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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32화 (32/121)
  • 32화. 레드 헤링 (5)

    이번에 말문이 막힌 건 제임스 쪽이었다.

    그는 밀리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캐묻는 대신 그늘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간 겸연쩍은 침묵이 흘렀다.

    밀리엄도 제임스도 말을 잇지 않는 그 잠깐 사이 나는 제임스를 보며, 저게 다 연기라면 그에겐 탐정보다 배우가 천직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걸까. 아니면 화제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던 걸까. 별안간 제임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조금 주저하는 듯하다가, 다소 조심스러운 투로 질문을 던져왔다.

    “그런데 저… 이쪽 숙녀분께서도 저와 안면이 있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여태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제임스는 어느새 나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영 협조적이지 못한 밀리엄 대신 나에게서 무언가 쓸 만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물론 부응해줄 길이 없는 기대였으므로, 나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요. 저는 로웰 씨를 오늘 처음 뵈었어요. 신문에서 몇 번 정도 성함을 본 적은 있지만요.”

    “제가 신문에 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나요…?”

    깜짝 놀라 물어오는 제임스의 말에 나는 애매한 긍정의 의미로 다시금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유명하기야 했겠지.

    하지만 왕국 최고의 명탐정이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였다는 설명까지 덧붙이기엔 가뜩이나 저기압인 밀리엄이 몹시 신경 쓰였다.

    밀리엄은 잘난 얼굴 가득 먹구름을 드리운 채 제임스 로웰의 뒤통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밀리엄 켄트우드가 지금의 제임스에게 바라는 게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찾아들었다.

    ‘그것까지 내게 물어 답을 얻어내려는 건’이란 말은,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면 직접 부딪쳐서 기억해내려는 노력을 하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밀리엄이야말로 제임스 로웰이 모든 것을 기억해내기를 가장 절실하게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혹은 그런 체를 하고 있는― 인간을 상대로는 원망도 분노도 그저 무의미할 뿐이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밀리엄과 제임스 사이의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공상에 빠져 있던 나를 현실로 끌어당긴 것은 뒤늦게나마 이름을 물어오는 제임스의 목소리였다.

    번뜩 정신을 차린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개가 많이 늦었네요. 베로니카 캠벨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캠벨 양.”

    제임스 로웰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마주 웃어 보이며 악수에 응했다.

    [ 인물정보 ‘제임스 로웰’ 획득 ]

    곧장 맞닿은 손은 서늘하지도 따스하지도 않았다.

    ***

    기억을 잃은 제임스 로웰과의 만남 이후 이틀, 나는 마침내 퇴원에 성공했다.

    밀리엄은 그전까지 그랬듯 그 이틀 동안도 병문안을 와주었지만, 로웰 씨를 찾아가 봤냐는 내 물음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조만간 다시 찾아가 볼 생각이긴 합니다만….’

    흐려지는 말끝에서는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찾아간들 무슨 소득이 있겠냐는 고단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 뭐……. 생각해보면 진짜든 아니든 간에 기억 상실씩이나 되는 전개가 얼굴 몇 번 마주치는 정도로 뚝딱 해결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눈앞에 닫혀 있는 나무문을 똑똑 두드렸다.

    [ 패트릭 헤이즈 탐정 사무소 ]

    ‘지도’에 새로운 장소가 추가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떠오른 시스템 문구가 사라질 때 즈음 문이 열리고, 헐렁한 셔츠와 멜빵바지를 입은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남작님!”

    팔을 걷어붙인 조이가 씩씩한 인사와 함께 나를 맞아주었다.

    “안녕, 조이.”

    나는 며칠 사이 그래도 많이 기운을 차린 듯한 조이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윽고 문을 열기 위해 내려둔 듯한 신문 뭉치를 들어 올리느라 허리를 굽힌 조이의 등 너머로 밀리엄의 모습이 보였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선 채 웬 서류철 같은 것을 넘겨보고 있던 밀리엄이, 문간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베로니카? 정말 왔군요.”

    “오겠다고 했잖아요.”

    나는 그렇게 대꾸하며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별로 넓지도 않은 사무실 곳곳에 신문지 더미며 책더미, 서류 더미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애써 쌓아둔 것을 넘어트리지 않도록 발밑을 조심하며 소파로 다가가니, 밀리엄이 영 불만스러운 투로 중얼거렸다.

    “어제 퇴원한 사람이 굳이 사서 고생을 하러 올 것까지야….”

    “필요 이상으로 쉬어서 퇴원한 거고, 집에 있어봐야 할 일도 없는걸요.”

    사무실 상태를 보아하니 좀 고생스러울 것 같긴 하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둘보다는 셋이 정리하는 게 낫지 않겠냐 이 말이지.

    나는 팔을 걷기 위해 손목의 단추를 하나씩 풀며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내일은 조이를 도우러 가기로 했습니다.’

