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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21화 (21/121)
  • 21화. 하얀 죽음의 가면 (9)

    당직을 선 의사와 간호사는 밤새 병실을 드나든 사람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러니 병실 안에 있던 사람 가운데 범인이 있으리라는 추측 자체는 타당하다.

    윌 그렉슨. 앤서니 롭. 로즈 그렉슨. 조이 로….

    아니지. 조이는 제하는 게 맞겠다.

    단순히 어린애라서가 아니라,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패트릭 헤이즈가 위장 입원을 한 건 사건이 두 차례나 벌어진 뒤의 일이었으니까.

    네 번의 죽음이 동일범 소행의 연쇄 살인사건이라고 전제하자면, 범인은 적어도 로라 히스가 죽은 날보다 앞선 시기부터 이 병원에 있었던 인물 중 하나여야 한다.

    그러니 일단은 윌 그렉슨과 앤서니 롭의 입원 시기를 확인하는 게 좋겠고….

    ‘저녁 식사 직전 헤이즈 씨와 그렉슨 씨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패트릭과 윌 그렉슨 사이에 있었다는 다툼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왕이면 윌 그렉슨과 직접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수사관이 범인으로 눈여겨보고 있는 상황이니 독대할 짬이 나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는 닫혀버린 204호 병실 문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사건 생각을 하느라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저… 밀리엄.”

    나는 머리를 등 뒤의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밀리엄을 슬쩍 불러보았다.

    번뜩 눈을 뜬 그가 곧장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합니다. 머리가 복잡해서 잠깐 진정을 시킨다는 게. 나 때문에 불편했나요?”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까나 좀 불편했지 지금은 뭐 딱히.

    “그냥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요.”

    “뭔데요?”

    “혹시 204호에서 열쇠가 발견되진 않았어요?”

    “아.”

    내 물음에 밀리엄도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안 그래도 아까 물어보긴 했는데, 현장조사에서 발견된 증거품 중에 열쇠 같은 건 없었답니다. 내가 둘러봤을 때도 뭔가 숨겨져 있을 만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고요.”

    “그런가요…….”

    그럼 그렇지.

    일이 그렇게 쉽게 쉽게 술술 풀릴 리가 있나.

    역시 문제의 열쇠를 찾아내는 건 플레이어인 내 몫인가 보다.

    반쯤은 예상했던 결과라 별로 아쉽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조만간 204호에 들어가 모노클을 사용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치마 속 발목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

    이튿날 다시 병원을 찾은 나와 밀리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윌 그렉슨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그저 새벽 일찍 산책이라도 나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윌 그렉슨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러던 중 윌 그렉슨의 침대 밑에서 어제는 찾지 못했던 가죽가방 하나가 발견되면서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누가 봐도 숨겨둔 것이 분명한 모양새로 침대 아랫부분에 붙여둔 가방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염화칼륨 주사액 여섯 병.

    “부검결과 헤이즈 씨의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였다고 하더군요.”

    “…염화칼륨이 심장마비를 일으키나요?”

    “희석 없이 주사하거나, 적정량을 넘겨서 투약하는 경우에는요.”

    그렇게 말하며 밀리엄은 어제 패트릭 헤이즈의 침대 위에 흩뿌려진 채로 발견된 소량의 백색 가루 이야기를 덧붙였다.

    성분 분석을 의뢰해둔 상태인데, 이런 상황이라면 그 또한 염화칼륨일 가능성이 높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까 닥터 로이드에게 확인해본 바에 따르면, 보름 전 약품 창고에서 다량의 수면제와 함께 없어진 게 염화칼륨 주사액 열 병이랍니다.”

    “그렉슨 씨의 가방 안에서 발견된 건 여섯 병이고요.”

    “숫자가 딱 맞지요.”

    밀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병의 숫자를 근거 삼아 멜리사를 다시 한번 설득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열 병이 없어졌고 여섯 병이 발견되었다, 네 병이 비는 마당에 마침 죽은 사람도 네 명인데 이게 무슨 뜻이겠냐고.

    “그래서 위브 수사관님은 뭐라고….”

    “오늘은 납득하는 눈치였습니다. 정말로 증거에 발이 달려 기어 나온 셈이니까요.”

    그러나 밀리엄은 영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이 상황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거라면, 반갑게도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침대 밑에서 발견된 가방과 그 안의 주사액들.

    약품 도난 사건과 네 번의 죽음.

    그리고 갑자기 사라진 윌 그렉슨.

    그 모든 것은 안 그래도 윌 그렉슨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던 멜리사가 그의 도주를 의심하기에 차고 넘치는 단서였다.

