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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31화 (31/121)
  • 31화. 레드 헤링 (4)

    아예 입을 다물고 있다고?

    밀리엄은 그 때문에 멜리사가 상부로부터 ‘그냥 대충 정신 나간 쾌락살인범이었던 걸로 마무리 짓고 끝내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 잘 돌아가는 조직일세…, 따위의 생각으로 잠시 기울었던 머리는 금세 수잔 로이드의 동기 문제를 향해 되돌아왔다.

    그날 지하실에서 내가 시간을 벌 작정으로 ‘왜 이런 짓을 했냐’고 질문했을 때, 수잔 로이드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라면 저보다 윌 그렉슨 씨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랍니다.’

    그건 어쨌든 이유가 있기는 했다는 소리 아닌가?

    “쾌락살인은 아닌 것 같았는데….”

    “혹시 수잔 로이드로부터 뭔가 들은 게 있는 겁니까?”

    내가 눈동자를 굴리며 중얼거리자 밀리엄이 퍼뜩 물어왔다.

    그런 그에게 나는 지하실에서 수잔 로이드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고스란히 밀리엄에게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밀리엄의 표정에 다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윌 그렉슨이 더 잘 알 거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이상한 소리긴 한데 어쨌든 뭔가 다른 동기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 건 사실이잖아요?”

    “윌 그렉슨 쪽을 좀 더 캐보는 게 좋겠군요.”

    “그러자면 나는 얼른 퇴원을 해야겠고요.”

    나는 밀리엄을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다음에는 절대로 내 퇴원을 방해하지 말라는 내 나름의 압박이었는데, 밀리엄은 내 말을 듣자마자 영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당장 퇴원해도 좋을 정도로 아주 말짱하거든요?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고!”

    “쉬는 게 스트레스라니 성실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여기 있는 게 스트레스란 소리예요…….”

    밀리엄은 내가 반쯤 죽는소리를 하며 이불을 긁은 뒤에야 다음 면담 때는 절대로 퇴원에 반대하지 않겠다며 나를 달랬다.

    그는 아마도 내가 어지간히 병원을 싫어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기실 내가 말한 ‘여기’란 병원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였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세계를 벗어나고 싶었다.

    물론 그래. 어쩌면 이렇게 입원해서 며칠을 보내는 것마저 스토리의 일환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입원해 있었던 덕분에 밀리엄이 휴게실에서 제임스 로웰과 마주치게 된 거니까.

    그러니까 사실 이 세계에서 내가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설령 그게 진짜여서 내가 아무리 빠르게 달음박질해 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 해도 왜, 기분이란 게 있잖은가.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노라면, 이대로 영영 이 세계에 갇혀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내가 지금 그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스토리가 진행되는 감각이었다.

    가능하면 꼬임 없이, 난데없는 스케일 확장도 없이, 술술 풀리는 실타래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런 감각을 원했다.

    나는 세워둔 베개에 몸을 깊이 기댄 채 새하얀 병실 천장을 가만히 응시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퇴원을 한 뒤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우선은 밀리엄의 집에 보관 중인 ‘예언서’에 구관에서 찾은 열쇠를 끼워봐야 하겠고….

    방금 밀리엄이 말한 대로 윌 그렉슨에 대해 더 알아보기도 해야겠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병실 문 쪽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허리를 세워 그쪽을 바라보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아까 제임스 로웰의 병실에서 만났던 간호사가 들어왔다.

    “존… 아니, 로웰 씨가 깨어나셨다고 알려드리러 왔어요.”

    “뭔가 기억해낸 것 같던가요?”

    밀리엄의 물음에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간호사의 모습은, 다른 걸 생각하기 전에 우선 제임스 로웰 건부터 해결을 보라는 어떤 신호처럼 느껴졌다.

    ***

    “탐정…이었다고요, 제가?”

    제임스 로웰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고, 밀리엄은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의 침대를 사이에 두고 밀리엄과 마주 앉은 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사실은 둘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겠다고 했었는데.

    ‘단둘이 남는 건 내가 조금 곤란해요.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해오는 통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둘만 남았을 때 흥분해서 화내지 않을 자신이 없다, 뭐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밀리엄이 옆에 있어달라고 땅땅 못을 박는 것으로 보아 둘의 대화를 듣는 것도 스토리의 일부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 나는 군말 없이 병실에 남기로 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될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가시방석일 줄이야.

