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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22화 (22/121)
  • 22화. 하얀 죽음의 가면 (10)

    당신도.

    본인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안에 있을지 모르겠다는 건 그냥… 생각해본 가능성 중 하나에 가깝지만요.”

    “정답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굳이 한 가지 가능성에만 전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겠죠.”

    “네?”

    “그렉슨 씨가 병원 밖으로 도망쳤을 가능성은 바깥의 경찰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 사람이 여기 어딘가 남아 있을 가능성에 대비해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말한 밀리엄이 하얀 장갑을 고쳐 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몸을 일으키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 일어났다.

    확실히, 그의 말에는 그른 구석이 없었다. 꼭 수사가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라는 법은 없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가 코끝을 찡긋하며 말을 덧붙였다.

    “병원을 뒤지다 보면 열쇠에 대한 단서를 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아, 그것도 그렇겠네요.”

    “‘그것도 그렇겠다’니, 애초에 우린 열쇠를 찾으러 이 병원에 온 거잖습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왠지 겸연쩍어진 나는 뺨을 긁적이며 밀리엄의 눈치를 보았다.

    이런 말을 해도 되나 하는 걱정이 순간 들었으나, 내게는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밀리엄 앞에서 뻔뻔하게 시치미를 뗄 깜냥이 없었다.

    “당신은 이 사건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날 너무 꽉 막힌 사람으로 본 것 아닙니까.”

    “한 가지 일에 깊이 몰두하는 성실한 사람으로 본 건데요.”

    하하. 밀리엄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는 몇 번의 웃음기 섞인 헛기침과 함께,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이제껏 살면서 단 한 가지에 몰두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글쎄요….”

    정면을 향했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별로 현명한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를 놓쳐버리고 나니 달리 갈 길이 마땅치 않았거든요.”

    아, 내가 조심성 없이 지껄인 말이 또 이 남자의 영 좋지 못한 부분을 스치고 지나가 버린 걸까.

    조금만 방심할라치면 저렇게 치고 들어오니 원…….

    나는 내심 고개를 내저으며 무슨 대꾸를 꺼내야 이 불편한 상황을 잘 넘겼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했다.

    그러나 상황은 의외의 타이밍에 의외의 형태로 넘어갔다.

    정면과 바닥 사이 어디 즈음을 바라보던 밀리엄이 별안간 내 어깨너머로 시선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연 덕이었다.

    “조이?”

    뜻밖의 이름에 휙 고개를 돌리니, 돌아간 시선 끝에 헐렁하고 낡은 옷을 입은 소년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켄트우드 씨. 캠벨 남작님.”

    나는 갈색 모자를 구겨지도록 꾹 쥔 채 왠지 모르게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이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밀리엄이, 나만큼이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얼떨떨하게 말했다.

    “네가 왜 여길…….”

    “탐정님을 죽인 범인을 알고 싶어서 왔어요.”

    밀리엄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패트릭 헤이즈의 어린 조수가 밝은 갈색 눈을 또렷이 빛내며 대답했다.

    패트릭 헤이즈의 죽음을 마주한 직후에 그러했듯 여전히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였음에도,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제법 단단했다.

    “수사관님은 저도 일단 용의자 중 하나니까, 부를 때까지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고 하셨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걸요.”

    “조이, 범인을 원망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아서…….”

    “그럼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오늘 밝혀지지 않으면 내일 또 올 거고요.”

    조이의 단호한 말에 밀리엄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런 밀리엄을 슬쩍 보았다가, 조이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마음을 먹어도 단단히 먹고 온 모양인데 집에 가라고 등을 떠밀어봐야 뭘 하겠는가. 무슨 말로 어떻게 설득을 하든지 간에 씨알도 안 먹힐 것이 자명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마주친 것도 다 이유가 있을 테니 여기서는 단념하고 궁금증이나 해결하는 것이 옳다.

    “저, 조이. 그럼 내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남작님. 얼마든지요.”

    “그저께 저녁에, 헤이즈 씨랑 그렉슨 씨가 정확히 어쩌다 싸우셨던 거야?”

    얼마든지 물어도 된다고 말한 주제에, 정작 내 물음을 들은 조이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폈다.

    마치 싸움의 이유에 내가 연관되어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저, 그게 실은… 그저께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렉슨 씨가 남작님에 대해 다소 무례한 발언을 하셨어요.”

    “무례한 발언?”

    내가 캐묻자 조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죄 없는 어린애를 괴롭히는 듯한 기분을 맛보며 잠자코 선 채 조이의 설명을 기다렸다.

    조이는 한참을 끙끙 앓다가, 나와 밀리엄의 눈치를 번갈아 보았다가, 이내 주저하며 윌 그렉슨의 발언들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그따위 건방진 언사라니. 본래대로라면 캠벨 가에서 먼지 한 톨 물려받지 못했을 계집이.’

    ‘사촌이 죽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 처남과 눈이 맞아? 천박하기 짝이 없어.’

