치마 아래로 차가운 바닥의 냉기가 느껴졌다.

    나를 부르는 밀리엄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베로니카, 괜찮습니까?”

    “미, 밀리엄….”

    몸을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춰온 밀리엄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왜.”

    “창문이, 아니, 집에 누가 들어왔던 것 같아서…….”

    놀란 탓인지 똑바로 나가지도 않는 말을 가까스로 다듬어 내뱉고 나자 더욱 소름이 끼쳤다.

    “침입자가 있다고요?”

    “아,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라 나온 사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곧바로 나온 건 잘한 겁니다. 정말로 잘했어요. 일단 진정하고….”

    진정하라는 밀리엄의 말에 힘겹게 숨을 고른 순간, 어제 주어졌던 대화 선택지가 느닷없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밀리엄과 함께 조이의 사무실 정리를 도우러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해야 했던 바로 그 선택지.

    오늘 패트릭 헤이즈의 사무실에서 발견한 단서는 메이슨 교단, 다시 말해 메인 스토리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무실을 정리하러 가는 것은 애당초 건너뛰어도 상관없는 부차적 이벤트 따위가 아니었을 터.

    그런데도 내게는 문제의 선택지가 주어졌고, 내가 그 선택의 결과로 외출한 사이 베로니카의 집에는 침입자가 들었다.

    물론 집이 비어 있는 때를 노리고 침입한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베로니카 캠벨’은 이미 한번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습격당한 전적이 있다.

    만약 어제 내가 ‘조이에게 안부 전해달라’는 쪽을 골랐다면 어땠을까.

    나는 온종일 집에 있었을 테고, 침입자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침입자가 저번의 괴한과 동일인물이었다면…….

    나는 붕대가 감긴 목으로 손을 가져가며 섬뜩한 결론에 도달했다.

    별것 아닌 줄 알았던 그 선택지가 어쩌면 배드엔딩으로 향하는 분기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둘둘 감아둔 하얀 천 안쪽이 알싸하게 아파 왔다.

    나는 한 손으로 목을 매만지며, 다른 손으로 허공을 더듬어 밀리엄의 팔뚝을 덥석 붙잡았다.

    뭐라도 붙들지 않고는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자기 팔을 붙든 내 손을 두어 번 정도 도닥거린 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건네왔다.

    “방 안 상태는 확인했습니까?”

    “…특별히 어질러져 있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도둑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는 뜻이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려 있는 창문을 제외한 모든 것이 아침에 집을 나설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도둑이 들었다면 그런 풍경은 아니었겠지.

    내 대답에 잠시 고민하던 밀리엄이, 내 목 쪽으로 시선을 떨어트리더니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번의 그놈일 수도 있겠군요.”

    이윽고 튜토리얼 때의 일을 떠올렸는지 그가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베로니카의 집이 있는 3층을 노려보았다.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한 밀리엄을 초조하게 쳐다보며 그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설마 자기가 올라가 보겠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 정도로 간덩이가 붓지는 않았겠지?

    그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밀리엄은 베로니카의 집으로 향해 있던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고 다시 나를 보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약간 주저하는 것도 같은.

    “베로니카.”

    그가 아직도 제 팔을 붙들고 있는 내 손을 다른 쪽 손으로 덮고 꽉 움켜쥐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내 손을 덮은 커다란 손을 한번 보았다가, 고개를 들어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침입자가 저번의 그놈일 가능성이 있다면, 당신 혼자 있는 건 너무 위험해요. 이대로 이 집에 머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그렇겠네요…….”

    당장 집이 뚫려버린 상황이니 그거야 맞는 말이긴 했다.

    정말로 맞는 말이어서 나는 돌연 새로운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베로니카는 청년 갑부니까 이참에 더 안전하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안전하고 좋은 집이란 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당장 오늘 밤은 어디서 보낸담?

    갑작스레 찾아온 현실적인 문제 앞에 내가 당황하는 사이, 밀리엄이 조금 주저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이상한 뜻으로 하는 말이 절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어째선지 내 시선을 피해가며 그렇게 말한 그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번 했다.

    나는 그런 밀리엄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해 없이 들어야 할’ 다음 말이 이어졌다.

    “내 집에서 지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은은한 가스등 불빛 아래로 드러난 그의 얼굴색이 어째 조금 불그스레해진 것 같다는, 아주 우스운 착각과 함께였다.

    ***

    그래서 일이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자, 마셔요. 뜨거울 테니까 조심하고.”

    “아, 고마워요.”

    “손님방이 금세 준비될 겁니다.”

    ……이렇게 되었다.

    나는 낯선 응접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밀리엄이 건네는 찻잔과 잔받침을 받아 들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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