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하얀 죽음의 가면 (7)
그러나 설명을 안 해줄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잠자코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보름쯤 전에 수면제와 주사액 몇 병이 사라져서 잠시 시끄러웠지요…. 골치가 조금 아파 그렇지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썩 신용이 가는 감상은 아니었다.
이 정도 규모의 병원에서 별것도 아닌 일로 병원장이 골치를 썩지는 않았을 테니까.
주사액이라.
외상이 없는 패트릭 헤이즈의 사망원인을 독극물 중독으로 추정하던 경찰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베네딕트 홀터스의 말대로라면 약품 창고에서 도난사건이 발생한 것이 대충 보름 전.
그리고 최초의 희생자인 로라 히스가 사망한 건 아흐레 전의 일이다.
캐물어서 알아내봤자 어디에 쓰이는 약인지도 모를 테니 거기까지 물을 생각은 없지만, 만약 없어진 주사액이 인체에 치명적인 종류였다면 어떨까.
잘못 투여했다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약이어서 병원장 선에까지 보고가 올라가 베네딕트 홀터스의 속을 썩인 거라면.
만약 범인이 보름 전 창고에서 훔친 그 약품들을 이용해 지금의 살인을 이어가고 있는 거라면?
“저…… 남작님, 괜찮으십니까?”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참동안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고 있던 나는 베네딕트 홀터스의 부름에 급히 정신을 차렸다.
“어머,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아, 저긴 뭘 하는 곳인가요?”
나는 다시 호기심 많은 후원예정자로 돌아가, 1층 계단 옆의 그늘을 가리켰다.
네모난 그늘을 감싸듯이 오른쪽엔 계단이, 왼쪽과 중앙에는 문 두 개가 나있었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약품 창고가 바로 저곳입니다.”
“더 안쪽의 문은요?”
“구관과 연결된 지하 통로로 향하는 문이죠.”
아, 그러고 보니 20년 전까지 사용하던 구관 건물을 허물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했지.
나는 어제 밀리엄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던 병원 뒤뜰에서도 한참 안쪽에 세워져 있던 2층짜리 낡은 건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게 구관이었구나.
훤한 햇빛 아래에서도 꿋꿋하게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관상 참 별로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는 뺨을 긁적이며 그늘 안쪽의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더는 쓰지 않을 요량으로 새 건물을 지어놓고 굳이 지하 통로를 만든 이유는 뭘까 따위의 시답잖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로니카. 여기 있었군요.”
곧장 돌아간 시선 끝에 처음 보는 중년 남자와 나란히 서 있는 밀리엄이 보였다.
베네딕트 홀터스의 안내를 따라 병원 곳곳을 돌아다닌 것도 몇 시간째.
밀리엄의 등 뒤로 보이는 커다란 괘종시계는 벌써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밀리엄 옆에 선 낯선 남자가 토머스 벤슨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토머스 벤슨은 몹시 화가 난 사람처럼, 붉어진 눈에 붉어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것을 잠시 미뤄둔 채 우선 밀리엄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아, 밀리엄. 원장님께 병원을 안내받고 있었,”
“당신이 이 병원 원장이오?”
그러나 내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토머스 벤슨이 베네딕트 홀터스를 노려보며 날 선 질문을 던졌다.
누가 들어도 적개심으로 가득 찬 목소리에 당황한 듯, 베네딕트 홀터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하고 말끝을 흐린 순간이었다.
“이 더러운 사기꾼 새끼!”
토머스 벤슨이 다짜고짜 베네딕트 홀터스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
“시신에 주사자국이 있더군요.”
그리젤다 벤슨의 시신을 육안으로 확인해본 결과에 대해 밀리엄은 그렇게 말했다.
“벤슨 부인은 수술이 무사히 끝난 이후로 주사 처방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고요.”
“누군가 독약 같은 걸 주사한 걸까요?”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중독된 듯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뭔가 주사했다고 해도 독이라기보다는….”
“보름 전에 약품 창고에서 수면제랑 주사액 몇 종이 없어지는 사건이 있었대요.”
“사라진 주사액이 정확히 어떤 건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네요.”
휴게실 의자에 앉은 밀리엄이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피로에 찌든 얼굴을 보니, 병원장에게 의심을 좀 사더라도 정확히 뭐가 없어졌는지 캐물어 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난데없이 벌어진 소란은 밀리엄이 가까스로 토머스 벤슨과 베네딕트 홀터스를 떨어트리는 데 성공하면서 일단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밀리엄은 그리젤다 벤슨의 팔에서 주사자국을 발견한 순간부터 토머스 벤슨이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고 했다.
자국이 어디 꽁꽁 숨어 있던 것도 아니었던 터라, 토머스 벤슨 입장에서는 병원 측이 작정하고 정황을 감춘 것처럼 보였을 거라고.
