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34화 (34/121)
  • 34화. 레드 헤링 (7)

    동생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말에 허리를 숙여온 밀리엄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나는 당혹감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정신을 애써 붙든 채로 서류의 내용에 집중했다.

    안젤리나 캠벨이 패트릭 헤이즈에게 의뢰한 것은 메이슨 교단 전반에 대한 조사였다.

    정확한 교리는 무엇인지, 실제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어떤 사업들을 벌이고 있는지, 내부인 중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사가 있는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은 없는지.

    그 대목에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기보다는, 이미 그럴 거라고 확신한 상태에서 그 정확한 내막을 캐내고 싶어 했다는 느낌인데.

    내가 그런 감상을 받는 사이, ‘잠시……’ 하며 손을 뻗은 밀리엄이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앞장과는 확연히 다른, 단정하고 유려한 필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종이의 재질도 조금 달랐다.

    뭐지 싶어 내용을 살피려는데 밀리엄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귓전에서 곧장 들려왔다.

    “이 글씨는, 안젤리나의….”

    안젤리나 캠벨의 글씨라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 위의 글자를 짚는 밀리엄을 한번 돌아보았다가, 이내 다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앞장보다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종이 위에는 놀랍게도 캠벨 저택 내부의 동향이며 남작가 사람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관찰한 내용 따위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안젤리나가 패트릭에게 조사를 의뢰하면서, 그전까지 자신이 캠벨가의 며느리로서 알게 된 정보나 독자적으로 조사한 부분을 함께 넘긴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일단 눈에 띄는 내용들만을 빠르게 훑었다.

    이따금 서재에서 정체불명의 굉음이 들려도 무시하는 것이 저택의 불문율이라는 이야기.

    결혼한 지 수년이 넘도록 오직 그녀만이 남작의 서재에 출입할 권한을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

    남작 부부가 분기에 한 번씩 일주일 일정으로 떠나는 여행은 사실 피아벨 대수도원에서 5일간 열리는 어떤 행사에 참여하기 위함이라는 이야기…….

    “밀리엄, 피아벨 대수도원이 어딘지 혹시 알아요?”

    “아니요. 하지만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피아벨 대수도원은 메이슨 교단의 총본산이에요.”

    난데없이 들려온 소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나와 밀리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빗자루를 든 채 책상 바깥쪽에 서서,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건너다보고 있는 조이의 모습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하긴 조이는 패트릭 헤이즈의 조수였으니 패트릭이 메이슨 교단에 대해 조사하고 다녔다면 분명 귀동냥으로라도 주워들은 게 있을 것이었다.

    “조이, 혹시 가본 적이 있어?”

    “탐정님이랑 같이 입구까지는요.”

    밀리엄의 물음에 조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들어가 본 적은 없다는 소리였다.

    “특정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외부인에게 개방하지 않는대요. 평신도들도 자기 지역의 교… 교장?”

    “교구장?”

    “아! 맞아요, 교구장! 그 사람한테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고 했어요.”

    꽤 유서 깊은 종교단체라고 하더니 과연, 사이비 냄새를 풀풀 풍기는 주제에 제법 체계는 잡혀 있는 모양이지.

    공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는 것치고는 쓸데없이 폐쇄적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뭐, 그만큼 비밀이 많다는 뜻 아니겠는가. 보아하니 그걸 파헤치는 게 내 몫인 듯싶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피아벨 대수도원’이라는 글자를 다시 한번 쏘아보았다.

    특정한 시기에만 들어갈 수 있다는 단서와 총본산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는 마치 지금의 네 레벨로는 어림도 없다는 경고처럼 다가왔다.

    역시 이건 그거다.

    최종 스테이지의 기운이야.

    서류를 쥔 손에 불끈 힘을 주었을 때, 갑자기 서류를 맨 첫 장으로 되돌리고 표지를 덮어버린 밀리엄의 손이 내 손 위로 포개졌다.

    나는 서류를 덮은 행동과 포개진 손 중 어느 쪽에 놀란 것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퍼뜩 놀라 밀리엄을 휙 돌아보았다.

    “이건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는 게 좋겠어요.”

    내게만 간신히 들릴 만큼 자그마하게 속삭여오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어쨌든 사무실 정리를 돕고 있는 참이었지.