    ‘탐정이라니……’ 하고 중얼거리는 제임스를 가만히 응시하던 밀리엄이 희미한 한숨과 함께 팔짱을 꼈다.

    무표정한 얼굴인데도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의사는 제임스가 밀리엄을 보고 쓰러진 것을 꽤나 긍정적인 반응으로 해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는 사람과 계속 마주하고,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본래 알았던 장소를 찾아가는 등 과거와의 접촉을 최대한으로 늘려갈수록 제임스의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도 높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밀리엄이 지금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저 자리에 앉아 제임스에게 그의 신상을 읊어주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밀리엄이라고 제임스에 대해 속속들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신상이라고 해봐야 이름과 직업 정도였지만….

    나는 조금 전 ‘당신 직업이 탐정이었다’고 말할 때 밀리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던 것을 떠올렸다.

    사실은 살인자였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적어도 그를 탐정이라고 칭하는 것이 밀리엄에게 있어 자신의 옛 직업을 입에 담는 것만큼이나 내키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자기 신분이 어지간히 뜻밖이었던 모양인지 한참을 혼란하게 눈동자만 굴리던 제임스가 ‘그런데…’ 하고 말을 꺼낸 것은 그때였다.

    “저희는 어떻게 아는 사이였습니까…?”

    나는 그 질문을 들은 밀리엄의 손이 움찔하는 것을 발견하고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물론 흐름상 자연스러운 질문이었고, 기억을 잃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당연히 악의도 없었겠지만 고르고 골라 하필 저 말이라니.

    속에 돌덩이가 얹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밀리엄은 잠시 입안에서 혀를 굴리는가 싶더니, 퍽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사관으로 일하던 시절에 만났습니다.”

    “아, 수사관님이셨군요.”

    “2년 전까지는 그랬죠. 당신이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던 그 사건도 내 담당이었고요.”

    그리고 그건 수사관 밀리엄 켄트우드가 담당한 마지막 사건이 되었지.

    그 사건이 일어났던 일주일 내내 두 사람은 행동을 함께했고.

    그러나 밀리엄은 누가 봐도 그들의 그러한 옛 관계에 대해 길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떻게 보면 아까 말했던 것처럼, 아직 제임스를 어떻게 대하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지 결정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이 상황의 가장 큰 문제는, 밀리엄의 그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제임스가 호기심을 굽히지 않는 집요함을 보인다는 데 있었다.

    설명해야 할 것은 거기까지라는 듯 입을 꾹 다물어버린 밀리엄을 향해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건 제 착각일까요…….”

    당연히 아니지, 보면 모르냐.

    나는 눈치껏 그러려니 넘어가도 되었을 이 미묘한 공기에 대해 굳이 언급해버린 제임스를 조금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밀리엄은 잠시 무어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가, 이내 단념한 듯 입을 닫고 야트막한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난 뒤에야 대답을 꺼냈다. 다소 충동적으로 말을 꺼내려는 듯 보였던 방금과는 다른, 조금 전까지와 마찬가지로 담담한 태도였다.

    “좋다 나쁘다를 논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켄트우드 씨. 제가 잊어버린 건 1년 전까지의 제 삶이지, 오늘 아침의 일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어떠했는지를 말할 만한 관계가 못 되었다는 밀리엄의 말에, 제임스는 뜻밖에도 퍽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아침 휴게실에서 밀리엄이 제임스를 향해 보인 태도는 누가 보아도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었다.

    ‘무슨 질 나쁜 장난질을 하는 겁니까, 당신…….’

    ‘섭섭한 소리 마십시오, 제임스 로웰. 당신은 실수 따위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잖습니까.’

    ‘그따위 웃기지도 않는 말로 또 나를 기만하려는 거라면 이번엔 절대,’

    이를 갈고 비아냥거리고 분노하고.

    제임스 로웰이 그에게 정말 아무 감정 없는 상대였다면 결코 보이지 않았을 반응들.

    제임스의 예리한 지적에 당황했는지, 밀리엄이 설핏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한번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언짢은 듯 내리깔렸던 금빛 시선이 별안간 내 쪽을 향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로 눈만 깜빡였는데, 밀리엄은 그런 내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는 듯하더니 제임스 쪽으로 재차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운을 떼었다. 한숨이 반쯤 섞인 목소리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식의 재회를 달갑게 여길 수 있을 만한 관계가 아니기는 했습니다. 끝이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

    “저는 제가 당신에게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을 바라는 듯한 제임스의 말에 밀리엄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까지 내게 물어 답을 얻어내려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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