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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26화 (26/121)
  • 26화. 하얀 죽음의 가면 (14)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발뒤꿈치가 계단에 부딪치기 무섭게, 수잔 로이드가 내 쪽으로 한 발 더 가까이 걸어왔다.

    그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사건 조사를 하다가 갱단에게 잘못 걸려서 당분간 숨어 지낼 곳이 필요하다고 둘러댔더니 기꺼이 협조해주던걸요. 닥터 로이드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패트릭 헤이즈가 가짜 환자라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

    ‘하, 하지만 드나든 사람이 없었던 건 맞을 거예요. 만약 있었다면 로이드 선생님께서 보셨을 테니까요.’

    마리아 블루벨이 마음 놓고 ‘204호에 드나든 사람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던 사람.

    “남작님.”

    “로, 로이드 선생님.”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

    불이 났으니 나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뒤돌아갈 생각 따윈 하지 않고, ‘여기에 무슨 일로 왔는지’나 묻고 있는 여자.

    수잔 로이드의 푸른 눈이 갈고리처럼 휘어졌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생각보다도, 눈앞의 상대가 결코 아군이 아니라는 강력한 경계심이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나는 아까 눌렀던 리볼버 아이콘으로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이콘을 눌러도 리볼버는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자세히 보니 아이콘의 위쪽 절반 정도가 회색인 데다, 옆에 조그만 글씨로 7:54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눈을 깜빡하자 숫자는 7:53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7:52로, 그 다음엔 7:51로….

    젠장. 빌어먹을. 젠장!

    쿨타임이 있는 아이템이었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줬어야지!

    하나뿐인 호신 도구에게 예상외의 배신을 당한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앞의 의사를 주시했다.

    구관 출입문과 나 사이를 완벽하게 가로막고 선 수잔 로이드는 아직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재수 없을 정도로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진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 터다. 굳이 표현하자면 현실을 직시할 시간을 주려는 마지막 친절 정도겠지.

    내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고 무엇을 확신해서 자신을 경계하고 있든, 더불어 내 확신이 자신에게 얼마나 불리한 것이든 그것이 이 건물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으며 나는 그저 이 순간 자신의 사냥감일 뿐이라는 현실을…….

    총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빌어먹을 쿨타임은 8분이나 남았고,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가며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는 일도 상대에게 대화의지가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지금 내게는 8분씩이나 여기서 버틸 재간이 없다. 밀리엄을 구하려면 어서 사람들을 불러와야 하는데, 당장 총을 꺼낼 수 없으니 탈출은 고사하고 꼼짝없이 저 여자 손에 붙들릴 상황.

    이렇게 된 이상 길은 하나뿐이다.

    나는 슬금슬금 옆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지하로 연결된 계단을 빠르게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둣발 소리가 위협적으로 등 뒤를 바짝 쫓아왔다.

    반쯤 미끄러지듯 내려간 계단 끝에는 다행히 문이 아니라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뒤를 돌아보는 찰나에도 따라잡힐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일단 냅다 복도를 따라 달렸다.

    ‘더 안쪽의 문은요?’

    ‘구관과 연결된 지하 통로로 향하는 문이죠.’

    지금으로서는 병원장이 말한 지하 통로가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옆으로 곧고 길었던 지상층과 달리 지하는 마치 미로처럼 커브와 갈림길로 가득했다. 인간적으로 이따위 곳에 들어오게 만들 예정이었다면 차분히 길을 찾을 여유 정도는 주는 게 도리 아닌가?

    드문드문 문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전부 닫혀 있는 데다 등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 통에 들어갈 여유가 없었다.

    멈춰 서서 문을 열어야 한다면 그것은 무조건 어제 신관 1층에서 보았던 그 문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대체 어느 길로 어떻게 가야 그 문을 찾을 수 있지?

    그렇게 달리고 또 달리고, 내가 지나는 복도가 처음 만나는 복도인지 이미 지나갔던 복도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채로 그저 달리기만을 반복하다가 나는 결국 한계에 봉착했다.

    숨이 차서 더는 달릴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낀 순간, 비죽 열려 있는 철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열린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반쯤은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나, 기실 방 안에 들어가 재빨리 문을 닫은 다음 어떻게든 리볼버의 쿨타임이 찰 때까지 버텨야겠다는 나름의 계산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문을 닫는 것보다 추격자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이 더 빨랐다.

    문을 밀던 나는 반대쪽에서 밀어오는 힘을 이겨내지 못한 채 방 안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윽……!”

    반쯤 떠오르다시피 했던 몸이 곧장 바닥과 충돌했다.

    딱딱한 바닥에 부딪친 뼈마디와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서 팔을 짚어 가까스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박동에 맞춰 쿵쿵 흔들리는 시야에 아찔해지는 정신을 힘겹게 붙들었다.

