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하얀 죽음의 가면 (11)
거짓말이었다고?
나는 고개를 휙 돌려 밀리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외침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마리아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거짓말이었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밤새 204호에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던 거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한 마리아의 어깨가 안쓰럽게 움츠러들었다.
밀리엄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당혹스러워하는 밀리엄에게 보이지 않도록 치맛자락 사이에 숨긴 주먹을 불끈 쥐며 쾌재를 불렀다.
“그럼 드나든 사람이 있었다는 소린가요?”
“그,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마리아 블루벨은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며 간절하게 떨리는 시선으로 나와 밀리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시선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사, 사실은 근무 중에 깜빡 잠이 들어버려서요. 드나든 사람이 있었어도 보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왜 어제는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약품 창고 열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잘릴 뻔한 게 얼마 전이라, 근무 중에 졸았다고 하면 이번엔 진짜로 해고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지금까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하필 어제 새벽에만 유독 잠이 쏟아져서….”
마리아가 늘어놓는 말을 들으며 밀리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조금 곤란해 보이지만 다행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 얼굴로 두어 차례 더 한숨을 내뱉는 사이, 마리아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 하지만 드나든 사람이 없었던 건 맞을 거예요. 만약 있었다면 로이드 선생님께서 보셨을 테니까요.”
“닥터 로이드도 같이 잠들었던 게 아니어야 할 텐데요…….”
밀리엄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나는 착잡해하는 밀리엄과, 그의 반응에 한층 더 기가 죽은 마리아를 한 번씩 바라보며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위로의 시선을 건넸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문득 생각이 멈췄다.
잠깐만 있어 보자. 방금 분명히….
“어제 새벽에만 유독 그러셨다고요?”
“네, 네. 원래 저는 밤잠이 없는 편이거든요.”
마리아 블루벨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밀리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베로니카?”
“아, 아뇨. 이상하다기보다는… 뭔가 조금 신경이 쓰인다고 해야 하나.”
나는 찜찜하기 짝이 없는 기분으로, 어제 밀리엄에게서 전해 들었던 앤서니 롭의 증언 하나를 떠올렸다.
‘어젯밤이라면 모처럼 일찍 잠들어서 아침까지 깨지 않았어요.’
‘모처럼’ 그랬다는 건, 평소에는 그렇게 일찍 잠들지 않는다는 소리 아닌가?
옆 침대를 쓰는 환자가 모처럼 일찍 잠들어 아침까지 깨지 않았고, 당직근무를 서던 간호사 또한 유독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던 밤.
하필이면 그 밤에, 패트릭 헤이즈가 살해당했다.
게다가….
‘보름쯤 전에 수면제와 주사액 몇 병이 사라져서 잠시 시끄러웠지요….’
약품 창고에서 사라진 것은 주사액과 수면제.
그러나 윌 그렉슨의 침대 밑에서 발견된 가방에 들어있던 건 사용하지 않은 염화칼륨 주사액 여섯 병뿐이다.
“수면제는 어디로 갔을까요…?”
나는 밀리엄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밀리엄 역시 조금 커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네. 불면증이 있어서 늘 잠들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저께 저녁엔 이상할 정도로 잠이 몰려왔습니다.”
밀리엄이 다짜고짜 건넨 질문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앤서니 롭은 그렇게 대답했다.
“혹시 그게 언제쯤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아마 저녁 식사 직후였던 것 같은데요. 바로 누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누울 수밖에 없었거든요.”
저녁 식사 직후라면, 역시 병원식에 수면제가 들어 있었던 걸까?
밀리엄과 앤서니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나는 이내 로즈 그렉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비어버린 남편의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 젖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그렉슨 부인.”
“아, 남작님…….”
“힘드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하나만 여쭈어봐도 될까요?”
로즈 그렉슨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께 남편분이 잠드신 후 귀가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때 병실의 다른 환자분들도 잠들어 계시진 않았나요?”
“그러고 보니… 그렇게 늦은 시각도 아니었는데 다들 주무셔서 별일이다 싶었던 기억이.”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로즈에게 인사를 건네고서, 나는 병실 전체가 가장 잘 보이는 지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시야 오른쪽 하단의 모노클 아이콘을 눌렀다.
