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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20화 (20/121)
  • 20화. 하얀 죽음의 가면 (8)

    204호의 또 다른 환자, 앤서니 롭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녁 식사 직전 헤이즈 씨와 그렉슨 씨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렉슨 씨가 아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죠.’

    그런 증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윌 그렉슨의 아내, 로즈 그렉슨은 사색이 되어 남편을 변호했고.

    ‘그냥 사소한 언쟁 정도였어요. 남편이 다소 흥분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헤이즈 씨가 먼저 시비를 거시는 바람에….’

    당사자인 윌 그렉슨은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부인보다도 당당하게 전날의 불화를 인정했다는 모양이다.

    ‘그쪽에서 먼저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대며 시비를 걸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몇 마디 해준 것뿐입니다.’

    그러나 어젯밤 당직이었던 병동 간호사 마리아 블루벨과 의사 수잔 로이드의 증언에 따르면.

    ‘밤새 204호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나온 사람도 없었고요……. 그렇죠, 로이드 선생님?’

    ‘맞아요. 들어간 사람도 나온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랬다고 하는 데다가.

    ‘저, 저는 깊게 자는 편이에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거라고 탐정님이 자주… 흑…….’

    ‘어제는 일찍 잠들었습니다. 이래저래 피곤해선지 저도 모르게 곯아떨어져 버렸거든요.’

    ‘저는 남편이 잠드는 걸 확인하고 집에 가서 잠을 잤어요. 아이들 때문에 며칠에 한 번 정도는 집에 돌아가야 해서…,’

    ‘어젯밤이라면 모처럼 일찍 잠들어서 아침까지 깨지 않았어요. 새벽에 수상한 소리가 났어도 듣지 못했을 겁니다.’

    조이도 윌 그렉슨도, 로즈 그렉슨에 앤서니 롭까지.

    병실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밤새 병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모르겠다고 진술한 상황.

    “드나든 사람이 없었다는 건, 204호 내부에 범인이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런 와중이니, 저런 결론에 도달한 것도 수사관 입장에선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긴 한데….

    나는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내 눈앞에 선 멜리사와 밀리엄을 번갈아 보며 턱만 긁적였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제일 유력한 용의자는, 피해자와 언쟁을 벌였다는 윌 그렉슨 씨고요.”

    그렇게 말하는 멜리사는 믿음직스러운 옛 선배의 동의를 얻고 싶은 듯 밀리엄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밀리엄은 그런 그녀의 결론이 영 탐탁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앞선 세 사건은?”

    밀리엄이 의문을 제기했다. 나 또한 그와 같은 의견이었다.

    잠깐 다툰 정도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원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느냐는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애초에 이걸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해석해버리면 앞의 세 사람은 뭐가 되느냔 말이다.

    그러나 멜리사는 밀리엄이 제기한 의문에 도리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패트릭 헤이즈 씨가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건들 말씀하시는 거라면, 혹시 관계가 있을까 싶어 훑어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우연히 연달아 발생한 사고 같던데요.”

    “방금 그리젤다 벤슨 부인의 시신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패트릭 헤이즈 씨와 같은 자리에 주사자국이 나 있더군.”

    “병원에서 사망한 시신인데 주사자국 정도는 당연히 있을 수 있죠.”

    “벤슨 부인은 생전에 주사 처방을 받은 적이 없대요, 수사관님.”

    내 첨언에 멜리사가 ‘그, 그렇답니까…?’ 하고 난처한 티를 냈다.

    그러고는 코끝을 문지르며 한참 동안 무언가를 고민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멜리사 위브가 무언가 희망적인 대답을 내놓아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고민 끝에 내밀어진 결론도 그리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 처방과 실제 이뤄진 치료 사이의 괴리로 발생한 의료사고라던가.”

    “의도적인 타살일 가능성은 왜 자꾸 배제하지?”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까요.”

    “사건성이 없다는 선임들의 판단을 뒤집기가 껄끄러운 건 아니고?”

    밀리엄의 날카로운 지적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헙, 하고 숨을 멈췄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입술을 꾹 깨문 멜리사 위브의 얼굴에 미묘한 붉은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하는 게 스스로도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밀리엄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솔직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죠…. 선배님도 아시잖습니까.”

    “위브.”

    “확실한 증거나 명백한 정황이 있다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단독으로 맡는 첫 사건부터 건방지게 선임들 결론을 뒤집으려 들었다간 성공해도 실패해도 미운털 박히기 딱 좋습니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결국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는 소리나 다름없는 말.