    활짝 열린 문 앞에 수잔 로이드가 나만큼이나 가쁜 숨을 내쉬며 저승사자처럼 서 있었다. 음산하기 짝이 없는 표정 위로 의미 모를 웃음기가 더해졌다.

    진짜 뭐야……, 왜 웃고 있지?

    의문과 공포 속에서 바들바들 떨던 내가 방 안쪽에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흔들리는 시야 한쪽 구석에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이 얼핏 보였다.

    일순 등골이 오싹해진 상태에서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렇게 돌아간 시선 끝에 비춰진 광경에 나는 그만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방에는 나와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여기로 뛰어드시다니, 촉이 정말 좋으시군요.”

    경직된 나를 비웃는 듯한 수잔 로이드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나는 방 안쪽의 의자에 묶여 축 늘어져 있는 윌 그렉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늘어진 팔에 연결된 정체불명의 수액.

    부릅뜨고 있으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눈.

    그가 눈도 감지 못한 채로 죽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윌 그렉슨의 시체’를 발견했다. ]

    나는 달달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다시 수잔 로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술 끝을 끌어올린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서늘한 감각이 온 신경을 강타했다.

    여유로운 웃음소리와 함께, 살인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결국 제 발로 이곳에 들어왔다는 점에서는, 끝까지 자기가 제 공범인 줄 알던 저 멍청한 남자와 크게 다르지 않으시지만요.”

    범인은 어떻게 윌 그렉슨을 납치할 수 있었는가.

    수잔 로이드는 내 무의식 어딘가에 반쯤 잠겨 있던 그 마지막 의문까지 친절하게 해결해주었다.

    공범이었다니.

    윌 그렉슨이 무고하지 않다는 건 조금 의외지만, 공범이었다면 확실히 이런 외진 곳까지 유인하는 데에도 별다른 저항이나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어쩌면 나 또한 이 지하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곳으로 향하도록 몰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나는 이를 으득 갈고서, 아주 조금이라도 그녀와 거리를 벌릴 심산으로 손을 더듬어 벽 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수잔 로이드는 느긋하게 사냥감을 몰아넣듯 나를 향해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일부러 힘주어 내디딘 듯한 발소리를 들으니 일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채찍질로 간신히 부여잡은 생각들도 영 시원찮은 것들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꼼짝없이 배드엔딩 루트를 타버린 거라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회중시계를 꺼내서 태엽을 감을까?

    하지만 이제 와 튜토리얼 직후로 돌아가 봐야 어느 지점에서 글러먹었는지를 알지 못하면 또 이런 상황에 봉착할 뿐일 텐데.

    아니야.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진정하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야지.

    간신히 쓸 만한 생각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 나는 일단 수잔 로이드의 두 손을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는 무기 같은 걸 들고 있지 않은 빈손이었다.

    나는 곁눈질로 리볼버 아이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렇게 한참을 미친 듯이 헤매고 내달렸는데도 쿨타임은 아직 3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등 뒤는 벽으로 막혀 있고, 구해야 할 사람의 생사도 알 수 없는 데다, 사람을 다섯이나 죽인 살인마가 고작 세 발자국 남짓 떨어진 채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저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3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베로니카의 몸은 수잔 로이드보다 머리 반개나 작은 데다 근육도 거의 없다.

    몸싸움으로는 3분을 버티지 못할지도 모르고, 설령 버틴다 해도 리볼버 아이콘을 누를 새가 없을 것이다.

    마른침을 꼴딱 삼킨 나는 그새 한 발자국 더 다가온 수잔 로이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왜 이런 짓을 했죠?”

    정체를 드러낸 범인답게 추리물의 클리셰를 따라, 혹은 곧 죽일 사냥감에 대한 마지막 동정으로 자기 동기를 술술 불어주었으면 하는 기대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리고 내 물음을 들은 수잔 로이드가 별안간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채, 내 앞으로 바싹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거라면 저보다 윌 그렉슨 씨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랍니다.”

    윌 그렉슨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발언에 정신이 분산된 것도 잠시, 화장기 없이도 붉은 입술이 소름 끼치는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 직접 물어보세요, 저세상에서.”

    동기 따위를 자기 입으로 친절하게 설명해가며 내 수명을 연장시켜줄 의사는 손톱만큼도 없다는 듯, 다음 순간 억센 힘이 몸을 밀쳤다.

    가까스로 세우고 있던 등이 다시 쿵, 하고 바닥과 충돌했다.

    내 몸을 밀어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탄 수잔 로이드가 곧장 목을 졸라오기 시작했다.

    “으윽……!”

    하필이면 또 목이라니!

    아직 다 낫지 않은 튜토리얼에서의 부상 위로 거센 악력이 더해지자 무지막지한 고통이 뒤따랐다.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저항해 보았지만 몸 위의 수잔 로이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체급보다도 힘의 차이가 너무 극명해서, 정말이지 조금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

    목을 끊어내는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조금씩 정신이 혼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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