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하얀 죽음의 가면 (13)
난데없는 감금 전개에 제작진을 원망하며 나는 굳게 잠긴 문을 노려보았다.
“대체 누가…….”
나는 조금 전 창밖으로 발 빠르게 스쳐 지나갔던 그림자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힘으로 문을 열어보려다 실패하고 벽에 기대어 선 밀리엄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우리가 병원 안을 들쑤시고 다니는 게 달갑지 않았던 누군가겠죠.”
누군가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결국에는 진범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멜리사 위브는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겨둔 채 거의 모든 수사 인력을 윌 그렉슨의 수색에 동원했다.
이 와중에 오늘 나와 밀리엄은 사건에 대해 조사 중이라는 사실을 딱히 숨기지도 않은 채로 움직였다.
기껏 수사의 초점을 병원 밖으로 돌려놨는데 웬 민간인 둘이 병원 안을 누비고 돌아다니며 사건을 캐고 있으니, 진범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을 수도 있지.
아무튼 문제는 당장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느냐 하는 건데…….
그렇게 팔짱을 끼고 턱을 매만지며 잠긴 문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자니 밀리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런 상황에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범인이 사건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했다고 생각해요.”
범인이?
내가 반쯤 기울인 고개를 밀리엄에게로 돌리자, 그가 찬찬히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상 완치되다시피 한 환자들만 노린 것도 그렇고, 애당초 살인이라는 걸 숨기려는 인간이 팔처럼 잘 보이는 곳에 주사 자국을 남길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걸 병원 측에서 괜히 쉬쉬하고 감추는 바람에 사건이 범인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리고….”
밀리엄은 크흠, 하고 잔기침을 한 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헤이즈 씨의 침대 위에 하얀 가루가 흩뿌려져 있었다는 이야기 기억해요?”
그야 기억하지. 며칠 전도 아니고 어제 들은 이야긴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한다고 대답했다.
“아직 성분 검사 결과를 받지 못해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게 염화칼륨 주사액이 침대에 튄 흔적이라고 봅니다.”
“그 얘기라면 어제도 했잖아요.”
“내가 주목한 부분은 그게 왜 튀었냐는 거예요.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인데, 보통 주사를 놓을…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납니까?”
말을 이어가던 밀리엄이 불현듯 미간을 왈칵 찌푸리며 물어왔다.
잠자코 그의 말을 따라 전개되어 가던 생각이 뚝 끊김과 동시에, 말마따나 강한 탄내가 코끝을 찌르고 지나갔다.
가, 갑자기 이건 또 뭐야.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잠긴 문 아래의 가느다란 틈새로 새어 들어오고 있는 회색 연기를 발견했다.
기겁해서 한 발 물러서다 발을 헛디딜 뻔한 나를 밀리엄이 붙잡았다.
그의 시선 또한 문 너머에서 흘러 들어오는 연기로 향해 있었다.
“굶겨 죽이려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밀리엄이 이를 악문 채 살벌한 농담을 중얼거렸다.
나는 이 상황에 그렇게 빈정거릴 여유를 챙길 수 있는 밀리엄에게 혀를 내두르는 한편으로, 이를 딱딱 부딪치며 초조하게 방 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신속하게 상황파악을 해보자.
문은 잠겼고 우린 갇혔으며 범인은 불을 놓은 것 같다.
이건… 전개의 일환이겠지? 설마 이미 뭔가를 그르쳐서 데드엔딩 루트를 타버린 건 아니겠지?
재수 없는 가설은 일단 무시하는 걸로 하고, 이게 스토리 전개의 한 부분이라면 분명 방에서 나갈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 일단 빨리 나갈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나는 밀리엄의 옷자락을 불안스레 잡아당기며 재촉한 뒤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시야가 점점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하며, 어디서 밀려오는지 알 수 없는 열기와 함께 타는 냄새가 짙어져갔다.
모노클을 사용할 생각으로 시야 오른쪽의 아이콘들을 확인하던 순간 밀리엄이 내 팔을 붙들었다.
“베로니카. 혹시 오늘도 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밀리엄은 튜토리얼에서 괴한을 만났을 때 내가 쏜 총소리를 듣고 달려왔었지.
“이… 있어요. 하지만 창문은 쏴봤자 소용이 없지 않을까요…….”
나는 커다란 나무판자에 가로막힌 창문을 힐긋 보며 말을 흐렸다.
그러자 그는 그쪽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복도 쪽으로 난 작은 창문을 가리켰다.
“저걸 깨자고요?”
“네.”
“아니, 저건 깨봤자,”
나밖에 못 나갈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로 반쯤 입을 벌린 채 밀리엄을 응시했다. 설마.
“밀리엄, 설마.”
“한 명이라도 나갈 수 있다면 나가는 게 맞죠.”
“당신을 두고 가라고요?”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버리고 가란 게 아니라 먼저 나가서 구조요청을 해달란 겁니다.”