    나는 갑자기 광대뼈 부근이 화끈거리는 이유를 고민하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손에 힘을 풀자 서류는 자연히 밀리엄의 손으로 넘어갔다.

    포개졌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떨어지기까지도 금방이었다.

    서류철을 넘겨받은 밀리엄이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잘생긴 눈이 보기 좋게 휘어졌다.

    신기하다는 둥 무섭다는 둥,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네 어쩌네 하며 남의 기분을 수수께끼 속으로 몰아넣었던 조금 전의 진중한 분위기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린 채였다.

    나는 그가 곧바로 허리를 세워 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린 뒤에도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남작님과 켄트우드 씨도 메이슨 교단에 대해 조사하고 계신 건가요?”

    형언할 수 없는 기분과 뺨을 맴도는 열기 속에서 방황하던 나는 조이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가 책상 모서리를 짚고 몸을 일으키는 사이, 밀리엄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야겠지.”

    “저, 그러면요. 종종 일손이 필요하실 때 절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완전히 몸을 일으키고 나니 밀리엄을 향해 간절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조이가 보였다.

    “그거야 우리가 더 고마울 일이긴 하다만….”

    “메이슨 교단 건은 탐정님께서 성 조나단 병원 사건 전까지 무척 열심히 매달리셨던 일이라서요.”

    변성기가 오지 않은 건지 조금 낮은 여자 목소리처럼 들리는 음성이 사무실 안을 야무지게 울렸다.

    “제가 두 분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탐정님도 자랑스러워 해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늘 그분께 자랑스러운 조수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조이의 시선은 얼마 전 병원에서도 보여준 바 있던 그때의 단단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베로니카와 눈높이가 꼭 맞는 소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밀리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알았다.”

    짧고 담담하지만 어딘지 감상에 젖어 있는 듯한 대답이 이어졌다.

    무심코 아래로 내려간 눈길 끝이 서류철을 꾹 움켜쥐는 밀리엄의 손에 가 닿았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힘줄이 다 드러난 손등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나까지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든 것은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밀리엄 켄트우드의 감정이나 반응 따위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있나?

    아니, 필요는 둘째치고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꾹 말아 쥔 주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는 아주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야 했다.

    ***

    패트릭 헤이즈의 사무실을 정리하는 일은 해가 저물고 나서야 끝이 났다.

    사실 일이 일찍 마무리되면 밀리엄의 집으로 가서 예언서에 열쇠를 끼워볼 계획이었는데, 정리가 저녁 식사 시간도 훌쩍 넘겨 끝나버린 터라 그 일은 그냥 내일로 미루게 되었다.

    조급증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뭐, 책이나 열쇠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당장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원흉은 따로 있었다.

    덜그럭거리며 밤길을 달려가는 마차 안.

    뿌연 안개 속을 비추는 가스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창밖을 스쳐 간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는 척 턱을 괸 채로, 맞은편에 앉은 밀리엄을 슬쩍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시간이 늦었으니 날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마차에 오른 참이었다.

    고마운 친절이었으나, 아까 느낀 기분을 계속 되새기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순간 나를 더할 나위 없이 찝찝하게 만들고 있는 건, 예언서의 알맹이를 아직도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아까 전의 그 오묘한 기분과 거기서 비롯된 어떤 깨달음에 여전히 반쯤 매몰되어 있는 상태였다.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나는 밀리엄 켄트우드라는 ‘게임 캐릭터’에 대해 과연 올바른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걸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이 세계는 너무나 현실 같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먹고 마시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 전부 내가 현실에서 느끼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목이 졸리거나 몸뚱이가 내동댕이쳐지는 고통도 생생했고, 이런 표현은 조금 이상할지 모르지만 시체조차 생생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마주 보고 앉거나 대화를 하거나…, 아무튼 구체적으로 뭘 하든지 간에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꾸만 내가 진짜 인간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아니, 물론 가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난리를 겪어놓고 이제 와서 이 모든 게 내 꿈이나 허구의 데이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전부 진짜지. 이 안개 섞인 축축한 공기도 진짜고 이 덜컹거림도 진짜고 밀리엄도, 적어도 이 세계에서만큼은 진짜 살아 있는 인간이지.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 옳은 일이냐는 데 있다.

    내 목표는 내가 살던 세계로, 내가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로 그 세계로 돌아가는 건데, 여기서 필요 이상의 현실감각을 느껴버리면 조금 곤란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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