    밀리엄의 역린을 건드리는 게 목표였다면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발언이었다….

    나는 등골이 절로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밀리엄 쪽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멜리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조금 전보다도 훨씬 서늘하고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서, 선배님. 방금 그 말은, 그러니까.”

    “네 평화로운 직장생활 따위를 위해 멀쩡한 가능성 하나를 없는 셈치겠다는 거냐. 증거에 발이 달려서 네 앞으로 기어 나오지 않는 한?”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빈정대는 목소리엔 실망한 기색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밀리엄을 여전히 의지할 수 있는 선배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던 멜리사는, 밀리엄의 그런 반응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렇게 대화가 뚝 끊겨버린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기실 마음 같아서는 밀리엄을 어디 뒤뜰로 끌고 가서, 좀 더 좋은 말로 멜리사를 구슬리는 게 어떻겠냐고 말해주고 싶었다.

    밀리엄이 수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담당수사관인 멜리사의 호의와 신뢰 덕분이었으니까.

    여기서 굳이 멜리사에게 냉정하게 굴어봤자 뭘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화가 나더라도 잠깐 참고 좋게 좋게 설득하는 사회인의 자세가 앞으로의 조사를 보다 용이하게 만들어줄 터였다.

    그러나 입을 열 수 없는 것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가 그의 사연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양친을 앗아간 연쇄 살인 사건은 미제로 종결되었고, 동생이 살해당한 사건 또한 수사관의 비리가 의심되는 판국.

    단 한 번 진실을 은폐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껴 수사관을 때려치우기까지 한 남자다.

    요컨대 수사관이 진실을 외면한다는 상황 자체가 밀리엄 켄트우드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무언가일 터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차마 밀리엄에게 인내를 바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먼저 침묵을 깨트린 쪽은 한참 동안 밀리엄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던 멜리사였다.

    그녀는 부끄러움과 억울함이 한데 뒤섞인 듯 기이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어딘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선배님이 계속 수사국에 계셔주셨으면 좋았잖아요.”

    밀리엄의 수려한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덕분에 나는 멜리사를 향해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가뜩이나 망해버린 타이밍에 그 말을 꼭 해야 했냐!

    아니, 이해는… 그래. 이해는 했다.

    경직된 조직문화에 시달리다 보신주의자가 되어버린 불쌍한 직장인을 무작정 욕할 마음도 없다.

    그만큼 수사국에 제정신 박힌 수사관이 부족해서 저러는 거겠지.

    롤모델이 없어 아랫물이 흐려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부당한 선임들에게 치이다 보니 소명의식과 상식을 두루 갖춘 옛 선배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된 건 결국 당신이 떠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저 대담한 책임 전가라니…….

    밀리엄은 불길하게도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서늘하게 일그러진 시선은 이제 멜리사가 아니라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 상태로 무언가 깊고도 우중충한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었기에, 나는 밀리엄에게 말을 거는 대신 멜리사 쪽을 보며 고개를 설설 내저었다.

    피차 대화를 이어가기엔 영 글러먹은 것 같다는 내 나름의 신호였다.

    그걸 어찌어찌 잘 캐치한 모양인지, 멜리사가 더듬더듬 화제를 옮겼다.

    “저, 저는 이만 수사국으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내일 다시 오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밀리엄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 다시 입을 열어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다소 맹목적이기까지 한 그 시선을 보며, 나는 적어도 멜리사가 밀리엄을 수사에서 배제시킬 일은 없겠다는 묘한 확신을 얻었다.

    어지간히 존경하는 선배였나 보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나와 멜리사가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밀리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그래, 잘 들어가고 내일 보는 걸로 하자.”

    ‘내일 보자’는 밀리엄의 말을 들은 멜리사의 표정에 안심의 빛이 서렸다.

    이후 그녀는 잠시 주춤거리며 무언가 더 말하려는 사람처럼 굴다가, 이내 단념한 듯 인사를 남긴 채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밀리엄은 여전히 반쯤 인상을 쓴 채로 멜리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진이 다 빠진 사람처럼 비척비척 몸을 움직여 병실 앞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 모습이 여간 착잡해 보이지 않아서, 나는 말을 거는 대신 그의 옆자리에 앉아 지금까지 모은 정보들을 가만히 되짚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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