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28화 (28/121)

28화. 레드 헤링 (1)

남쪽 섬의 오래된 대저택에서 열리는 비밀스러운 파티에 초대된 열두 명의 인물들.

배가 섬에 닿지 않는 일주일간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

왕립수사국의 엘리트 수사관 밀리엄 켄트우드와 왕국 최고의 명탐정 제임스 로웰이 고립된 대저택에서 일어난 참극의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 <레드 헤링>.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어떤 대사가 있다.

‘친애하는 밀리엄 켄트우드. 이 극의 결말을 선택하는 것이 내가 정한 당신의 역할입니다.’

그건 게임의 주인공이자 탐정역이며, 동시에 사건의 흑막이기도 했던 명탐정 제임스 로웰이 밀리엄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레드 헤링>의 진상은 이러했다.

미궁에 빠진 온갖 사건들을 파헤치며 정의를 추구하던 명탐정 제임스 로웰.

수사국의 손을 떠난 지 오래인 과거의 미제사건들을 조사하게 되면서 그는, 너무나 많은 살인자가 감히 누려선 안 될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군가는 비리로, 누군가는 교묘하고 주도면밀한 범행으로, 다른 누군가는 수사관의 무능함에 기대어.

그렇게 법으로 그들을 단죄할 수 없는 현실에 지독한 혐오감을 느낀 제임스 로웰은 그가 숭상하는 정의를 실현코자 직접 심판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고도의 대저택에서 일어난 참극은 사실 법망을 피해 간 악질 살인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제임스 로웰이 설계한 심판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임스 로웰이 커튼 뒤의 연출자라면, 밀리엄 켄트우드는 그 극을 위해 제임스가 엄선한 진짜 주역이었다.

제임스가 저택에 초대한 ‘심판받지 않은 살인자’ 중에는 과거 밀리엄에게서 양친을 앗아간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 에드워드 녹스가 있었다.

<레드 헤링>의 결말부에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낸 밀리엄의 추궁에, 제임스는 에드워드 녹스가 양친의 원수임을 밀리엄에게 알려주며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제임스 로웰이 범인’이라는 진실을 밝히는 것.

두 번째는 자신이 설계하고 조작해놓은 증거대로 에드워드 녹스를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만드는 것.

분노하는 밀리엄에게 선택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몫이라는 취지의 유언을 남긴 채, 제임스 로웰은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이후 처음부터 끝까지 제임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충격과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가 남긴 선택지를 쥐고 갈등하던 밀리엄은, 끝내 진실을 향한 신념을 꺾고 부모의 원수를 심판대에 올리는 길을 택한다.

<레드 헤링>은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에드워드 녹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 수사국을 떠나는 밀리엄 켄트우드의 씁쓸한 뒷모습과 함께 마무리되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제임스 로웰이 <레드 헤링>의 결말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밀리엄이 금방 아는 사람과 착각을 했다고 사과하거나, 남자 쪽에서 먼저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밀리엄은 남자를 계속해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뱉은 이름을 주워 담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고.

이윽고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붉은 머리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애석하게도 나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게 제 이름입니까? 혹시 저를 아시는 분이신가요?”

남자는 다급하게 밀리엄의 팔을 붙잡으며 그렇게 물어왔다.

밀리엄이 몹시 혼란한 낯을 한 채 뒤로 한 발 주춤 물러섰지만 남자는 밀리엄의 팔을 놓지 않았다.

“무슨 질 나쁜 장난질을 하는 겁니까, 당신…….”

경악과 분노, 혼란이 고루 섞인 밀리엄의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가 휴게실을 울렸다.

그게 자기 이름이냐니, 솔직히 장난 같은 말이기는 했지.

그러나 장난질이라기에 남자는 정말로 절박해 보였다.

정말로 절박하게, 조금 전 밀리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자기 이름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이건 또 무슨 전개람.

나는 입을 허 벌린 채 밀리엄과 금발 머리 남자를 번갈아 보며 어떻게든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느닷없이 떠오른 시스템창이 눈앞을 가로막은 것은 그때였다.

[ 과제 006. ]

제임스와의 마주침 달성! (보상 : 회중시계 1개)

진짜 제임스 로웰이라고?!

순간 육성으로 터져나갈 뻔한 괴성을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으며 나는 고개를 설설 내저었다.

이게 진짜 무슨 전개냐. 입이 있다면 대답을 해라, 제작진놈들아…….

