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하얀 죽음의 가면 (12)
끼이이익.
금방이라도 무언가 영 반갑지 못한 것이 튀어나올 듯한 소리를 내며, 성 조나단 병원 구관의 문이 열렸다.
“잠겨 있지 않네요.”
녹슨 손잡이를 잡아 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로 안쪽을 살핀 밀리엄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나름 사유지일 텐데, 버려둔 건물이라 아예 출입통제도 하지 않는 건가?
나는 열린 문 너머의 컴컴한 실내를 넘겨다보며, 이 낡아빠진 건물의 문이 잠겨 있을 경우 취하고자 했던 몇 가지 행동들을 떠올렸다.
공연한 의심을 사는 걸 무릅쓰고 병원장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거나, 무식하고 위험하게 창문을 깨고 들어가는 것…….
어느 것을 상상해도 내키지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뭐,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건 다행인 일이었다.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밀리엄이 안쪽에서 문을 잡아주었고, 나는 열린 문 사이로 걸음을 내디뎠다.
당연하게도 조명이랄 것이 없는 구관 안은 어두웠지만, 아직 해가 지지 않아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살 덕분에 앞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와 밀리엄은 다시금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뒤로한 채 곧장 계단을 밟아 2층으로 올라갔다.
깨진 창문을 통해 몇 년에 걸쳐 들어온 듯한 낙엽들이 쌓인 층계참을 지나 도착한 2층은, 잠시 보고 지나친 1층보다도 훨씬 스산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한껏 더러워진 창문들이 빛을 반쯤 가려 한층 사위가 어두워진 와중에, 너무 고요한 나머지 뚜벅뚜벅 메아리치는 나와 밀리엄의 발소리는 꼭 건물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추리물을 좋아하지만, 으스스한 폐허에서 귀신이나 크리쳐 같은 것들이 불시에 튀어나오는 종류의 호러물에는 면역이 없다.
하물며 폐병원이라니? 이게 호러 게임이었다면 뭐 이런 노골적인 장소 선정이 다 있냐며 머리를 쥐어뜯었을 판이다.
하여간 당장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복도 끝에서 환자복 차림의 유령이 피를 뚝뚝 흘리며 달랑거리는 손을 뻗은 채 달려온다 해도 너무나 잘 어울리기만 할 것 같은 이런 공간은 내 정신건강에 이롭지 못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어떻게든 이곳에서의 용건을 빨리 마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무언가 딱딱한 것에 발이 걸려 몸이 기울어졌다.
다행히 그대로 넘어져 머리가 깨지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어어, 하며 쓰러지던 내 허리를 밀리엄이 급하게 낚아채 준 덕이었다.
나를 살짝 들어 비교적 평평한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해요, 베로니카.”
“고… 고마워요.”
나는 순간 꼭 붙잡았던 밀리엄의 옷자락을 슬쩍 놓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내가 방금 밟았던 바닥 쪽을 일별했다.
어린애 팔뚝만 한 두께의 쇠파이프가 데구르르 구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더 쓰지 않을 건물이라고 안 쓰는 자재 따위를 마구잡이로 버려놓고 간 모양인지, 별로 넓지도 않은 복도에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발밑도 조심해가며 걸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눈앞에 하얀 것이 쓱 내밀어졌다.
이 정도 분위기면 정말 뭔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참이던 터라 화들짝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보니, 내밀어진 것은 밀리엄의 손이었다.
하얀 장갑을 낀 커다란 손.
졸지에 남의 손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 친 꼴이 되어버린 나는 민망한 기분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밀리엄을 올려다보았다.
“혼자 걸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잡고 걷는 편이 좀 더 낫잖아요?”
“어쩌다 발 한번 잘못 디딘 것 가지고.”
“심리적으로 말이에요.”
“하, 하나도 안 무섭….”
“나는 무서우니까 좀 잡아줘요.”
무서워하는 기색 따위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말한 밀리엄 켄트우드가 내 앞으로 다시금 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뻔뻔한 태도가 황당했던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린 나는, 결국 그가 내민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옆으로 길게 이어진 복도에는 설계도에서 본 것처럼 방이 제법 많았다.
그래도 문마다 방 번호가 양각되어 있어서, 204호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기군요. 204호.”
204호의 문 앞에서 내 손을 놓은 밀리엄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1층의 출입구가 그랬듯이, 204호의 나무문 또한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 성 조나단 병원 구관 204호 ]
나는 어떤 좋은 징조처럼 떠오르는 시스템 문구를 확인하며 밀리엄을 따라 204호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복도보다도 훨씬 어두웠다.
왜인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정면의 창문에 커다란 나무판자 두 개가 가위표로 덧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달리 조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어두워서야 뭘 제대로 찾을 수나 있으려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창문에서 눈을 떼고 다시금 방 안을 살폈다.