밀리엄이 피식 웃으며 코끝을 찡긋해 보였다.
먼저 나가서 구조요청을 해달라니 말이야 쉽지. 막말로 내가 사람들을 불러오는 게 먼저일지 그가 질식사하는 게 먼저일지 알 게 뭐란 말인가.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고, 그런 내 불안을 느꼈는지 밀리엄이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진짜로요. 믿을 테니까 버리면 안 됩니다. 알았죠?”
사실은 정말 두고 가버려도 괜찮다는 듯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말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그래. 내가 저 작은 창문을 통해 나가는 게 맞는 전개인 것 같다.
설마하니 밀리엄 켄트우드가 이렇게 일찍, 심지어 이런 허망한 타이밍에 하차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
나는 손을 뻗어 리볼버 아이콘을 눌렀다.
좀 전까지 비어 있던 손안에 날렵한 리볼버 한 자루가 나타났지만, 튜토리얼 당시 병원에서 수첩을 꺼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밀리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리볼버를 단단히 쥔 나는 깨진 유리가 튀어 다치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창문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리고 창문을 겨눈 뒤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발사된 총알이 유리창을 꿰뚫고 복도로 날아갔다.
밀리엄은 총알이 빠져나간 구멍을 중심으로 저저적 균열이 간 창문을 팔꿈치로 때려 부쉈다.
그는 일단 내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구멍을 낸 후, 가장자리에 삐죽빼죽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는 조각들까지 깨트려 털어냈다.
그러고는 열쇠가 든 나무상자가 놓여 있던 테이블을 창문 아래로 끌어다 놓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테이블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창문은 정말 딱 베로니카 정도 되는 작은 체구가 아니면 드나들 수 없을 것 같은 크기였다.
나는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었다가, 이내 되돌아와 고개를 돌려 밀리엄을 보았다.
“얼른 가서 사람들을 불러 올게요.”
“든든하네요.”
내 결연한 말에 그가 씩 웃으며 어서 나가라는 듯 손을 올렸다.
이런 상황에나 보았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아까울 만큼 매력적인 미소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창틀을 넘은 뒤, 손을 놓고 복도 바닥으로 다리를 내렸다.
그리고 우선은 바깥에서 문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손잡이에 열쇠 구멍이 나 있는 걸 보면 바깥에서 열쇠로 잠그는 구조인 모양이었다.
불길은 복도 끝쪽에서부터 조금씩 번져오고 있었다.
열릴 생각을 않는 문과 후끈하게 느껴지는 열기, 온 복도에 자욱이 번진 독한 연기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역시 우선은 도움을 청하러 밖으로 나가는 게 맞겠지.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서, 나는 발밑을 최대한 조심해가며 계단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잡동사니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복도와 달리 계단은 말끔한 편이라 뜀박질을 서두르는 데도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발로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면서, 머릿속으로는 불이 났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 밀리엄이 하던 이야기를 되짚어보았다.
‘나는 범인이 사건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했다고 생각해요.’
그의 생각이 정답이라고 치자.
범인은 사건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서 일부러 상태가 좋은 환자들만을 골라 살해했지만, 평판을 의식한 병원 측의 뜻하지 않은 은폐가 장해물로 작용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가장 최근의 희생자인 패트릭 헤이즈가 아픈 곳이라곤 일절 없는 가짜 환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범인이 본래 바랐던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네 번째 희생자가 패트릭 헤이즈였던 건 과연 우연일까?
그리고.
‘내가 주목한 부분은 그게 왜 튀었냐는 거예요.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인데, 보통 주사를 놓을….’
밀리엄은 ‘보통 주사를 놓을 때’라고 말하려던 것 같았다.
보통 주사를 놓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지?
주사기 안에 주사액을 넣고, 그걸 환자에게 꽂아 약을 주입하고.
아니, 그러고 보면 그 사이에….
탁.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마지막 계단을 지난 구둣발이 1층 바닥을 밟았다.
나는 곧장 구관을 빠져나가기 위해 출입문이 있는 정면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방금 막 들어온 듯 문 앞에 서 있는 늘씬한 그림자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캠벨 남작님?”
그림자의 주인이 나를 부르며 내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햇빛을 등지고서 걸어오는 인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나로 질끈 묶은 금발머리. 하얀 가운. 그림자의 주인은 수잔 로이드였다.
그녀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계단 위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밖을 지나다 보니 2층에서 연기가 나는 것 같아서….”
“불이 났어요! 어서 나가서 신고하고 사람들을 불러야,”
다급하게 말을 늘어놓던 나는 일순 서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보통 주사를 놓을 때.
의사나 간호사들은 실린더에서 공기를 빼기 위해 피스톤을 밀어 넣는다. 그 과정에서 주사액 일부가 공중에 튀곤 하지만 그건…….
‘내가 주목한 부분은 그게 왜 튀었냐는 거예요.’
그건 주사를 놓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