    ‘그래도 끼리끼리 잘 만난 셈이긴 하지. 천박하고 수준 낮은 종자들 같으니….’

    조이의 증언을 가만히 듣던 밀리엄은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나는 그냥 실소나 터뜨렸다.

    뭐… 엄밀히 말해 내가 돈 있다고 답지도 않게 시건방을 좀 떤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창피당한 사람이 뒤에서나마 성을 내며 체면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도 더러 있는 일이고.

    요컨대 별로 억울하거나 불쾌하거나 놀라울 것은 없었다.

    뒤이어 조이는 윌 그렉슨이 아내에게 늘어놓는 그 말들을 듣고 있던 패트릭이 그를 향해 대뜸 일침을 날렸다고 회고했다.

    ‘듣자 듣자 하니까 정말이지…. 진짜로 천박하고 수준 낮은 쪽이 누군지 모르겠군요.’

    ‘뭐요?’

    ‘안젤리나 캠벨 부인에게 얼마나 무례하게 구셨을지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이 저녁 식사가 도착한 뒤에야 끝났다는 모양이다.

    솔직히 나에게는 윌 그렉슨보다도 패트릭의 행동 쪽이 의외로 느껴졌다.

    윌 그렉슨이 다소 추하게 군 것은 사실이지만, 막말로 그가 나나 안젤리나 캠벨을 대신해 화를 낼 이유는 없었을 텐데.

    원래 좀 오지랖이 넓은 편이었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나는 어째선지 갑자기 생각에 잠긴 듯한 밀리엄을 힐끗 보고서, 조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싸움의 원인이 원인이었던 터라, 말하는 내내 내 눈치를 보던 갈색 머리 소년이 이내 안심한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

    범인이 잡힐 때까지 병원에 있겠다는 굳은 결심을 밝힌 조이를 뒤로한 채, 나와 밀리엄은 곧장 조사에 착수했다.

    어제 온종일 멜리사와 함께 돌아다닌 밀리엄을 수사 인력으로 인식한 모양인지, 병원 사람들은 그의 질문에 퍽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204호 환자들의 입원 시기를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밀리엄의 질문을 받은 간호사는 앤서니 롭의 입원이 일주일 전이고, 윌 그렉슨이 입원한 지는 보름이 훨씬 넘었다고 증언했다.

    날짜만 놓고 봤을 때, 204호에서 그간의 범행을 모두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윌 그렉슨이나 로즈 그렉슨뿐이라는 결론이 나온 셈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식의 결론을 내려도 좋은 걸까?

    아무래도 영 찜찜한 기분 속에서 나는 질문에 대답해준 간호사, 마리아 블루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미세하게 찌푸린 미간. 좀처럼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시선.

    무언가 다른 말을 하고 싶은 사람처럼 자꾸만 달싹이는 입술.

    패트릭이 죽던 밤에 당직근무를 했다는 그녀는 우리가 다가가 질문을 건넨 순간부터 말을 하는 내내 어딘지 모르게 몹시 불안하고 초조해보였다.

    그리고 밀리엄의 회고에 따르면 마리아 블루벨의 저러한 태도는 비단 오늘만의 일도 아니었다.

    ‘밤새 204호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나온 사람도 없었고요…….’

    어제, 멜리사와 밀리엄 앞에서 그런 증언을 하면서도 굉장히 동요하는 것 같았다고 했지.

    밀리엄은 ‘수사관에게 질문받는 상황 자체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워낙 많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 모양이었지만.

    왠지 더 캐낼 게 있을 것 같은 분위긴데.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자니 별안간 눈앞에 선택지 창이 나타났다.

    [ 1. 뭔가 숨기는 게 있군요, 당신. ]

    [ 2. 혹시 우리가 더 알아야 할 사실이 있지는 않나요? ]

    나는 눈앞의 문장들을 일별한 뒤, 나와 마주 서 있는 마리아 블루벨을 찬찬히 살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동요를 전혀 숨기지 못한 채, 가엾게도 겁먹은 토끼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저렇게 소심해 보이는데 괜히 세게 나갔다간 역효과만 불러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다 이해하겠다’는 의미의 미소를 지으며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혹시 우리가 더 알아야 할 사실이 있지는 않나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밀리엄이 ‘음?’하고 의문을 표하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지만, 나는 마리아 블루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 질문을 들은 마리아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도 훨씬 초조해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넘어다보며 엄지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나를 한번 보았다가 시선을 조금 들어 밀리엄을 본 다음에는 더 겁먹은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기까지 했다.

    그 행동에서 부자연스러운 낌새를 느꼈는지 밀리엄이 입을 열었다.

    “미스 블루벨. 만약 어제 못다 하신 말씀이 있다면 부디…….”

    “거, 거짓말이었어요!”

    마리아 블루벨이 난데없이 외쳤다. 눈은 여전히 질끈 감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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