그런 사정을 듣고 보니 다짜고짜 병원장에게 달려들어 욕설을 퍼붓고 목을 조르려 든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처음엔 이게 무슨 짓이냐며 당장 경찰을 부르라 씩씩대던 베네딕트 홀터스 또한, 밀리엄의 설명을 듣고 난 뒤엔 조용히 일을 묻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말을 바꿨다.
토머스 벤슨의 심경을 이해해서라기보다는 병원 차원의 비리가 있었다는 의혹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인 듯 보였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위브 수사관님은 돌아가셨나요?”
“내가 내려온 게 병실 관계자들의 증언을 듣고 난 뒤였으니… 아마 아직 있을 겁니다. 다시 올라가 봐야죠.”
밀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피곤한 낯을 지우지 못한 채였다.
나는 그가 일어나는 양을 멍청하게 지켜보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러 세웠다.
“밀리엄.”
내 부름에 밀리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착 가라앉은 금색 시선이 음울한 빛을 띤 채 내게로 내려앉았다.
대답도 없이 보내는 그 짧은 눈빛에서조차 지친 기색이 절로 읽혔다.
“피곤해 보이는데 조금만 더 쉬었다 가요.”
“별로 피곤하지는….”
“그 얼굴로 그런 소릴 해봤자 아무도 안 믿을걸요.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인데.”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과장을 조금 보태서라도 다시 앉히는 게 좋을 것 같은 얼굴이기는 했다.
내 지적에 밀리엄은 잠시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손을 들어 제 눈썹 부근을 매만지는가 싶더니 금방 다시 내게로 시선을 내렸다.
주름진 미간과 대조되게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보이나요.”
저걸 말이라고 하나?
지인의 시신을 목격하고, 제대로 충격받을 새도 없이 경찰을 부르고,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현장을 통제하다가 병원장과는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고.
잠깐 앉아보지도 못한 채로 수사에 협조하다가, 그리젤다 벤슨의 시신을 확인하러 내려갔다가, 올라와서는 난데없이 벌어진 싸움판을 말리느라 또 기운을 쓰고.
별로 피곤하지 않다고 말하는 주제에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보이냐’니?
기가 막혀서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실소도 함께 터져 나왔다.
“네. 몹시 그러니까 일단 다시 앉읍시다?”
나는 그가 앉아 있던 의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잠시 주저하는 듯하던 밀리엄이 결국 다시 의자에 앉았다.
조금 전과 달리 반쯤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였다.
깍지 낀 손을 다리 사이에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축 기댄 밀리엄 켄트우드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사람을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피곤해 보인다고 한 게 불만인가?
괜히 야속한 마음이 들어 덩달아 뚫어지게 쳐다봐주었더니, 그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법을 잊어버린 양 퍽퍽하게 말라버린 웃음이었다.
“베로니카.”
어떻게 되먹은 웃음이든 아무튼 웃음이긴 한 것을 머금은 채로 밀리엄이 나를 불렀다.
“왜요?”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뭐래, 백수가.
나는 자기 발로 직장을 걷어차고 나온 지 몇 년이나 지난 주제에 쉬는 법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n년차 백수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농담 같지는 않았다. 밀리엄의 시선은 웃음을 터뜨리기 전과 마찬가지로 내게 꽂혀 있었다.
잔뜩 지쳐서 아예 말라버린 듯한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우습게도 왠지 방금 들은 말마저 조금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도 우습기 짝이 없는 고민을 해보았다. 쉬는 방법이라.
“일단 눈을 감아보는 건 어때요?”
“눈을 감으면 아침에 본 장면이 떠오르는데도?”
에라이.
“그럼 눈 뜨고 계속 그렇게 내 얼굴이나 보든가요…….”
“그럴까요, 그럼.”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낫지 않겠냐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대뜸 그렇게 대꾸한 밀리엄은 정말로 계속해서 내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볼 거냐는 마음을 담아 미간을 찌푸린 채 밀리엄과 눈을 맞춰도 보았지만, 그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기까지 하며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 인간이 진짜.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오기가 생긴 나는 결국 일을 치고 말았다.
팔을 뻗어 그의 머리를 내 어깨로 끌어당긴 것이다.
밀리엄이 엇,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쪽으로 끌려왔다.
당황한 목소리가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그의 관자놀이가 내 어깨에 닿도록 한 뒤, 다른 쪽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가려버렸다.
“생각해보니까 내 얼굴은 좀 비싸서요.”
“어깨는 싸고요?”
잠시 빳빳하게 몸을 굳혔던 밀리엄이 금세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얼굴보다는?”
“저런.”
“하지만 얘도 비싸요. 그러니까 딱 5분만 이러고 있다 올라가는 걸로 하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밀리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고요한 5분이 그렇게 흘러갔다.
손 밑의 눈꺼풀은 드문드문 깜빡이며 손바닥을 간질이기만 할 뿐, 5분이 다 지나가도록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눈을 감으면 정말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