“장난처럼 들리시겠지만, 정말로 몰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를 아십니까?”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저도 다른 말을 할 수 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로웰’이 그늘진 얼굴로 풀 죽은 목소리를 내며 밀리엄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밀리엄은 그대로 손을 들고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를 붙들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함께 비틀거리고픈 심정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래.

제임스 로웰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긴 했지만 그 밑은 땅이 아니라 바다였다.

에드워드 녹스의 마지막 희생자로 처리되었다는 언급이 나왔을 뿐, 딱히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후일담을 본 기억도 없다.

현실적으로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전개가 딱히 대단한 설정 오류나 아주 엄청난 무리수까지는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것까진 좋다 이거야.

그런데 기억상실이라니.

전작에서 저질러놓은 그 엄청난 일은 고사하고, 자기 이름자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라니!

“나더러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난데없는 전개에 기가 찬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를 악문 밀리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기야 이미 제임스 로웰에게 한차례 속았던 바 있는 그로서는 의심부터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터다.

나는 밀리엄의 복잡한 심경을 차고 넘치도록 이해했다.

<레드 헤링>에서 밀리엄 켄트우드는 제임스 로웰을 아주 믿을 만한 파트너이자 우정을 나누어도 될 법한 상대로 인식했다가 뼈아픈 배신을 당했다.

믿었던 상대에게 너는 사실 처음부터 내 장기 말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때의 기분이 어땠겠는가.

심지어 제임스 로웰이 결말에서 제시한 두 가지 선택지는 어느 쪽도 밀리엄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

그를 속이고 이용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인생을 벼랑 끝으로 내몰 선택 앞에 내던지고는, 목표한 바를 전부 이뤘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으며 저세상으로 사라져버렸던 인간이 바로 제임스 로웰이다.

그런 과거사를 아는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제임스 로웰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아닌 게 아니라 제임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밀리엄을 기만했고,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이제는 그 죽음조차 거짓이었던 셈이 되었으니까.

무슨 말을 해도 못 믿는 게 당연한데 하필이면 무려 기억상실증이시란다.

정말이지 편리한 변명이 다 있다는 생각부터 드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부축한 내 손을 조심스레 떼어낸 밀리엄이 누가 봐도 원망과 분노가 뚝뚝 떨어진다고 말할 법한 눈빛을 하고 제임스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밀리엄에게는 제임스를 원망할 자격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저 엄청난 소리가 진실이든, 혹은 또 다른 기만이든 간에.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선 밀리엄을 보며 제임스는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제임스의 동태를 살폈다.

기억상실이라는 말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저게 연기라면 좀 많이 소름이 끼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로 한 발 주춤 물러난 제임스가 불안이 고스란히 녹아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기, 기억은 안 나지만 제가 신사분께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군요. 일단은 사과를,”

“섭섭한 소리 마십시오, 제임스 로웰. 당신은 실수 따위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잖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정말로…….”

“그따위 웃기지도 않는 말로 또 나를 기만하려는 거라면 이번엔 절대,”

“으윽……!”

밀리엄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은 순간, 제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은 제임스 로웰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신음을 뱉었다.

뻗어 나가던 밀리엄의 손이 당황한 듯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제임스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허리를 숙였다가, 이내 무릎을 바닥에 박았다.

그러더니 별안간 밀리엄 쪽으로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통에 떨면서도 반드시 그의 얼굴을 확인해야겠다는 듯이.

머리를 반쯤 쥐어뜯다시피 잡은 손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금빛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헤집다 떠난 그 하얀 손이 밀리엄의 다리 쪽으로 더듬더듬 다가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밀리엄 또한 제 다리를 향해 다가오는 손을 그저 가만히, 그러나 아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만 볼 뿐이었다.

밀리엄의 바짓단을 왈칵 붙잡은 제임스가 여전히 일그러진 표정으로 밀리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다, 당신….”

무어라 제대로 된 말 한마디 잇지 못한 채, 밀리엄의 다리를 스쳐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와중에도 밀리엄의 바지를 붙든 손을 놓지 않은 제임스를 한번,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반쯤 패닉 상태에 빠진 듯한 밀리엄을 한번 보았다.

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급히 몸을 돌려 간호사를 부르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제임스 로웰의 등장이라니 정말이지 갑자기 이게 다 무슨 난리인지, 내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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