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하얀 죽음의 가면 (15)
시야가 흐릿해진 탓에 회중시계를 소환할 여력도 되지 않았다.
진작 꺼내놓을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몰려왔지만, 그야말로 뒤늦어버렸으니 이제 와 어쩔 도리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정말 이렇게 죽으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지?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주인공 목을 무슨 공공재처럼 졸라대는 이따위 빌어먹을 게임은 당장 삭제해버릴 텐데.
하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그냥 죽어버리게 되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어떡하지?
현실감각이 없어서일까. 너무 아파서 제정신을 놓아버리고 만 걸까.
솔직히 말해서 두렵기보단 억울했다.
이게 무슨 개죽음이야…….
천장에 붙은 네모난 철판이 두 개로 보였다가 이내 뿌옇게 흐려졌다.
그렇게 시야가 차츰 더 희미해지고, 의식이 저만치 멀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장 뒤이어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목에 가해지던 압박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거두어졌다.
영문 모를 급작스러운 해방에 나는 우선 목을 부여잡고 콜록콜록 잔기침을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어떻게든 일련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하여 흐릿해졌던 시야가 간신히 돌아왔을 때 제일 처음 보인 것은 활짝 열린 채로 끼익끼익 흔들리고 있는 천장의 철판이었다.
나는 그게 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단 죽을힘을 다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귀를 찌르는 듯한 이명을 뚫고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베로니카! 괜찮… 윽!”
멍한 상태로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수잔 로이드와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밀리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밀리엄이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는지 따위를 생각할 겨를 같은 건 없었다. 당장 목숨을 건졌다고 안심할 여유 역시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상황은 여전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충격 탓인지 어딘가 더 다친 곳이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수잔 로이드의 힘이나 기술이 너무 좋은 것인지 밀리엄은 좀처럼 그녀를 제압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조바심과 함께 리볼버 아이콘 쪽으로 자연히 시선이 움직였다.
그 순간 타이머가 절묘하게 0:00을 가리키더니, 아이콘이 완전히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나는 곧장 아이콘을 눌렀다.
차게 식어 달달 떨리는 손 안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자마자 그것을 양손으로 거머쥐고서,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있는 힘껏 짜내어 외쳤다.
“밀리엄, 떨어져요!”
다음 순간 내 쪽을 돌아본 밀리엄이 급히 수잔 로이드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나는 수잔이 다시 밀리엄과의 거리를 좁히려 들기 전에 그대로 그녀를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아악!”
수잔 로이드가 총알이 관통한 팔을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 잠시를 틈타 다시 수잔에게 달려든 밀리엄이 그녀의 양팔을 뒤로 돌려 찍어 눌렀다.
“베로니카, 거기 있는 밧줄 좀 가져다줘요!”
발버둥치는 수잔 로이드를 누르며 밀리엄이 외치는 소리에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윌 그렉슨의 시신이 묶인 의자 옆에 떨어져 있는 밧줄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힘이 빠져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하반신을 질질 끌고 의자 앞까지 기어가 밧줄을 잡아챘다.
[ ‘밧줄뭉치’를 획득했다. ]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도 안다고 짜증이라도 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밀리엄 쪽으로 밧줄을 던졌다.
그때까지의 내가 제대로 숨 쉬는 일조차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밀리엄의 손에 들어가는 밧줄뭉치를 확인한 직후였다.
그걸 인지하고 나자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급격하게 가빠지기 시작했다.
수잔 로이드의 팔을 밧줄로 묶는 밀리엄의 모습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고비를 넘겼다는 안심과 함께, 며칠 전에도 느꼈고 조금 전에도 느꼈던 익숙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스르륵 감기는 눈과 다시 기울어지는 몸뚱이를 그저 흐름에 맡긴 채로,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참나. 익숙해질 게 따로 있지.
어이가 없네, 진짜…….
***
제작진의 안배인지 내 무의식의 안배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경사스럽게도 모든 사태가 마무리된 뒤였다.
윌 그렉슨의 시신이 있던 방은 의외로 신관과 그리 멀지 않았던 모양으로, 덕분에 총소리가 신관까지 울려서 병원에 남아 있던 경찰들이 금방 출동해주었다고 밀리엄은 설명했다.
‘솔직히 그 상황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는데, 수잔 로이드가 범행을 부인하지 않더군요.’
도주한 줄 알았던 유력한 용의자의 시신. 기절해 널브러진 여자. 총상을 입고 포박당한 의사. 그녀를 제압하고 있는 남자….
난처했을 밀리엄의 입장이 차고 넘치도록 이해가 갔다. 그것은 확실히 밀리엄이 그 난장판을 만든 범인으로 몰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풍경이었으리라.