창가에는 뒤집힌 의자며 부서진 책상 따위가 마치 창문으로의 접근을 막는 거대한 가시덤불처럼 위협적으로 이리저리 뒤엉켜있었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폐허로만 보였던 복도에 비해 꼭 누가 인위적으로 조성해놓은 듯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양옆의 벽에 멀쩡하게 하나씩 서 있는 책장들이었다.
오른쪽의 책장도 왼쪽의 책장도 책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책들이 꽂혀 있는 모양새가 워낙 깔끔해서 잘 정돈된 도서관 서가를 보는 것 같았다.
그쪽으로 걸어가 책장을 스윽 손으로 쓸어본 밀리엄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먼지가 거의 없어요. 누군가 최근까지 드나든 것 같은데….”
더는 쓰지 않을 작정으로 버리고 간 건물에 책으로 꽉꽉 들어찬 책장이 두 개나 있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인데, 누군가 드나든 것 같다고?
나는 밀리엄이 서 있는 책장 앞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디뎠다.
캉!
느닷없이 발치에서 울리는 쇳소리에 밀리엄이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고, 나는 당황해서 급히 발밑을 확인했다.
갈색 구둣발이 커다란 정사각형 모양의 철판을 밟고 있었다.
보아하니 바닥이 꺼져서 땜질이라도 해 둔 모양새였다.
나무 바닥을 철로 메워놓다니 센스 하고는.
나는 구두코로 캉캉, 하고 두어 번 정도 더 철판을 두드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겨 밀리엄 쪽으로 다가가려다가, 무언가 몹시 낯익은 것을 본 듯한 기분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철판 위에 사분원 형태로 새겨져 있는 정체불명의 문자가 보였다.
고개를 뒤로 빼고 최대한 시야를 넓혀서 보니, 철판을 포함한 바닥 전체에 자그마한 글자들이 둥그런 문양을 이루며 그려져 있었다.
“이건….”
어두워서 세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었으나 대략적인 모양을 확인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바닥에 그려진 것은 캠벨 저택의 지하실에서 보았던 바로 그 문양이었다.
그리고 빼곡하게 나열된 문자들이 이루고 있는 원 한가운데, 이제 보니 작은 유리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밀리엄과 책장 쪽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테이블로 걸어갔다.
투명해서 몇 걸음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는 어른 손바닥만 한 나무 상자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손을 뻗어 상자를 집은 나는 우선 그것을 흔들어보았다.
[ ‘나무 상자’를 획득했다. ]
안에 든 무언가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상자 벽과 부딪쳤다.
“그러고 보니 이 책들에도 전부 메이슨 교단의 문장이 새겨져 있… 베로니카, 그건 뭡니까?”
“그게…….”
나는 말끝을 흐리며 상자를 이리저리 뒤집어보았다.
걸쇠가 있는 면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물쇠조차 달려 있지 않은 단순한 구조의 걸쇠가 손에 걸렸다.
곧장 걸쇠를 풀고 상자를 열자 반쯤 기울어져 있던 상자가 내 손 위로 반짝이는 물건 하나를 툭 뱉어냈다.
그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뒤에야 나는, 다소 얼떨떨한 목소리로 밀리엄에게 건네는 대답을 완성할 수 있었다.
“열쇠……네요.”
[ ‘열쇠’를 획득했다. ]
사위가 어두워 그런지 희뿌연 빛을 내며 존재감을 발하는 시스템 문구 너머로 빠르게 걸어오는 밀리엄이 보였다.
나는 집게 손가락을 움직여 반대쪽 손바닥 위의 열쇠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창문을 막고 있는 나무판자 틈으로 희미하게 들이치고 있는 햇빛에 그것을 비추어보았다.
고풍스럽고 어딘지 비싸 보이는 디자인의 자그마한 금속 열쇠가 미약한 햇빛을 반사해 금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정황상 예언서의 열쇠임에 틀림이 없어 보이는 그 물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등 뒤의 문 쪽에서 들려왔다.
난데없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복도 쪽으로 난 작은 창문으로 검은 인영이 빠르게 스쳐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뭐지?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나보다 한발 먼저 움직인 밀리엄이 급히 문을 향해 달려가더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몇 번이고 방 안을 울렸지만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문이 잠겼어요, 젠장……!”
얼굴을 일그러트린 밀리엄이 어깨를 문에다 부딪치며 사나운 욕설을 씹어 뱉었다.
나는 열쇠를 급히 치마 주머니에 넣고 밀리엄에게로 뛰어 갔다.
문이 잠겼다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밀리엄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돌려보니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어째 이 문이고 저 문이고 열쇠가 든 상자까지 김이 샐 정도로 죄 열려 있더라니.
넣어놓고 가둬버릴 심산으로 친절하게 다 열어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