아이콘 옆의 숫자가 3으로 줄어들면서, 남작의 서재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바닥 위로 모노클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반짝이는 은색 손잡이를 잡고 렌즈를 눈에 가져다 댔다. 그러곤 떨어진 물건이라도 찾는 양 슬쩍 몸을 숙여 이쪽저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저번에는 탐색해야 할 곳에서 빛이 났었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시야 안에서 빛나는 거라곤 벽에 걸린 은은한 가스등 조명과 창밖의 햇살뿐이었다.
나는 앤서니와 대화를 나누는 밀리엄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비춰본 뒤, 아무런 수확 없이 렌즈를 눈에서 뗐다.
손 안에 들어 있던 모노클이 먼지처럼 파스스 흩어져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선 채로 눈을 깜빡였다.
뭐지?
‘성 조나단 병원 204호’에서 열쇠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한눈에 곳곳이 전부 들어오는, 별로 넓지도 않은 병실 안에서 별안간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 사이, 앤서니와 이야기를 마친 밀리엄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조금 전 들었던 로즈 그렉슨의 대답을 떠올리며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수면제 건에 대해서는 우리의 예상이 맞는 것 같다는 의미였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롭 씨.”
“실례했어요, 그렉슨 부인.”
그렇게 각자의 상대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뜻을 전한 뒤 나와 밀리엄은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수면제라.”
밀리엄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나는 기다란 병원 복도를 따라 또각또각 걸어가며 말을 꺼냈다.
“그냥 추측이긴 하지만요.”
“그럴듯한 추측이죠.”
내 느릿한 속도에 맞춰 걷기 시작한 그가 대꾸했다.
기실 내가 생각해도 퍽 그럴듯했기 때문에, 나는 굳이 더 겸손을 떨어서 내 의견의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기로 했다.
범인이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다인용 병실에 숨어들어, 다른 환자들에게 들킬 위험을 고스란히 감수한 채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는 건 역시 부자연스럽지.
이 와중에 하필이면 범행이 일어났던 날 평소의 생활패턴과 다르게 잠들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고, 약품 창고에서 사라졌다는 수면제는 아직도 그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그러니 범인이 문제의 수면제를 이용해 보다 안전한 범행을 도모했으리라는 추측에도 무리는 없으리라.
환자들은 병원식에 약을 타서 재울 수 있었겠지만….
“의사나 간호사에게는 따로 약이 든 뭔가를 건네주지 않았을까요?”
“내일 두 사람을 찾아가서, 누군가에게 먹을 걸 받은 적이 없는지 물어보는 게 좋겠군요.”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당장은 만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수잔 로이드는 휴가를 냈다고 했고, 마리아 블루벨은 오늘 오전에만 근무한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수면제 건을 완전히 해결하는 일이 내일로 미뤄진 뒤, 나와 밀리엄 사이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느긋하게 걸으며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별생각 없이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액자 안에는 복층 건물의 낡은 설계도가 들어있었다.
그냥 액자려니 하며 무심코 앞을 지나치려던 발걸음이 우뚝 멈춘 것은 그때였다.
“베로니카?”
조금 뒤 내가 뒤따르지 않는 것을 깨달았는지, 몇 걸음 앞에서 나를 부르는 밀리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그쪽으로 걸음을 마저 옮기거나,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선 채로 액자 속의 설계도를 응시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그곳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때.
[ ‘성 조나단 병원 구관 설계도’를 발견했다. ]
나는 헉, 하고 놀라 황급히 손을 떼었다.
반짝 떠올랐던 시스템 문구가 금세 사르륵 사라졌다.
“밀리엄.”
나는 여전히 설계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밀리엄을 불렀다.
그러곤 곧장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액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구관 설계도인 모양이에요.”
“아, 뒤뜰 안쪽에 있던.”
“네. 그 낡고 으스스한 건물이요.”
“그러고 보니 2층짜리였죠.”
어느새 내 옆에 서서 나와 함께 액자 안의 설계도를 바라보던 밀리엄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기념을 위해 걸어둔 것으로 추정되는 도면의 2층 설계 부분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좌우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 자그마한 방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옆으로 넓어서 방도 충분히 많은 것 같으니까….”
“저기에도 204호가 있을 테고요.”
내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대변하는 것 같은 말이 나직하게 흘러나왔을 때, 나는 설계도에 박아뒀던 시선을 밀리엄에게로 돌렸다.
무언의 합의 아래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