그 상황에서 수잔이 결백을 주장했다면 밀리엄은 물론이고 나까지 곤란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고 순순히 자백을 택한 수잔 로이드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겠으나.
아무튼 나는 곧장 병실로 옮겨졌고, 연락을 받고 달려온 멜리사가 상황을 수습했고, 수잔 로이드는 치료를 받은 뒤 체포되었다.
‘204호에서는 어떻게 탈출한 거예요?’
‘당신이 밟았던 그 철판이요.’
정신을 차린 후 밀리엄에게 듣기로 그가 204호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닥 한구석을 이질적으로 차지하고 있던 문제의 철판 덕분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수상해서 가장자리를 더듬어봤는데, 홈이 파여 있더라고요.’
그게 알고 보니 1층의 또 다른 방으로 연결되는 문이었는데, 그렇게 내려간 방의 바닥에도 같은 모양의 철판이 있었고….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에 열어봤다가… 뭐, 그렇게 된 겁니다.’
대충 얼버무리는 태도를 보아하니 본인이 날 구했다고 말하기는 영 민망한 모양이었다.
철판을 열기 전까지는 내가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저 얻어걸렸을 뿐인 일에 공치사를 받는 것은 외려 면이 서지 않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 황당무계한 주장에 나까지 맞장구를 쳐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는 밀리엄을 향해 틈날 때마다 감사인사를 했다.
곤란해하는 그의 얼굴이 퍽 보기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한편 지하에서의 소란으로 때를 놓치는 바람에 구관은 전소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다행히 불이 신관까지 옮겨붙거나 다른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고도.
그리고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문제의 204호를 떠올렸다.
어느 모로 보나 메이슨 교단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이던 방.
전개상 더 볼 게 없으니 태워버린 거겠지만 그래도….
“그 방을 더 살펴보지 못하게 된 건 좀 아쉬운 일이죠.”
다리를 다친 게 아니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은 귓등으로 들었는지 기어이 내 팔을 자기 팔에 걸친 밀리엄이 말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밀리엄의 팔에 꿰인 내 팔을 한번 보고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감사인사를 마구 퍼부어댄 것에 대한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는 내 눈빛을 분명 봤을 텐데도 모른 척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아침이라 그런지 병원 복도엔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 병원.
사건이 마무리된 이후로 벌써 나흘이나 지났건만 나는 여전히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는 세상에서 병원 신세라니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솔직히 며칠씩이나 입원해야 할 몸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의사는 큰일을 겪어 몸이 많이 놀랐을 테니 좀 더 쉬어야 한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 말에 열심히 맞장구를 치던 밀리엄은 또 어찌나 야속하던지.
그렇게 입을 모아 퇴원은 아직이라고 말하는 두 사람에게 열심히 나의 건강함을 어필하다 실패한 것이 불과 하루 전….
어제 일을 생각하니 다시금 불만이 차올라서 실수인 척 밀리엄의 발이라도 밟아주고 싶은 못된 마음이 들었지만, 매일 병문안을 와주는 수고를 감안해 그런 짓까지 하지는 않기로 했다.
게다가 날 두 번이나 구해준 은인이기도 하니까, 좀 다쳤다고 유난 떠는 것 정도는 너그럽게 봐줘야지.
어쨌든 그렇게 밀리엄과 팔짱을 낀 채 복도를 거닐며, 나는 말이 나온 김에 구관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내가 수잔 로이드와 마주쳤을 때, 그녀는 1층의 문을 통해 막 구관으로 들어선 참이었다.
시간상으로 보나 동선으로 보나, 나와 밀리엄이 있던 204호의 문을 밖에서 잠그고 2층에 불을 놓은 사람을 그녀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우릴 죽이려 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를 밀리엄에게 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린 내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복도 끝의 휴게실 앞에서, 밀리엄의 발걸음이 내 것보다 먼저 우뚝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무척 당혹스러운 광경이었다.
정면을 향한 채 흔들리는 시선. 크게 뜨인 눈과 벌어지는 입술.
경악에 찬 듯 딱딱하고 창백하게 굳어가는 표정.
흡사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라 보는 내가 다 섬뜩해질 지경이었다.
뭘 봤기에 저러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눈길이 향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휴게실 의자에 환자복을 입고 앉아 있는 금발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저를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이쪽을 보았을 때, 별안간 내 팔을 놓은 밀리엄이 빠른 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스치듯 지나간 얼굴이 조금 전보다도 선명한 경악과 분노로 물들어 있다고 느낀 찰나.
“제임스 로웰……!”
……뭐라고?
밀리엄이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사납게 씹어 뱉은 이름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금발 머리 남자도 당황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레드 헤링>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제임스 로웰은 이미 죽은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