    ‘조이를요?’

    ‘네. 헤이즈 씨의 사무실을 정리한다기에…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겸사겸사.’

    밀리엄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내 눈앞에는 선택지창이 떠올랐었다.

    하나는 ‘조이에게 안부 전해줘요.’였고, 다른 하나는 ‘그럼 나도 가서 도울게요.’였지.

    나는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밀리엄과 최대한 행동을 함께하고, 될 수 있는 한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것이 좋으리라는 계산에서 비롯된 결론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사무실이 지도에 추가된 것으로 보건대 어제의 나는 아무래도 옳은 선택지를 골랐던 모양이다.

    오지 않는 쪽을 골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뭐, 어쨌든 간에.

    단추를 모두 풀고 팔을 걷어붙인 뒤, 나는 농담으로라도 깔끔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무실의 풍경을 한번 스윽 훑어보았다.

    가구라고 해봐야 창문을 등진 책상과 그 옆에 선 책장, 푹 꺼진 소파와 테이블 정도가 고작.

    그러나 애당초 면적이 좁아선지, 조금이라도 평평하다 싶은 곳마다 뭔가가 잔뜩 쌓여 있는 까닭인지, 공간 자체에 여유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니던 시선은 결국 밀리엄에게로 돌아왔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철로.

    …그러고 보니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었지.

    나는 쓰레기를 버리러 다녀오겠다며 양손 가득 신문뭉치를 들고 나가는 조이의 뒷모습을 한번 돌아보았다가, 이내 다시 밀리엄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확인하고 싶다던 건 확인했어요?”

    열려 있던 서류철을 탁 덮어 이미 같은 파일들이 잔뜩 쌓여 있는 소파 위에 툭 내려놓던 밀리엄이 아, 하고 짤막한 탄식 같은 것을 흘렸다.

    “아니요. 아직까진 이렇다 할 수확이 없네요.”

    “……뭔지 물어봐도 돼요?”

    내 말을 들은 그는 잠시 턱을 긁적이다가, 크흠 하고 잔기침을 한번 했다가, 이내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어쩐지 말하기 곤란하다는 표현 같아서 나는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어, 많이 개인적인 문제라 곤란하면 말 안 해줘도 괜찮아요. 난 그냥 같이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본 거고….”

    “별로 곤란하진 않습니다. 단지 정말 괜한 호기심이라서 굳이 당신까지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하지만 보아하니 이미 신경을 써버린 모양이네요, 하고 농담처럼 덧붙인 밀리엄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그가 안젤리나의 방에서 챙겼던 그녀의 일기장이었다.

    그는 갈피끈을 이용해 일기장 중간을 펼치더니, 페이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얇고 작은 종이 한 장을 스윽 꺼내어 내게 건넸다.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굉장히 낯이 익은 자그마한 종이 위에는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글귀가 인쇄되어 있었다.

    ‘패트릭 헤이즈 탐정사무소.

    플로드 스트리트 48번지.’

    “이건 헤이즈 씨의 명함이잖아요.”

    “동생이 일기장에 끼워놨더군요.”

    안젤리나 캠벨의 일기장에 패트릭 헤이즈의 명함이?

    그게 무슨 조합인가 싶어 고개를 기울이던 내 머릿속을 불현듯 스쳐 지나간 것은 며칠 전의 기억이었다.

    ‘안젤리나 캠벨 부인에게 얼마나 무례하게 구셨을지도 눈에 선합니다.’

    나와 밀리엄의 험담을 늘어놓는 윌 그렉슨에게 패트릭 헤이즈가 시비를 걸면서 그런 말을 했다고 했지.

    그땐 그냥 면박을 주기 위해 그가 꺼냈던 화제를 되돌려준 모양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패트릭 헤이즈가 안젤리나 캠벨과 어떤 식으로든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꺼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눈앞에 선택지 창이 나타났다.

    [ 1. 윌 그렉슨 씨가 말한 동생분의 불륜 상대가 혹시…. ]

    [ 2. 동생분이 헤이즈 씨에게 뭔가를 의뢰한 걸까요? ]

    ……여기서 일부러 1번을 고르는 사이코도 있을까?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밀리엄 켄트우드 앞에서 안젤리나 캠벨과 패트릭 헤이즈의 불륜 의혹을 제시하려 드는 미친 선택지를 보며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내 소중한 파트너에게 감히 저런 소리를 해보라는 제안 자체가 몹시 거슬리는 통에, 가능한 한 빨리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생분이 헤이즈 씨에게 뭔가를 의뢰한 걸까요?”

    “‘조사가 어느 정도 진행될 때마다 연락을 해주기로 했다’…고 써놓은 걸 보면 아마도요.”

    밀리엄은 명함이 꽂혀 있던 페이지 중간의 글귀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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