    하지만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

    어제 발견되지 않은 가방이 오늘 발견되었고, 타이밍 좋게 윌 그렉슨이 사라졌다.

    유력한 용의자 정도가 아니라 당장 범인으로 몰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 상황에 대해, 그 어떤 변명이나 해명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애초에 패트릭 헤이즈와 언성을 올려가며 싸웠다는 사실은, 수사관이 그를 의심할 계기가 될 수 있을지언정 그가 범인이라는 물적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의심 한 번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도망을 쳤다고?

    보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멀쩡한 사람을 네 명이나 죽일 정도로 담대했던 인간이?

    “남편이 범인일 리가 없어요! 그이가 얼마나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인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끝에서 나는 멜리사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남편의 결백을 주장하는 로즈 그렉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 전 멜리사가 ‘살인 용의자’ 윌 그렉슨에 대한 수배요청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이후로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대단히 넉넉지도 않은 형편에, 그저 자기보다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지 못해서 돈도 안 되는 자선사업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사람이다.’

    ‘보육원 아이들도 대여섯 명씩 후원하고 있다, 바쁜 와중에 틈날 때마다 가서 아이들을 직접 돌보기까지 했다.’

    ‘이번에 입원한 것도 봉사활동을 가서 과로하는 바람에 계단에서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그러시냐…….’

    그렉슨 부인이 말하는 윌 그렉슨은 정말로 지극히 선량하고 이타적인 자선사업가였다.

    곁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밀리엄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웃기지도 않는군. 나는 네놈의 부도덕한 여동생에게 그 처신에 마땅한 대우를 해준 것뿐이야!’

    선량한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하기도 하나?

    나는 로즈 그렉슨의 묘사 속 윌 그렉슨과 내가 만난 윌 그렉슨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가 어디로, 왜 사라졌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

    자, 가설을 세워보자.

    첫째. 윌 그렉슨은 범인이 맞고, 도망친 것도 맞다.

    둘째. 윌 그렉슨은 범인이 아니며, 누군가―아마도 진범―에 의해 납치되었거나 이미 사망했다.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나는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했다.

    모든 정황이 윌 그렉슨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원래 이런 이야기에서는 의심을 많이 살수록 범인이 아닐 확률도 높아지는 법 아니겠는가.

    게다가 플레이어가 아닌 입장에서 보아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범인은 약품 창고를 턴 보름 전 시점에 이미 한 명 이상의 인간을 죽일 계획이었다.

    그리고 만약 윌 그렉슨이 범인이라 패트릭 헤이즈를 죽일 예정이었다면, 범행 전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대판 싸우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용의 선상에 오르게 될 텐데, 굳이 긁어 부스럼까지 만들 이유는 없으니까.

    요컨대 이 상황에서는, 혐의가 윌 그렉슨을 향하도록 진범이 판을 짠 거라고 보는 편이 더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두 번째 가설을 채택한다고 치면 몇 가지 의문점이 발생한다.

    우선은 범인이 어떻게 윌 그렉슨을 납치할 수 있었냐 하는 것.

    내가 기억하기로 윌 그렌슨은 대단히 크지는 않지만 결코 작다고도 할 수 없는 중키에, 절대 마른 축은 아닌 체형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니 어지간히 체격이 좋고 힘이 세지 않은 이상, 억지로 끌고 가거나 기절시켜 데려가기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성인 하나를 그런 식으로 요란스럽게 옮기면서 증인 하나 만들지 않는 것도 상식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윌 그렉슨이 자기 발로, 최소한 인적이 매우 드문 곳까지 직접 움직였다고 봐야 타당하다.

    그리고 또 다른 의문점은, 그래서 윌 그렉슨을 대체 어디에 숨겼느냐는 데 있다.

    윌 그렉슨이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멜리사는 하룻밤 사이 갈 수 있을 만한 거리 안에 전부 수배요청을 넣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제 발로 도주한 거라면 최대한 멀리 달아나려 했을 테니까.

    그러나 납치라면, 옮기기가 어려워서라도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이미 죽여버렸을 경우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어쨌든 시나리오상 이 정도 해프닝이 해결되지 않을 리는 없다.

    윌 그렉슨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살아서가 아니라면 시신이 되어서라도.

    그리고 만약 그를 찾아내는 것이, 이 대목에서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퀘스트라고 한다면.

    “의외로 병원 안 어딘가에 있을지도….”

    “당신도 그렉슨 씨가 도망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중얼거린 혼잣말을 들었는지, 밀리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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